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교리비교 기획을 제공해온 본지가 창간 4주년을 맞아 새로운 연재기획 ‘목사님 성경이 궁금해요’를 선보입니다. 본 기획은 기독교인들에게 다양한 교리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이번 기획에 선정된 질문들은 그간 독자들이 본지 종교부 기자에게 보내온 질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질문을 선정했습니다. 각 교단에 공문을 발송해 협조를 구했으며, 성도들의 질문에 답한 목회자들의 답을 게재했습니다.

 
Q16. 계시록 2장의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과 만국을 다스리는 철장은 무엇이며, 언제, 누가, 누구에게 받는가? 없어도 구원이 있는가?

[예장합동보수 최영백 목사]

본 질문은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보도된 내용이다. 버가모 교회는 과거 무시아 주로 불렸던 지역의 수도로서 타 도시에 대한 영향력에 있어서 당시 아시아 주의 수도였던 에베소나, 옛 리디아 지방의 중심지였던 서머나에 버금가는 도시였다. 따라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당대에 소아시아에서 제일가는 도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고, 종교적으로는 우상숭배에 있어서 여타의 도시들에 비해 극심하였다. 때문에 13절에서 이 도시를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라고까지 표현하였다.

또한 교회 내에서도 이단 사상을 퍼뜨리는 자들이 있었음도 14, 15절에서 지적되고 있다. 주님은 교회 안에 그런 자들을 방치 방관하는 문제에 대하여 책망하셨고, 아울러 그런 거짓 선지자들을 교회에서 내 쫓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다(16절). 그리고는 “이기는 자에게는 만나와 흰 돌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17절).

여기서 ‘만나’는 이스라엘이 광야생활동안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양식으로서 요 6:31~35을 인용한 것으로 생명의 양식, 곧 영생을 상징한 표현이다. 흰 돌에 대한 견해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가장 알려진 것이 당시 운동경기에서 승리한 자들에게 흰 돌에 이름을 새겨준 것을 비유하였다는 견해이다. 즉 이는 승리의 상징으로써 환난과 핍박, 잘못된 가르침에서 끝까지 신앙을 지킨 자들에게 영생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란 의미인 것이다.

두아디라는 무시아주 수도였던 버가모를 내륙으로부터 오는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언제나 군사를 주둔하고 있던 버가모 남동쪽에 위치한 곳으로 내륙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지역은 작은 도시지만 염색 업이 매우 발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염색 공업의 발달은 조합원들의 일치와 친목을 도모키 위한 수단으로 우상숭배와 음행이 공공연히 조장되었고, 따라서 두아디라 교회는 이러한 문화 속에 세워진 교회였다.

그런데 19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들 가운데는 그런 문화 속에서도 모범적인 신앙의 자세를 가진 자가 있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 이권을 위해 우상을 숭배하고 행음하는 이율배반적인 행태를 보였다. 이에 대해 회개를 촉구하였지만 회개하지 않았다고 21절에서 밝혀주고 있다. 아울러 그러한 유혹에서 믿음을 끝까지 지켜내면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즉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27절)고 말씀한 것이다.

여기서의 철장은 시편 2:9을 인용한 것으로 절대적 통치권과 심판의 권능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도 이를 인용하여 재림하실 때 철장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다(계 19:15). 그러므로 이는 믿음을 승리한 자들에게 그와 같은 강한 권세가 주어질 것임을 가리킨 것이다. 즉 만나, 흰 돌, 철장 등은 모두가 믿음을 승리한 성도들에게 주님으로부터 주어질 최후의 영광을 가리킨 교훈이다. 따라서 ‘없어도 구원이 있는가?’란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 이미 구원을 전제한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전 예장합동 이근호 목사]

성경 및 요한계시록의 모든 용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경유해서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고린도전서 2장 2절, 7~11절에 나온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즉 성령으로 해석, 혹은 성령에 입각한 해석 혹은, 성령이 보는 식으로 말씀보기 같은 것은 모두다 십자가 사건의 확대와 확산을 염두에 둔 해석이 된다. 십자가 사건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성경 해석은 궁극적으로 메시아를 살해할 수밖에 동기로서 작용하는 힘이 뿜어내게 해석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그 어떤 용어나 대목을 설명해도 만약에 성령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숨겨진 지혜인 십자가 피 흘리심의 의의만 드러낼 뿐이며 이런 결론에 도달되지 않는다는 것은 비 성령적인 즉 악령에 의해서 예수님의 공로를 훼방하려는 해석을 그동안 쭉 해왔다고 볼 수 있다.

만나라는 용어는 출애굽기 16장에 처음 등장한다. 그 이름도 그냥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이것이 무엇인지?’ 자체 의구심을 담은 그런 명칭이다. 이로서 인간의 한계를 지적하는 요소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통해서 수시로 반복된다.

그러다가 이 만나가 신명기 3:8에는 ‘떡’이 되고 이 ‘떡’은 매일주시는 말씀의 양식이 된다. 이런 변화를 거쳐 요한복음 6장에 가서는 예수님 자신을 하늘의 만나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2~35)’

요한계시록 사도 요한에 의해서 써졌기에 요한복음의 단어사용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곧 요한계시록의 만나란 예수님을 두고 말씀하신다. 단 요한복음에서는, 사람이 먹어야 할 떡이라는 점에 강조점이 있는데 이는 아직 예수님 십자가 지시기 전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반면에 요한계시록은 모든 것을 최종 정리하고 마무리 짓는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강제로 성도되게 하시는 조치 (먹이시는 조치가 아니라)를 취하는데 이는 이미 인간들에 있어 먹으나 안 먹으나 당연히 저주받아야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만천하에 들통 났기 때문이다.

흰 돌이나(수 4:5) 만국을 다스리는 철장(시 2:9) 같은 용어 동원은 모두 예수님 자신을 두고 말한다. 구약에서의 선택된 돌이란 이스라엘의 선택을 알리는 물증이지만 이미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완전하게 부정당해야 될 죄인의 대표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 부인과 부정을 유발시키고 이 사실을 십자가 죽으심으로 통해 수긍을 할 때, 이것이 바로 참 이스라엘적인 안목에 의해서 비로소 밝혀지는 것이 요한계시록에서의 용어 사용법이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49~51)’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속으로 들어와서 그 사건 자체를 반복시키는 식으로 해석하지 않는 요한계시록 해석은 그 어떤 주장을 내놓아도 다른 복음이다. 구원은 이미 인간이 ‘받고’ ‘아니 받고’로서 적용되는 세대 속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대는 이미 저주받아야 될 세대인 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다 폭로되었다. 따라서 만나를 취득한다고 해서 구원이 주어지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십자가 피가 이 지상에서 반복적인 저주와 허무를 유발하는 가운데 건질 자만 건져내는 식으로 구원이 성사된다. ‘이미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롬 8:30)’

[한국기독교침례회 조예식 목사]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어진 만나를 주어 먹게 하고 또 흰 돌을 줄 것이요. 그 돌에는 새 이름이 기록되어 있나니. 그것을 받는 자 외에는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느니라.(계 2:17,kjv)’

‘만나’는 ‘이것이 무엇이냐?’ 라는 뜻이 있다. 만나는 족장시대와 애굽의 노예로 있을 때에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유월절 양의 피와 홍해 그리고 이방신을 추종하는 애굽의 백성들을 떠나 광야에서 ‘만나’를 맛보게 되었다.

그리고 가나안를 정복했을 때부터는 내리지 않았다(수 5:12). 그리고 만나는 밤에 내렸다(민 11:9). 백성들을 만나를 먹기 싫어했다. 종으로 있을 때 먹어 던 음식들의 맛이 생각났기 때문일 것이다(민 11:6). 만나는 하나님께서 광야에 있던 백성들에게 주었던 양식이었다(출 16:4, 15:, 요 6:31).

만나는 하나님의 빵이며, 곧 참 빵이신 예수그리스도이다(요 6:32~35).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주님께서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부터 인도하여 나온 것과 아침에는 너희가 주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말했다(민 16:4~7).

버가모교회는 ‘사탄의 위’와 ‘가이사의 신전’ 있었으며 황제를 ‘주’라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곳이다. ‘네가 어디에 거하는(계 2:13)’ 여기에서 거하다는 임시로 사는 장소가 아니다. 항구적인 의미가 있다. 어떠한 시련과 고난이 따른다 해도 자리를 수호하는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자리를 지키는 자에게 감추어진 만나를 주님께서 허락하신다.

종교적이며 종의 신분으로는 만나이신 신비의 말씀을 받을 수 없다. 다른 종교도 기도한다. 그리스도인도 기도한다. 다 같은 기도인가? 모두가 말씀이 있다. 다 같은 말씀인가? 핍박과 환란을 통과하는 자에게 주는 법궤 안의 신비의 말씀을 받는다.

‘감추어진 만나’나 ‘흰 돌’은 같은 의미가 있다. 다르게 볼 수 있지만 지면상 줄이기로 한다. 鐵杖(철장)은 나무가 아닌 철로 만든 지팡이다. 모세의 나무지팡이는 선민 이스라엘 민족들의 불평을 받아 주었지만,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철지팡이’는 은혜와 용서의 말씀이 아니다.

‘이 양날이 선 날카로운 검을 가진(계 2:12)’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세벨을 용납하고, 유혹하여 음행하게 하며 우상들에게 희생물을 드리는 자들은 철장으로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하나님은 이긴 자들에게 철장을 주어 그들을 다스릴 그 날이 올 것이다.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은 감추어진 만나와 흰 돌 그리고 철장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며 이세벨의 영을 받는 자들은 구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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