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교리비교 기획을 제공해온 본지가 창간 4주년을 맞아 새로운 연재기획 ‘목사님 성경이 궁금해요’를 선보입니다. 본 기획은 기독교인들에게 다양한 교리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이번 기획에 선정된 질문들은 그간 독자들이 본지 종교부 기자에게 보내온 질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질문을 선정했습니다. 각 교단에 공문을 발송해 협조를 구했으며, 성도들의 질문에 답한 목회자들의 답을 게재했습니다.

 
Q5.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 있는 자격은 등과 기름과 예복이라고 하셨다. 등과 기름과 예복은 각각 어떤 것인가?

[예장합동보수 최영백 목사]

등·기름, 재림 연관 없고 때의 중요성 알림
예복, 은혜 입은 자의 ‘그리스도 대속’ 상징

본 질문은 질문 자체가 합당치 않다. 왜냐하면 재림의 주를 맞을 자격으로 등과 기름, 예복을 말씀하신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등과 기름은 마 25:1-13의 ‘열 처녀의 비유’에서 나온다. 예복은 마 22:1-14에서 ‘임금이 아들을 위하여 베푼 혼인잔치’에서 소개된 내용이다. 모두 이스라엘의 혼인잔치를 비유한 것으로 주님 재림과는 관련이 없다.

그것은 두 비유가 공히 ‘천국’에 대한 교훈적 의미로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천국은’이란 서두(序頭)로 소개된 비유는 성경에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가 주님의 재림과 연관이 없다. 모두가 구속사의 원리를 밝혀주고 있는 내용들이다.

25장의 비유는 이러하다. 거기 등장 한 열 처녀는 혼인 예식을 위해 신랑이 신부 집을 찾아올 때 횃불을 들고 마을 어귀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들러리들이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등으로 번역되었으나 원어의 뜻은 긴 장대에 솜뭉치를 달아 기름을 묻혀 불을 붙인 횃불이다. 이스라엘은 하루의 시작이 저녁부터였다. 때문에 밤에 혼인잔치를 열었고, 혼인예식은 신부의 집에서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리고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들어가면 문을 닫고 더 이상은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 역시 당시의 풍습이었다. 밤에 혼인잔치가 벌어지기에 도둑이나 강도들로 인한 큰 피해가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대자에게는 미리 혼인 예복을 보내었고 오직 그 예복을 입은 사람들만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비유에서 보면 혼인 잔치가 열리는 신부의 집과 신랑의 집은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유추된다. 그것은 다섯 처녀가 기름을 조금만 준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외로 신랑이 늦게 왔고 결국 방심한 다섯 처녀는 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 비유는 구속사의 원리 가운데 상급과 관련된 교훈이다. 즉 때의 소중함을 가르치기 위함이 교훈의 목적이다. 때를 잃으면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엡 5:16에서 “세월을 아끼라” 하신 말씀과 같이 성도의 지상에서의 삶은 천국의 영광을 얻는 소중한 기회이다. 그러나 방심하여 때를 잃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차원의 교훈이다.

22장은 혼인잔치 가운데 필히 예복을 입어야만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풍습을 비유로 든 교훈이다. 하나님의 구속사가 이방으로 확장되었고, 따라서 신약시대는 누구라도 교회에 들어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개방된 구속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하여 누구나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여기서의 예복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한다. 오직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입은 자들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교훈이다. 그런데 그 예복은 잔치를 베푼 사람이 초청자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구원은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전적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문제임을 가르치고자 함이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의 핵심이다.

[전 예장합동 이근호 목사]

등·기름·예복, 인간이 준비할 것 아닌
예수님이 구원 받을 자에게 주시는 것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비유 가운데 특정 개념을 따로 떼내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 자체가 비유가 방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비유에 접근하면서 아담의 죄 가운데 필히 갖추는 사고방식이 바로 ‘나는 구원될 자격자다’라는 인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의 행위와 사역을 말하기 위해서 주어진 비유를 마치 ‘자신들이 대비하고 방비하면 구원 획득이 성사된다’는 인식으로 덤벼들게 된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처녀 비유에는 등과 기름이란 예수님과 구원받은 자들끼리는 그들만이 아는 관계성이 수립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부가 뭘 따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신부됨’ 자체가 인간의 기대감으로 성사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즉 기름 준비하고 등 준비하고 예복 입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고 신부가 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피해 가셔서 구원해내시기 때문이다.

등 준비하기나 예복 준비하기란 예수님께서 마련주시는 것이지 결코 인간이 미리 알아서 숙제 준비물 챙기듯이 본인들이 챙길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하는 일이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아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들은 나름대로 구원 노력에 대해서 하나님 쪽으로 긍정적으로 동의해주는 재미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구원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하심이 아니라 인간들의 선한 동기에 의한 의로운 행위의 협조와 가담으로 성사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의 취지를 무산시키려는 악마의 최후의 발악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비유의 취지는 몽땅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본인이 가져가신다.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혼인잔치 비유에서의 ‘예복’에 관한 사항도 마찬가지이다. 예복의 본질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서 이루어내신 모든 것이다. 이 예복은 인간이 스스로 구원받겠다고 자신이 갖추어 입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이 자진해서 준비한 것들은 도리어 예복 입을 기회마저 가리게 만든다. 소를 새로 샀다든지 밭을 구입했다든지 장사하려 간다든지 본인 결혼식이 강렬한 우선순위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일보다 자기 일이 급하다. 이로써 하나님이 준비한 예복은 홀로 주님 되시기에 임의로 제공하시는 성령 안에서 입혀진다(갈 3:27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반대로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 위주로서 주님의 원수의 면면을 다 드러내는 입장에 있어야 한다. 마태복음 25장에서 본인들은 어리석은 처녀가 되지 않기 위해 등과 기름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 ‘등 기름이 뭐예요?’라고 묻는 그 심보는 자기 나름대로 노력했으니 가상히 봐달라는 극히 인간들의 의식에 불과하다.

성령을 받게 되면 성도 자체가 곧 비유 전체 덩어리라는 알게 된다. 왜냐하면 오로지 예수님의 손수 만드신 작품이기 때문이다. 기름이 성령이라고 우기는 것은 성령을 따로 받아 챙기겠다는 구원 욕심만 돋울 뿐이며 더 나아가서 교회에서 금요철야기도회하면 성령 달라고 부르짖는 극히 악마적인 구원욕구에만 매달릴 뿐이다. 성령을 받은 자라면 모든 비유나 말씀의 성취는 바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에 다 포함됨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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