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교리비교 기획을 제공해온 본지가 창간 4주년을 맞아 새로운 연재기획 ‘목사님 성경이 궁금해요’를 선보입니다. 본 기획은 기독교인들에게 다양한 교리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이번 기획에 선정된 질문들은 그간 독자들이 본지 종교부 기자에게 보내온 질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질문을 선정했습니다. 각 교단에 공문을 발송해 협조를 구했으며, 성도들의 질문에 답한 목회자들의 답을 게재했습니다.

 
Q19. 계 10장의 계시를 받은 자는 한 사람이다. 성도들은 누구를 통해 계시를 받아야 하나? 나라와 백성과 방언과 임금들이 이 계시를 받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인가, 안 하는 것인가?

[전 예장합동 이근호 목사]

성도는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게 되어 있다. 그래서 성령께서 성경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성령께서 임의대로 하신다. 고린도후서 3장 3, 7절에 보면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글을 누가 썼든, 누가 읽었던, 누가 읽어주든 상관없이 오직 성령이 임해야지만 계시를 접할 수가 있다. 이 말은 성령님이 필히 오시도록 인간 쪽에서 조절이나 조정이 가능치 않다는 말이다. 애초부터 모든 게 불가능한 일이다. 손톱이 매일 조금씩 자라나는 것도 인간 입장에서 볼 때에 불가능한 일이다. 손톱이 내 몸에 붙어있다고 해서 나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이 불가능함 속에서 지내고 있다. 몸통 자체도 불가사의한 몸통이다. 그런데 인간은 터무니없게도 이 불가능함 속에서 자신의 가능함의 증거를 얻고자 억지를 부린다. 그냥 불가능함에 맡기지 않고 기어이 가능함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이로서 허구가 발생한다. 태어났다는 사실과 아직 살고 있다는 사실과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불가능함의 결과다.

성도가 사는 것은 자기 가능성을 뽐내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 15:10)’ 즉 ‘오늘도 불가능한 하나님의 기적을 늘 맛보면서 존재합니다’를 고백하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가능성을 저주해야 한다. 어차피 가능한 것은 전혀 없고 모든 게 불가능함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사도 이후에는 추가적으로 성경계시를 추가시킬 위인은 이 세상에 더 이상은 없다. 이제부터 말씀 스스로 능력을 발휘하여 택한 백성으로 하여금 믿게 하신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성도에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있을지라도 말씀의 운동력까지 제공할 자는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한 사실이다. 말씀 스스로 움직이기에,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인간 본인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즉 사람이 깨닫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깨닫지 못하기 하기에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구원된 자는 오로지 자신의 성경 지식으로 구원되었다고 소리를 못하게 막아버리시는 것이다.

[한국기독교침례회 조예식 목사]

계시록 10장은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에 기록 된 것이다. 천사가 나타나서 사도요한에게 손에 펴 있는 ‘작은 책’ 을 먹게 한다. 일곱째 나팔이 불기 전에 여섯째 나팔이 불려지고, 마지막 일곱째 나팔(일곱 대접의 시작)이 울려지기 전에 일어난 예언이다. 일곱째 나팔이 울려지면 하나님의 심판인 일곱 대접 심판이 계속하여 부어지고 모든 대접 심판이 끝나고 하나님의 성경이 성취 되면, 예수님께서 오시게 된다.

최후 심판의 나팔이 울려지기 전에 사도요한에게 특별히 천사는 ‘작은 책’을 먹으라 한다. 본문에서 계시를 받은 사람은 오직 사도 요한뿐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하여 모세에게는 모세 오경을 기록하게 하듯, 요한에게는 하나님의 심판까지를 계시하였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의 사자에게 계시하듯, 하나님은 독립된 개교회의 사역자에게 필요한 말씀을 계시한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그리스도이다. 몸 된 교회를 담임 하고 있는 목자에게 그 교회 성들에게 필요한 양식의 말씀을 계시하신다.

다시 말하면 한 목자에게 세계나 국가나 지방을 대표해서 말씀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구약과 신약의 성경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그 시대마다 대표적 인물에게 특별한 계시를 주었지만, 지금은 성령의 시대이며 은혜의 시대이다. 모든 만민에게 성경을 공통적으로 계시해 주었다. 그러나 그 성경의 깊이와 넓이와 깨달음은 천차만별이다. 한 인물을 보고 사람마다 다른 각도로 판단하듯 말이다.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고 성령을 받았다면 기록 된 성경과 성령이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곧 위로자, 그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너희에게 기억나게 하시리라(계 14:26, kjv)’ 문제는 성령을 받기 전까지 누구를 통하여 계시를 받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구원의 복음을 증거 하는 증거자를 통하여 받아야 할 것이다. 또한 각 말씀을 증거 하는 목자 마다 하나님께서 특별 계시의 은사를 주셨다.

어떤 목자는 예언서, 다른 목자는 모세오경을 그리고 피의 은사를 주셨다. 성도들은 성령님의 인도로 자신에게 필요한 말씀을 찾아 먹을 권리가 있다. 세상에는 많은 식당들이 있다. 그 식당 안에는 다양한 메뉴가 있다. 먹어보고 결정 할 문제다. 강요한다고 그 식당을 찾을 사람도 없다. 먹어보고 맛이 없으면 그 집은 다신 가지 않을 것이다. 영구적으로 한 식당만 이용하는 자는 없다. 식당주인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나라와 백성과 방언과 임금들이 이 계시는 온 세계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 되는 것이다. 받고 안 받고 그들의 문제다. 하나님의 뜻은 온 백성이 구원 받기를 원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SOSTV 생애의 빛]

물론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와 비밀을 보이신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하나님께서는 구약 이스라엘의 운명과 초림하실 예수님에 대한 계시도 선지자들을 통해 알려 주셨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다니엘서 9장의 70이레에 관한 예언이다. 이 70이레에 관한 예언은 메시아의 초림 시기와 그분께서 오셔서 이루실 구속사역에 대한 분명한 예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예언을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다니엘에게 나타내 보이셨던 것이다(단 9:21,22 참조).

하지만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초림시기와 그의 이루실 사역에 대한 확실한 예언의 빛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였으며, 여전히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착각 속에서 자신들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선지자와 예언의 빛을 무시한 무섭고 통탄할 만한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사연은 이 유대교회의 역사가 현 기독교회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메시아를 못 박아 죽였던 이스라엘의 교만과 독선이 주님의 재림을 앞두고 있는 현 기독교회인 영적 이스라엘에게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다니엘서가 예수님의 초림과 육적 이스라엘의 버림받을 운명을 예언했듯이 요한계시록 역시 예수님의 재림과 영적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처참하고 비통한 운명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선지자를 통해 주어진 예언과 진리를 거절하여 버림받은 운명에 처했던 것처럼 현 기독교회 역시 대언의 영(계 19:10)을 통해 증거 되는 예언과 진리의 말씀을 거절함으로 버림받을 운명에 스스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대언의 영이 무엇인가?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계 19:10).’

예수의 증거(대언의 영)를 받은 네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한 사람이 아니다. 계시록 19장은 이 대언의 영을 예수의 증거라고 했는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계 12:17)’이다. 그렇다. 마지막 때 요한계시록의 열쇠를 쥐고 있는 대언의 영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는 여자의 남은 무리에게 있다고 요한계시록 자체가 알려주고 있다.

계시록 10장에서 작은 책을 실제로 먹어서 소화시켰다고 생각하지 않듯이 여기서 책을 먹는 사람도 한 사람이 아니라, 한 시대 한 무리를 말한다. 성도들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인도함을 받는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세상과 분리되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독자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가?

[예장합동보수 최영백 목사]

계시록 10장은 여섯째 나팔 재앙이 끝나고 다시 어이질 일곱 번째 나팔(11:15)과 관련한 기사 이전에 주어진 두 개의 삽경 중 첫 번째 삽경이다. 내용은 힘센 천사의 손에 들려진 작은 책에 관한 보도로서, 요한이 밧모섬의 유배에서 풀려나 작은 책, 즉 받은 바 계시를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재 소명에 대해 밝혀주고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천사가 요한에게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리라”(10:11)고 하였다. 본 질의는 이 내용을 근거로 한 질문으로 보여진다.

성경을 해석하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용어 사용도 함부로 해선 안 되는 부분들이 있다. 특히 ‘계시’란 단어를 현재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결코 적당한 표현이 아니다. 지난 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재는 계시가 종결된 시대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특별히 신약시대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역사와 관련하여 계시록 2장 1절에서 주님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밝혀주셨다. 거기 보면 주님에 대하여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로 소개하였다. 그리고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에 대해서는 ‘일곱 교회의 사자’와 ‘일곱 교회’라고 1장 20절에서 해석해 주었다.

그 가운데 ‘교회의 사자’라고 할 때 ‘사자’로 번역된 ‘앙겔로이’(ἄγγελοι)는 ‘보냄을 받은 자’란 뜻의 ‘앙겔로스’(ἄγγελος)의 복수형 명사다. 이를 천사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여기서는 교회에 세우신 하나님의 종들을 가리킨 표현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가 모두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시대는 교회와 그 교회에 보내신 자기 종들을 통하여 구원역사를 펼쳐 가실 것임을 명확히 하신 것이다.

즉 신약의 성도들은 교회와 그 교회에 세우신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가르침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다하여 무조건 순종하고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라와 백성과 방언과 임금들이 이 계시를 받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인가, 안 하는 것인가?”라고 물었는데, 이러한 물음은 올바른 질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세워진 지도자라 하여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사도는 요한일서 4장 1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권면하였다. 바울도 갈라디아서 1장 6, 7절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지적한바 있다. 그리고 이어진 8절에서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강력하게 정죄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성도들이 교회와 교회 지도자의 가르침을 받아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불변의 원칙이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가에 대해서는 면밀한 살핌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 살핌의 텍스트(text)는 성경이다. 어떤 능력이나 기사, 물량 중심의 판단이어서는 안 된다. 자기중심적 판단도 금물(禁物)이다. 오직 성경만이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잣대가 되어야 한다.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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