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여성의 활약은 3.1운동 시기에 집중되고 있다. 그러면 이전에 한국여성의 독립활동은 정체돼 있었던 것일까? 필자는 3.1운동 시기 여성독립활동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전국 각지에서 활약했던 여학생 독립활동에 주목했다. 1919년 3.1운동은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전개된 민족적 항일운동이자 사회변환의 일로였다. 당시 신교육을 받았던 여학생의 활약도 주목되는데, 이들에 의해 전개된 신여성운동은 구시대적 관습을 타파함과 동시에 정체성 확립에도 주력했다. 조선 후기는 자유와 민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1928년 8월 25일 자 ‘중외일보’에는 ‘중국 창공에서 여류비행사 권기옥 등이 국민군에서 활약…’의 기사가 게재됐다. 권기옥은 1924년 중국의 운남항공학교에 입학, 제1기생 졸업, 중국 공군으로 복무하면서 소령, 중령을 거쳐 대위를 달았던 한국 여성비행사였다. 이러한 그녀의 행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필자는 권기옥의 성장과정과 활동 면면을 조망해볼 때, 그 의지의 원동력은 조국독립에 대한 염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제침탈로 민족독립을 향한 희망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던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내 몸뚱이는 샘골과 조선을 위해 생긴 것이다” “너희는 우리나라의 보배다.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면 큰 일군이 된다”라고 피폐해져 가는 농촌에 민족의식과 계몽의 필요성을 외쳤던 여성독립운동가! 그녀는 심훈 의 실제 모델이자 농촌계몽운동에 서슴지 않고 뛰어들었던 독립운동가 ‘최용신’이다.3.1운동 이후 1920년대는 농민운동, 노동운동이 활발해지고 야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지식층은 민중 속으로 파고들면서 ‘농촌 계몽 운동’의 주류인 ‘브나로드(Vnarod)’
장순휘 여의도연구원 정책자문위원 우리 민족의 큰 스승으로 존경받는 분 중에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님이 있다. 일제시대에 단재께서는 한민족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투혼을 불살랐던 애국자이신 분이다. 오늘날 비록 남북이 분단돼 흥망을 두고 싸운다하나 일제시대만큼 민족생존의 위기와 비극이 또 있었을까?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하면서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미명하에 조선민족을 일본인과 동화(同化)시켜려고 저지른 온갖 만행을 우리의 역사는 알고 있다.이러한 우리 민족의 치명적인 위기시대에 단재는 그의 저서 에서 “정신이 없는 역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여자도 배워야 산다! 장옷을 벗고 긴 치마를 잘라 버리고 첩첩이 닫힌 속에서 뛰쳐나오너라!”고 외치던 여성은 신여성의 옷차림에 구두를 신고 있었다. 전통적인 사회통념 속에서 여성은 다소곳해야 한다고 교육해왔건만, 얼굴을 높이 들고 구둣소리를 내며 힘차게 걷는 차미리사의 모습에 장안 시민은 문화충격에 휩싸였다.당당했던 구둣소리처럼 여성대중교육의 선두에 섰던 차미리사(1879~1955). 그녀는 한성부 서부 공덕리의 차유호(車柳鎬)와 장씨(張氏) 사이에 태어났는데, 손위 5형제가 모두 요절한 뒤 얻는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여성항일운동이 두드러졌던 3.1운동기는 전국적인 규모만큼 한국여성의 역할도 변모시켰다. 당시 집안 내조자에 머물렀던 한국여성이 역사의 주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면 이들의 변화를 어디부터 주목해야 할까.문호개방과 종교유입, 근대교육의 확대로 교육기관에서 수학하는 여학생이 늘어나면서 이들이 민족운동의 대열에 서는 폭도 넓어졌다. 물론 이런 변화는 거슬러 올라가서 동학의 인내천(人乃天)과 사인여천(事人如天), 박영효의 남녀동권론(男女同權論)에서 강조했던 인간존중과 평등에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1896년 4월 21일. 이날 발간된 독립신문에는 ‘여성도 교육을 받아 지식을 넓히고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논설이 실렸다. 그래서였을까. 중소도시의 부인층을 중심으로 남녀동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각성의 목소리가 일기 시작했다.독립신문이 추구했던 의식계몽운동은 1898년 9월 10일에 발표된 여성근대교육 및 여권주장을 담은 ‘취지문’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단체인 ‘찬양회’의 조직에 영향을 줬다. 이어서 일제강점에 억눌려 있었던 민중의 저항 심리로 귀결돼 신분과 계층, 지역, 성별을 뛰어 넘는 3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예로부터 제주도는 돌, 여자, 바람이 많아서 삼다도(三多島)로 알려졌지만, 근래에 세계자연유산(World Natural Heritage Jeju)으로 지정되면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관광문화도시로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천혜의 자연환경 이면에 제주는 침략과 저항, 항쟁으로 얼룩진 역사의 기록도 고스란히 안고 있다.역사 속 제주는 동북아지역을 잇는 바닷길의 주요 요충지로 외부문화의 유입과 수용이 용이했지만 외세의 주요관심지역으로 부각되면서 잦은 침략도 겪어야 했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침략, 강제수탈을
정라곤(논설위원, 시인) 대한민국 헌법은 제86조에서 ‘국무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제1항)’로 규정돼 있고, 제2항에서는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한다’로 돼 있다. 대통령을 보좌해 행정 각부를 통할하는 국무총리 임명이 지체돼, 지난 4월 27일 사퇴 표명한 정홍원 국무총리가 후임 총리 임명 시까지 연명되는 현 정부를 볼 때 어딘가 모르게 비정상적이고, 불안정하며 불안한 구석이 있다.그렇다면 사실상 빈자리처럼 느껴지는 국무총리 자리를 채워 국정을 정상화하는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전 세계 여성리더의 진취적인 행보와 드높아진 사회적 위상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역사 속에서 존재감조차 부각되지 못했던 한국여성의 발자취를 돌아보게 된다. 한국여성의 본격적인 사회진출은 대한민국 여성리더의 반열을 높이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런데 한국여성의 사회진출과 그 시도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가 ‘대표적인 한국여성인물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당연하게 ‘신사임당’을 떠올리는 것처럼, 한국적 여성상과 그 이미지는 전통사회체제의 그림자와 맞물려 있어서 진취적인 한국 여성상을 떠올릴 수
이의상 수원보훈지청 보훈과 실무관 소치동계올림픽에서 우리 국민들은 하나 되는 마음으로 외쳤다. ‘대한민국 파이팅! 힘내라 대한민국!’. 소치올림픽도 그 막을 내리고 지난 3.1절에 내 귓가에는 이 함성소리가 울렸다. ‘대한독립만세!’. 온 겨레가 목숨을 걸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민족의 절규. 일제의 만행을 만천하에 폭로하며 파고다공원에서 종로, 광화문, 경기도 화성 제암리 등 도시와 농촌 전 지역에서 학생과 민중이 모두 하나가 되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과 자유를 찾기 위해 피로 물들었던 그 날 3월 1일.우리민족이 일본의 만행과 핍박
세계사에 유례없는 대규모 평화시위. 뉴욕타임즈는 3.1운동을 1919년 3월 12일자 이렇게 보도했다. 최근 뉴시스가 미 연방의회 주요 신문사 자료를 검색한 결과 3.1운동 당시 AP 통신을 비롯해 유수 미디어들이 ‘평화·인권·자유독립을 부르짖는 3.1운동’을 유례없는 평화시위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특히 뉴욕타임즈는 1919년 4월 24일 ‘코리아’라는 장문의 사설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지지한 것으로 확인됐다. 일제의 만행 앞에 평화로 맞섰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은 95년 전에도 세계를 감동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사죄조차 하지 않
이병익 정치평론가 요즘 교학사 교과서에 대해서 좌파들의 공격이 도를 넘었다. 이들이 교학사에서 출간한 역사교과서를 두고 친일미화니 군사독재를 미화한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모르는 일반국민조차도 교학사의 교과서가 절대로 채택돼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학사의 역사교과서는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필자가 이 교과서를 한번 읽어 보았다. 좌파들이 주장하는 것은 근현대사 부분에 들어있는 친일미화와 독재미화라는 두 가지 이유다. 어디를 보아도 친일을 미화한다든지 독재를 미화하는 글귀는 보지 못했다. 필자는 교학사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규 직원이 나에게 물었다. “과장님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 무슨 날인가요??”이 직원뿐만 아니라 민족정기 선양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우리처의 직원을 제외하고는 우리 국민의 대부분이 그런 날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누군가가 무의식중에 물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쉽게 몇 월 며칠이고 무슨 날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절대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될 일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은 4월 13일이다. 역사적으로 이 날은 3.1운동의
삼일절은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지로부터 독립을 되찾기 위하여, 온 겨레가 하나로 뭉쳐 독립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던 날을 기리는 정부의 4대 국경일 중 하나이다.만세를 부르다가 수많은 인명을 빼앗겼던 이 날은 역사적으로 오직 한번 있었던 중대한 날로 온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 용감한 한민족의 행동을 통하여 일본 외교의 허위성이 드러났고 한민족은 생명을 받쳐가며 독립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어 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참전국들이 가진 ‘카이로 회담’과 ‘포츠담 선언’에서 종전 후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기로 확정하는 결과를 가져오
19일, 직선제 개헌 이후 가장 높은 투표율을 보이며 향후 5년 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할 대통령이 당선됐다. 역대 가장 확실한 여야의 대결, 보수와 진보의 대결 구도를 가져오며, 과반 득표 당선자, 동북아 통틀어 최초 여성대통령, 부녀대통령 등 수많은 수식어가 붙으면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온 국민의 정신을 쏙 빼놓으며 대선이 휩쓸고 지나가던 날, 조용히 우리 곁에 찾아온 한 의인(義人)이 있었다. 하지만 알아보는 이도 관심 갖는 이도 별로 없었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다는 표현이 솔직할 것 같다.
최주식 시인 우리나라는 종교다원화 국가로서 다른 나라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자식들 건강하고 잘되라고 장독대에서 정한수 떠 놓고 두 손 모아 빌던 칠성신앙을 비롯한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고유의 종교를 제외하더라도 유교,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 여러 종교들이 우리의 정신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20조 1항을 보면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고 하였으며, 제2항에서는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헌법에는 종교차별금지와 정치와
김원길 7대 국가상징물 연구가 태극기의 원조가 되는 경주 감은사지 태극문양을 아는 국민은 별로 없다. 이 문양은 신라 때 지은 사찰에 방치돼 있으나 중국 송나라 주돈이의 태극도설보다도 388년이 빠르다. 태극기는 3.1운동 당시 파고다공원에 집결해 만세삼창 등을 부를 때 사용하던 항쟁의 도구였다. 노벨상 수상자인 소설가 게오르규는 태극기를 세계의 모든 철학이 요약된 유일한 국기로 평가했다. 태극기는 흰 바탕에, 위는 빨강, 아래는 파랑색인 태극문양 원을 중앙에 그리고, 모서리 4괘는 건곤감리를 나타내는 검은 색 막대로 비겨 표시한다
93년 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울렸던 만세의 함성,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손마다 들린 태극기. 일제의 총에 쓰러져 가고,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우리네 말도 문화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던 민족.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우리 민족은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일제강점기의 뼈아픈 과거를 딛고 일어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뤄냈다.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는 선조들의 피땀 어린 노력과 순국선혈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제93주년 3.1절을 기점으로 사회 이곳저곳에서 3.1운동의 정신을 다시금 계승해야 한다는 목소
현재까지 현 정권이 받은 점수는 역대 정권 가운데 최하위다. 물론 1년 남짓한 기간 만회하리라 믿으며 기대도 해본다. 실용과 중도와 통합을 표방하며 야심차게 출범한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 또한 기대만큼 크다는 얘기다. 특히 이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민들의 정서에 가장 폐해를 끼친 것이 있다면 뭘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의식과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오게 했다는 것이다. 즉, 가장 정의로운 정부 같아 보이면서도 그 내면엔 가장 부정했고 부패했고 불의했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또 숲을 보고 나무를 보지 못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