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교리비교 기획을 제공해온 본지가 창간 4주년을 맞아 새로운 연재기획 ‘목사님 성경이 궁금해요’를 선보입니다. 본 기획은 기독교인들에게 다양한 교리를 접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이번 기획에 선정된 질문들은 그간 독자들이 본지 종교부 기자에게 보내온 질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질문을 선정했습니다. 각 교단에 공문을 발송해 협조를 구했으며, 성도들의 질문에 답한 목회자들의 답을 게재했습니다.

 

 

Q27. 예수님과 하나님이 계신 곳에 생명책이 있는가, 없는가? 자기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보았는가? 없으면 천국(거룩한 성)에 못 들어간다.

[전 예장합동 이근호 목사]

생명책이 있다는 사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보고 안 사실이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출 32:32)’ 즉 하나님의 언약 속에는 이미 누가 구원되고 누구 필히 구원되지 못할 자인지를 정해져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것을 지우고 아니 지우고 라는 언급이 나오는 경우는 이 지상에 언약의 본질과 취지를 바깥으로 알려주려는 방편으로 활용되어진다는 사실이다.

로마서 9장 11절에 보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에베소서 1장 4~5절의 말씀을 역사 팽창을 통해 실제화 시킨 현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사도 바울의 존재가 또한 적절한 예가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생명책의 명단 확인은 인간이 확인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늘 확인시켜주신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예수님의 고백에 동참시키므로서 말이다(마 26:39).

일을 저질러놓고서 해피엔딩을 고대하는 것은 인간들이 자신을 속이는 짓이다.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하고서도 자기 인생만큼은 행복을 원하다니! 이 속임과 속임으로 버텨 나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하지만 이 인생들은 나락으로 빠지는 가속이 붙어있다. ‘멸망으로 통하는 길에는 찾아가는 이가 많다(마 7:13)’ 예수님께서 이미 단언을 내리셨다. 이상하다. 멸망으로 빠져 들어가는 길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쪽이 진리라고 여긴다.

그것은 진리에 관심 있어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해피엔딩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감추고 문제있는 자를 그대로 천국에까지 골인시키려고 시도한다. 즉 천국이 어떤 곳이며 누구만을 섬겨야 하는 세계인지도 모르면서 평소에 자신을 섬기는 방식으로 사는 자기 자신을 억지를 부리면서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자기 싸움을 마지막 기도를 통해서 하셨다. 그만큼 죄의 가장 무거운 무게는 역시 모든 것을 자기 생존과 자기 이익으로 회수시키는 죄의 마지막 발악을 예수님도 몸소 체험하신 것이다. 이런 죄를 체휼하신 예수님께서는 동일한 죄에 매여 사는 자기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하시고 그들을 친히 이끄시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꿀을 놓으면서 사람들을 유혹하는가? 마태복음 7장 15절의 말씀은 더욱 충격적이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즉 사람들이 멸망의 나라에 이르기 전에 미리 마중 나온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해피엔딩을 미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3~4)’ 성령 받은 사도는 말한다. 이런 현상이 이상한 일이 아니란다. 즉 이미 이 세상에서 지옥 갈 사람들을 미리 마중 나와서 모집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란다.

하지만 이런 자들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거룩한 성이란 끊임없는 분류작업의 산물로서 입성할 자를 골라내기 때문이다. 가지 않을 자를 기어이 다른 복음, 다른 영, 다른 예수에 미혹되도록 사단의 일꾼들의 활동을 하나님은 허락하시는 것이다(고후 11:4, 13~15).

[SOSTV 생애의 빛]

요한계시록 20장 15절에 ‘생명책’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5)’ 이 생명책의 용도에 대해서는 앞의 12절에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계 20:12, 13)’

우리는 계시록 20장의 기록을 통하여 생명책이 확실히 있음과 그 용도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다. 생명책은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의 인생 여정의 기록이 담겨 있는 책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 생명책은 언제 펼쳐지게 되는가?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무덤)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 시에 생명책이 펼쳐짐을 알 수 있게 된다. 사도요한은 이 사실을 요한복음을 통해 아래와 같이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오리라(요 5:28, 29)’

그렇다. 현재 생명책에 누가 기록되었고 배제되었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다. 현재 어느 단체의 교적부에 이름이 올라 갔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생명책에 녹명된 기준이 아니다. 우리 개개인이 생명책에 녹명되었는지의 여부는 세상 끝에 예수께서 가시적으로 재림하여 최후 심판을 집행하실 때 확인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생명책에 녹명되는 기준은 무엇인가? 단지 예수만 믿으면, 교회만 나가면, 헌금 잘하고 봉사활동 잘하면 생명책에 녹명되는 것인가? 수많은 종교지도자들은 그렇게 가르칠지 모르겠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우선 최후 심판의 날에 예수께서 무엇으로 각 사람을 심판하실 것인지 사도 바울의 증언을 통해 확인해 보자.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양심을 속인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율법을 알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중략)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 2:12, 16)’

사도 바울은 최후 심판 날 심판의 표준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즉 사도 요한의 선한 일을 행한 자와 악한 일을 행한 자의 구분 기준은 하나님의 도덕 율법 십계명이라는 사실이다. 한 국가가 그 나라의 법률로써 죄인을 판결하듯이 하나님 나라 정부도 하나님 나라의 율법으로써 죄인을 판결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다시 계시록으로 돌아가서,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불 못에 던지운다고 하였는데(계 20:15) 그들은 바로 짐승의 표를 손과 이마에 받는 자들(계 20:4)임을 알 수가 있다. 짐승의 표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짐승 자신의 권위로 세운 짐승의 계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마지막 날에 계시록은 짐승의 표가 전 인류에 강요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게 하고 짐승의 계명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대환란을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 날 생명책에 녹명되는 기준은 이 환란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짐승의 계명을 택할 것인가로 결정지어지게 된다.

[예장합동보수 최영백 목사]

‘생명책’이란 빌립보서 4:3에서 단 한 번 언급되고 나머지는 오직 계시록에서만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다. 그중 20장 12절에서는 백보좌 심판과 관련된 기사에서 하나님 앞에 생명책이 펴져 있음을 보도한 바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계신 곳에 생명책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비유지 실제 천국에 현세와 같이 종이에 활자로 인쇄된 책이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 인간들의 모든 삶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온전히 아신다는 것을 밝혀주시기 위한 하나의 비유인 것이다. 하나님도 인간들처럼 기억을 다 하실 수 없어 책에 기록을 해야만 하는 불완전한 하나님은 아니신 것이다.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보았는가? 없으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라고 한 이 질의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원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질문이며 크게 성경을 왜곡한 것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성경에 없고, 확인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란 엄격하게 규명하면 인간의 체험이나 확신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 호에도 거듭 언급한 바와 같이 중생의 과정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구원에 대하여 유대인들처럼 확신한 경우는 쉽지 않다. 요 8:33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러자 주님은 그들의 말을 반박하셨다. 주님의 반박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아버지는 한 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라(8:41)’고 좀 더 강력하게 피력하였다.

이에 주님은 8:44에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이라는 지적이셨다. 우리는 이런 말씀에서 사람들 인식 자체가 구원을 결정하는 결정적 근가가 못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경우는 눅 18:10-14에 기록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바리새인은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8:11, 12)’라고 하였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고 하였다.

기도의 내용을 보면 구원에 대한 확신은 오히려 바리새인이 더욱더 견고하고 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옳다고 하셨다. 무슨 뜻인가? 인간의 자기 생각이나 확신이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따라서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지 확인한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부터 성경을 왜곡한 말이지만 확신한다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는 믿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질문의 오류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주님의 다음 말씀에서 좀 더 분명해진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 23)’

[한국기독교침례회 조예식 목사]

생명책은 구원 받은 성도들의 이름이 기록 된 책을 말하고 있다. 생명책에 기록 되지 않는 자는 불 호수에 던져 진다(계 20:12~15, kjv) 시편의 기자는 ‘그들을 살아 있는 자의 책에서 지워 버리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 되지 않게 하옵소서(시편 69:28)’라고 다윗이 그의 고통을 통하여 악인들이 의인과 함께 하지 못하도록 노래로 찬양하고 있다(시 69:34). 생명의 책에 기록 되지 않도록 우리가 기도한다고 기록되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생명의 근원을 주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이는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기 때문이니 주님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시 36:9)’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사람은 마땅히 자신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며 알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찬양할 것이다. ‘살아 있는 자, 살아 있는 자, 그가 오늘 내가 행하고 있음 같이 주님께 찬양하며, 주님의 진리를 아버지가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사 38:10~20)’

예수 안에 있는 자의 생명을 말하고 있다. 숨을 쉬는 자, 예배당의 뜰만 밟고 있는 자들은 생명이 없다.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생명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여 하나님으로 오신 그분의 사건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예수그리스도 그분 자체가 생명이시다. 그분 안에 기록되는 것이 생명의 책에 기록 되는 것이다. ‘살리는 그것은 그 영이니 육신은 전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씀들이 곧 영이요, 그것들이 생명이니라(요 6:63)’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은 자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졌다(빌 3:20). 또한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 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라고 했다. 하늘에 어떻게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하늘 그 자체가 하나님이시며 예수이시다. 생명의 책과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을 왜 구분하는가? 전지전능하신 분인 하나님께서 인간이 생각하는 것처럼 명부에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 기록할 것인가? 그분 자신이 말씀이고 생명이며, 생명의 책이다. 하나님은 유다의 죄를 철필과 금강석의 촉으로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졌다고 한다(렘 17:1).

어떻게 우리들의 죄가 우리의 마음 판에 금강석 촉으로 기록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생명의 책이다. 하나님은 성령님이며 성령님이 계신 곳이다. 하나님과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생명책이 있다. 성령을 받았고 성령이 자신과 함께 하는 것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 된 것을 안다. 천국은 예수다. 예수님 안에 기록 되어 있다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 앉아 있다는 것이다(엡 2:6).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