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교리비교 기획을 제공해온 본지가 창간 4주년을 맞아 새로운 연재기획 ‘목사님 성경이 궁금해요’를 선보입니다. 본 기획은 기독교인들에게 다양한 교리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이번 기획에 선정된 질문들은 그간 독자들이 본지 종교부 기자에게 보내온 질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질문을 선정했습니다. 각 교단에 공문을 발송해 협조를 구했으며, 성도들의 질문에 답한 목회자들의 답을 게재했습니다.

 
Q15. 계시록 3장의 거룩한 성, 예수님의 새 이름이 그의 위에 기록 된다는 것과(12절)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그는 누구인가?

[예장합동보수 최영백 목사]

본 질문에서 12절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21절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보도된 내용이다. 빌라델비아는 사데, 라오디게아, 골로새로 삼각을 이루는 그 중심에 위치한 지역이다. 당시는 소아시아의 서부 루디아지방의 성읍이었고, 현재는 터키에 속한 도시로 그 지역의 흙이 붉기에 ‘붉은 성읍’이란 뜻의 ‘알라세히르’(Alashehir)이다.

이 도시는 A.D. 19년에 지진에 의해 성읍이 모두 파괴되어 시민의 대부분은 성 밖에 움막을 치고 살았다. 그러던 것이 디베료 황제 때 도시가 재건되어 아시아의 중요한 성읍으로 발전 되었다. 그로인하여 이 편지를 썼던 당시는 직물이나 피혁과 관련된 공업이 발달하였고, 양질의 포도가 재배되는 지역으로서 비교적 부요한 도시였다. 종교적으로는, 식물의 신으로도 불리고 포도의 신으로도 불리는 디오누스스(Dionysus)를 섬기는 우상의 도시였다. 우상숭배엔 언제나 음행이 동반되었기에 도덕적으로는 매우 문란한 도시였다. 게다가 이 도시는 예루살렘에서 도피해 온 유대인들이 비교적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빌라델비아 교회는 목숨을 위협받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운 박해 속에서 인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은 그와 같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자신들의 삶속에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8절). 그로 인하여 주님께서 은혜로 약속하신 것이 세 가지로 대변(對辯)된다.

첫째, 장차 자기들을 핍박하던 자들을 굴복시킬 것이란 것(9절), 둘째, 마지막 심판의 때를 면케 해주실 것(10절), 셋째,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할 것(12절)이라고 하였다. 그중 12절은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배반치 않고 신실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새로운 하나님나라에서의 진정한 시민이라는 의미에서 주신 말씀이다.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의 내륙과 바다로 나아가는 관문인 에베소의 동남쪽에 위치하여 교통의 요충지였기에 무역이 성행하였고 양질의 양모와 금융업이 발달한 도시였다. 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다른 교회들처럼 핍박을 받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부요한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신앙은 여타 지역의 교회들에 비해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부족함이 없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죄악된 삶에서 돌이켜 회개할 때 주님은 그런 자들에게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실 것임을 약속한 것이다.

이 역시 주님의 뜻을 좇고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영광에 동참케 해 주실 것이란 의미에서 주신 말씀이다. 아울러 이런 말씀들은 오고 오는 모든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적용된다. 우리가 어떤 환란이나 어려움 속에서라도 믿음을 지키며 진리에 순종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전 예장합동 이근호 목사]

그는 ‘이기는 자’이다. 이긴 다는 것은 이미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고 그 전쟁의 성격과 진행과정에 대해서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내내 이어져오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주의 이름’의 투입으로 야기된 전쟁에서나 나올 결과로 ‘이김’이다. 따라서 인간 자신이 이기는 전쟁은 애초부터 거룩한 하나님의 전쟁이 아니다. 여리고성의 함락이나 다윗의 전쟁 승리는 결코 이스라엘이나 다윗의 이김으로 최종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이름’의 이김이다. 이 일을 위하여 이스라엘이 만들어지는데 그래서 이스라엘 자체가 곧 군대이다. ‘사백삼십 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출 12:41)’

이 ‘여호와의 군대’는 그 가운에 왕이 계신다.(민 23:21) 물론 그 왕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매일같이 되풀이 되는 제사를 통해서 그 분의 ‘세상 다룸의 원칙’을 분명히 알려주신다. 즉 그 누구든지(물론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율법에 저촉이 되는 자들은 다 죽인다는 원칙을 고수하신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하나님에서 살 자는 흠도 티도 없는 완벽하게 깨끗한 자만 살아남은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싸움의 이스라엘 싸움의 진수는 외부 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그 왕이신 하나님과의 전쟁양상이다.

그 당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언약의 나라인 이스라엘 외에 비-언약의 나라인 우상섬기는 이방나라의 전쟁인 줄 알았다. 그러니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신은 항상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이기는 나라로 만들어 줄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내 오해였다. 죄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와의 전쟁을 겨냥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역사를 유발시켜 오신 것이다. 따라서 어느새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나라 자체를 사수하려는 전쟁이라는 태도를 순간부터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지경에 놓이게 된다. 죄는 그 어떤 인간의 바람이나 기대나 조치에도 인간에게 패배하지 않는다. 이것이 죄로 인한 사망의 왕노릇이다(롬 5:14, 17).

즉 ‘이기는 자는 우리 가운데 누구를 두고 말씀하십니까?’라는 묻는 그 질의 자체 속에 이미 자신은 벌써 하나님의 원수로 살고 있다는 티를 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국가 멸망을 통해서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에서 원수가 되는데 그 이유는 십계명을 비롯해서 산상설교를 완벽하게 지켜서 하나님의 의를 만들어낼 그 어떤 위인도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기는 자’로 자처하는 그 자가 곧 적그리스도이다. 신약에 와서 성도는 ‘이기는 자’가 되는데 그 이유는 날마다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반복적으로 패배하도록 성령을 통해서 조치하시기 때문이다. 즉 마태복음 16장 24~25절의 말씀을 적용시키신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처럼 자기를 부인하게 된 성도는 날마다 자신의 이름을 죽게 그 죽도록 조치하는 능력과 더불어 게 예수님의 새 이름으로 드러내게 되는데 이런 자가 곧 하나님의 우편에 이미 앉아있는 자들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엡 2:5~7)’

[한국기독교침례회 조예식 목사]

빌라델비아라는 뜻은 필로스 ‘사랑’과 ‘아델포스’ 곧 ‘형제’라는 말과 합성된 말이다. 다시 말하면 ‘빌라델비아’는 ‘형제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그리스도 안의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 형제 사랑이 없는 자들은 작은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이러한 자들에게 유혹의 때가 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 깨어 기도는 할 수 있을까. 건물과 돈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팔고 있는 자들이 진리의 말씀을 알고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 문제 쯤 해결 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 자들이 사탄의 유혹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교세를 등에 없고 목회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알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진리는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무릎을 꿇는 것 같지만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 넘어지는 것 같지만 반석 위에 집을 지어가고 있는 것이 진리를 소유한 자들이다. 이들에게 면류관이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면류관이 있는지도 모르는 자들은 빼앗기고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땅 위에 호화롭고 거대한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하는 자들에게는 하늘의 거룩한 성을 알지 못하게 되어 있다. 예루살렘 성전 보다 더 큰 성전이 지구 위에 존재하는가? 그렇게 거룩하다는 예루살렘 성전도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다.

서기 70년에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았던 말씀이 이루어졌다. 이제는 하나님으로 계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에 속해 있다. 땅의 잡다한 거짓 집에 속하지 않았다.

새 이름은 예루살렘 성이 아니라 ‘거룩한 도성(계 21:2, kjv)’이다. 예수님은 공생에 기간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지만 이긴 자에게는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계 22:13)’ 주님은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하늘의 처소 오른편에 앉으셨다(엡 1:20). 예수님의 보좌에 앉을 수 있는 자들은 이러한 자들이다.

‘또 내가 왕좌들과 그 위에 앉은 자들을 보았는데, 심판하는 것이 그들에게 맡겨졌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님께 대한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한 사람들의 혼들도 보았는데(목 베임을 당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짐승에게나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지 않았고, 자기들의 이마 위에나 혹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하였던 자들이라. 그들이 살았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을 다스렸더라(계 20:4)’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는 자는 종교와 형식에 치우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가는 자들이 앉는다. 즉 그리스도의 예수의 대변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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