다양한 교리비교 기획을 제공해온 본지가 창간 4주년을 맞아 새로운 연재기획 목사님 성경이 궁금해요를 선보입니다. 본 기획은 기독교인들에게 다양한 교리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이번 기획에 선정된 질문들은 그간 독자들이 본지 종교부 기자에게 보내온 질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질문을 선정했습니다. 각 교단에 공문을 발송해 협조를 구했으며, 성도들의 질문에 답한 목회자들의 답을 게재했습니다.

 
Q17. 겔 3장의 계시의 주인은 예수님이었다. 계 1:1-3의 계시 전달 과정은 어떠하며, 종들은 누구인가? 계시 전달 과정을 성구에 입각하여 설명해 주기 바란다고 질의(요청)가 왔다. 답하기 바란다.

[예장합동보수 최영백 목사]

에스겔서는 바벨론 2차 포로시에 포로로 잡혀간 에스겔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기록한 묵시록이다. 그중 1장은 계시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밝혀 이후 주어질 예언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어진 제 2, 3장은 계시의 전달자인 에스겔이 하나님에 의해 직접 부름을 받은 선지자임을 밝힘으로써 당시 활동하던 무수한 거짓 선지자들과는 구분되는 선지자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본서의 전체적인 내용에 엄정한 신적 권위를 확보해주고 있는 부분이다.

그 과정인 3장 1절에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라고 말씀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2장 1절에서도 나타난다. 그러기에 여기서 ‘그’란 1장 26절에서 언급된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라고 표현한 바로 그를 가리킨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사람의 모양’이라 하였기에 이를 성자 예수 그리스도라 해석한다.

그런데 본 질의는 에스겔 3장의 ‘그’란 말씀과 계시록 1:1~3과 연결시켜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전달하는 사명을 받은 자가 누구인가를 묻는 물음으로 보여진다. 즉 오늘이란 현대에 계시의 전달자가 관연 누구인가를 묻는 물음으로 들려진다. 그러나 질문의 답에 앞서 성경에 나타난 기록들을 그대로 오늘에 적용시켜 해석하는 것은 심히 큰 오류의 위험성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계시의 수단이나 과정 역시 오늘은 과거, 즉 직접 계시시대와는 전혀 다른 시대이기 때문이다. 에베소 교회나 버가모 교회에 나타난 니골라당(계 2:6, 15) 역시 오늘에 직접 적용시킬 수 없고, 두아디라 교회에 여자 이세벨을 용납했다(계 2:20)는 지적 역시 오늘의 교회에 직선으로 연결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지난 번 계시록 22장 18, 19절의 질의 때에 설명했던 바와 같이 오늘 우리시대는 계시가 종료된 시대이다. 거기서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신약 구속사가 2천 년을 지나오는 동안 또 다른 성경이 기록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직분에서도 사도 요한 이후 하나님의 구속사를 책임진 정통 교회들에서는 사도나 선지자란 직분을 가질 수가 없었고 실제로도 가지지 않았다. 이 부분 역시 계시의 종결을 확인시켜 주는 역사적 보증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시대는 이미 주어진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말씀 속에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며 관계하는 시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교회가 본질을 잃고 혼란에 빠지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성경을 무시하고 개인적으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이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본 질문은 질의 자체가 합당하지 않다.

[전 예장합동 이근호 목사]

하나님께서는 천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사도 요한에게 주었고 사도 요한은 그것을 글로 썼다. 성령 안에 이미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믿어지도록 역사하는 것이 계시전달의 순서이다. 따라서 아무리 아는 자국 글씨로 번역되어 있더라도 성령이 찾아와서 가르치지 아니하면 그들을 통해서는 오해만 일어날 뿐이다.

사도의 말이 곧 예수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이처럼 성령의 사역이 주도권을 쥐고 활동하게 된다. 성령이 임하지 않는 상태에서 말씀을 접하게 되면 그냥 무감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성령 받은 자를 핍박하는 식으로 태도를 보이게 된다. 왜 그래야하느냐 하면 계시 전달 주변에 십자가 희생과 고난의 의의가 계속해서 발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1장 28~29절에 보면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되어 있다.

성도가 받는 고난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은 곧 멸망되어야 될 자들이 분명히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는 말이다. 즉 말씀을 성령께서 관장해서 성도를 다루게 되면 구원받는 자의 출현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필히 저주받아야 될 자들이 출몰하게 만드는 효과를 그리스도의 계시 자체에 품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말씀이 단순히 인간의 해석여부를 기다리는 정도가 아니라 말씀 자체가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분류시키고 기어서 성도 만드는 작업을 친히 하신다는 말이다. 따라서 계시를 인간이 해석하기 이전에 이미 계시 자체가 인간을 해석하기 위한 용도로 사도 요한이나 종들에게 전달된 것이다.

사도 요한이나 종이 말씀을 해석하라는 말이 아니라 종들의 출몰 자체가 이미 계시의 내용이 전 세상을 대상으로 하여 풀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성도란 계시를 받아 쥐고 있는 자들이 아니라 반대로 ‘쥠’을 당하고 있는 존재이다. 계시대로 성도는 움직이게 되어 있다. 단지 성도는 그 점을 증거 할 뿐이다.

성도는 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복음을 위하여 일어나야만 해야 할 것들이 줄기차게 연쇄적으로 일어날 뿐인 것을! 따라서 성도가 증거 할 것은 그 원천의 사건, 곧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이 사실 뿐이다. 그것을 빙자해서 개인이 성공할 생각은 말아야 한다.

[한국기독교침례회 조예식 목사]

계시는 예수님의 계시다.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라(계 1:1, kjv)’ 계시는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미래에 성취 사건을 알려 주신 말씀이 계시록이다. 계시록은 헬라어로 ‘아포칼립스’라고 한다. 즉 묵시, 계시로 미래에 예언이 성취 될 것을 계시하여 주신 글이다. 밧모섬은 에베소에서 로마로 가는 항로 중 한 번 정박하는 곳으로 유배지였다.

요한에 의하여 계시록은 유배지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된 것이다. 계시록의 기록 된 시기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시기로 볼 수 있으며,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험악한 박해 시대로 추정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박해는 네로 황제에 의하여 심해졌는데 본격적인 박해가 열려질 때 계시록은 기록 되었다. 다시 말하면 서기 70년 로마 장군 타이터스 베스파시안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불타 소멸 되었고, 성전의 기구, 등대 등 성물이 로마로 옮겨지고 유대인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을 보호하셨다.

하나님의 계시를 증거 하기 위하여 오늘날도 그리스도인 중 특별한 사람을 보호하시며, 환란 속에 살게 한다. 부활 후 예수님은 베드로의 헛 그물질을 수정하여 주님은 명령하여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 153마리(하나님의 아들들)를 잡게 하셨다. 그 후 베드로는 사도 요한 가리켜 말했다. ‘주님 이 사람은 무엇을 하게 되리이까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라오라 하시니라(요 21:21~22)’ 예수님은 다시 오실 그 날까지 계시록을 통하여 역사적인 기록을 사도 요한에게 맡길 것을 계시한 것이다.

지금도 많은 말씀 선포한 자들이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모세오경을 어떤 목자에게는 예언서를 또는 사복음서, 바울서신 등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다. 타인에게 말씀이 맡겨진 것을 부러워 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계시를 감사하며 말씀을 선포하며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분리가 아니라 통합이며 정죄와 심판이 아니라 사랑으로 용서하며 희생하는 것이다. 말씀을 가지고 시기와 질투를 한다면 결국 기독교는 자신의 몫을 다 할 수 없다.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예언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때에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선지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도다.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지도 아니하였으며 그들에게 말하지도 아니하였는데, 그들이 너희에게 거짓 환상과 점치는 것과 쓸모없는 것과 그들의 마음의 속임으로 예언하는도다(렘 14:14)’

‘종’은 남의 집에서 천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강제적으로 종이 된 것을 우리는 노예라고 한다. 신앙 또한 강제적으로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지(고전 9:16)하지 못하고 노예적인 신앙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종은 주인의 일을 알지 못한다(요 15:15) 종이 되는 것은 매매에 의하여(출 12:44) 출생 즉 신분에 의하여(출21:2~4) 포로가 되어서(신 20:11~14) 배상물로(출 22:2~3) 상속으로(레 25:46) 자원하여(출 21:5~6) 종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통하여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위의 항목에 모두 적용된다. 우리는 강제적인 노예로 종이 아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한 오멜 되신 예수께서 몸값을 지불하셨다.

‘종들아, 육신에 따른 주인들에게 두려움과 떨림으로 순종하되, 성실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하듯 하고(엡 6:5)’ 강제적인 종이 아니라. 자원하는 하나님의 사명자들을 종으로 지칭하였다. ‘내가 복음을 선포할지라도 내게는 자랑할 것이 없나니. 이는 내가 부득이 해야 할 일이기기 때문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아니하면 참으로 내게 화가 있으리라(고전 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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