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교리비교 기획을 제공해온 본지가 창간 4주년을 맞아 새로운 연재기획 ‘목사님 성경이 궁금해요’를 선보입니다. 본 기획은 기독교인들에게 다양한 교리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이번 기획에 선정된 질문들은 그간 독자들이 본지 종교부 기자에게 보내온 질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질문을 선정했습니다. 각 교단에 공문을 발송해 협조를 구했으며, 성도들의 질문에 답한 목회자들의 답을 게재했습니다.

 

Q6. 예수님 초림 때 당시 목자들이 예수께 선한 일을 인해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된 말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요 10:32-33). 지금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예수님의 말이 맞고 당시 목자들의 말이 맞지 않다. 지금의 목자들이 그때 있었으면 예수를 이단이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예장합동보수 최영백 목사]

하나님 백성 아닌 자 세속적 신앙관 때문
이단 정죄 불가피… 오늘날도 마찬가지

본 질문이 속한 요 10:32~33절은 수전절에 있었던 사건이다. 수전절은 신·구약 중간기였던 B.C. 164년에 마카비의 독립전쟁으로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hipanes)에 의해 더럽혀졌던 성전을 복구하고 청결케 한 사건을 기념했던 유대인들의 명절이다. 주님께서 이때에 솔로몬 행각을 찾으셨고, 주님을 목격한 유대인들이 주님을 둘러싸고 벌인 논쟁 사건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주님을 치려 한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일컬어 하나님이라 하였기 때문이었다. 주님은 30절에서 ‘나와 하나님은 하나’라고 말씀했고, 이 발언이 유대인들을 크게 격분케 한 것이었다.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주님이 옳은 것 같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격분은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4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유일신으로 알고 있었던 이유이다. 하나님은 유일신인데 그것도 육신을 가진 인간이 스스로를 일컬어 하나님과 동등이라 하니 격분하는 것은 당연했던 것이다.

둘째, 예수님이 메시아란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렛 태생으로 알려져 있었다. 헤롯왕의 박해로 애굽으로 피신을 하였다가 나사렛으로 이주를 하여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 없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스스로를 하나님이라 하니 격동은 당연했던 것이다.

셋째, 하나님 백성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고전 12:3)고 하였다. 따라서 원인론적으로는 그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하나님 백성들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따라서 그들이 주님을 향해 격분하고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넷째, 육신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왜곡된 신앙 때문이다. 땅에 속한 자들은 필연적으로 그 신앙도 세속적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하여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켜줄 왕으로만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자신들의 잘못만을 지적하셨던 것이다. 그러기에 유대인들로서는 주님이 메시아일 수 없었고, 그런 그가 하나님과 동등이라 하니 격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백성이 아닌 자들은 처음부터 그 신앙이 세속적일 수밖에 없다. 바울은 롬 8:7에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하였다. 즉 세속적 신앙으로는 그 때나 지금이나 결코 주님의 뜻을 깨달을 수도, 순종할 수도 없는 것이다.

[전 예장합동 이근호 목사]

오늘날 교계·목회자들도 세상권력화 심각
자기 양으로 삼지 않으려는 목회관 필요

예수님이 이단이라고 하기 전에 성령 받은 목사는 스스로 자신을 육신적으로 이단일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면서 오로지 강단에서 예수님만 증거 하게 된다. 예를 들면 요한일서 2:27에 보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주님의 기름부음이 스스로 여러분들을 가르칩니다’라고 되어 있다.

바로 성령 받은 목사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교사의 은사가 있다고 하지만 이 ‘가르치는 은사’란 곧 이 목사가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위배하고 있는지를 고백해서 제발 목사의 양이 되지 말고 예수님의 양이 되시기 바랍니다”고 설교하게 마련이다.

이런 예가 바로 요한복음 21장,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나온다. 예수님께서 ‘내(예수님) 양을 먹이라’고 하시면서 먼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그렇게 묻는다. 이는 베드로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게 되면 필히 자기 팬 관리를 하게 마련인데 이는 구약 에스겔에 나오는 목자들처럼 아담의 본성에서 나오는 필연적 모습이다.

그 어느 누구도 여기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즉 “저기서 여기까지는 내 사람이고 저쪽 까지는 네 사람들이다”고 구분 짓게 되어 있다. 이는 교계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 조직 구석구석에 퍼져있고 심지어 가정에서도 예외가 없다.

이런 현상은 악마가 이 세상의 권력 소유라는 방식으로 자기 안정성과 동일성을 갖추라고 부축이기 때문이다. ‘살고 싶지? 그렇다면 힘을 축적하라. 타인의 힘을 강탈하라. 이것은 권력의 속성이며 너는 이 속성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에 그저 유감없이 발휘하라. 힘이 없거든 힘 있는 자에게 기 붙고, 여분이 힘이 남아돌거든 약한 힘을 강탈하라.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이며 여유 있는 행복이니까’ 이러한 내면의 소리는 인간이란 주체성이 곧 힘의 배열로 통해 제자리 잡는 식으로 정립되는 현상들을 보이게 만든다. 제자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스스로가 전혀 ‘예수님의 양을 양육한 목자’가 될 수 없음을 알기에 목자로 삼으신다. 이는 결코 베드로는 자기 주체 파악을 알기에 ‘자기 양으로 삼지 않으려 하는 식’으로 예수님의 양을 섬기는 목자가 되기 때문이다. 세 번씩이나 베드로의 잘못을 확인하시는 이유는 아무리 노력해도 베드로는 자신의 사랑으로 주님의 양을 배출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시키기 위해서이다. 베드로의 목회 방침에서 베드로는 ‘자기 양’을 만들 목적을 가질 수 없게 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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