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1896년 4월 21일. 이날 발간된 독립신문에는 ‘여성도 교육을 받아 지식을 넓히고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논설이 실렸다. 그래서였을까. 중소도시의 부인층을 중심으로 남녀동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각성의 목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독립신문이 추구했던 의식계몽운동은 1898년 9월 10일에 발표된 여성근대교육 및 여권주장을 담은 ‘취지문’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단체인 ‘찬양회’의 조직에 영향을 줬다. 이어서 일제강점에 억눌려 있었던 민중의 저항 심리로 귀결돼 신분과 계층, 지역, 성별을 뛰어 넘는 3.1운동이 전개됨으로써 민족저항의 기치에 어떤 잣대도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민중을 향해 총검을 겨누었던 조선총독부 휘하의 일본 기마대와 헌병은 만세를 부르짖으며 쏟아져 나오는 인파와 태극기 물결의 위력에 여지없이 무너지면서 허공을 메웠던 만세소리는 항일정신의 실체로, 독립선언서는 민족항일운동의 당위성을 확인시키는 결과물임을 자처했다. 이처럼 한국민족운동의 지향점은 독립선언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독립선언서는 3.1운동을 확산시키는 도화선 역할을 했는데, 1918년 11월 만주와 노령등지의 독립운동가가 발표했던 ‘무오독립선언서’와 1919년 2월 8일 동경유학생들이 발표했던 ‘2.8 독립선언서’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1919년 4월 8일 무렵에 배포됐던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그 존재만으로도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미국 및 노령지역에서 결성된 부인회 8명(김인종, 김숙경, 김오경, 고순경, 김숙원, 최영자, 박봉희, 이정숙)의 연서로 공식적인 한국여성의 행보를 알렸던 선언서이다. ‘슬프고 억울하다, 우리 대한동포이시여…’로 시작되는 선언서의 문구처럼 ‘대한민족 부인동포의 대 정신 대 자각을 성명하는 선언’임을 강조하고 일본침략의 부당성과 합방성립의 불합리성, 여성의 적극적 행보 필요, 국가 위기 속 여성의 역할, 동포분발 등을 호소했다. 특히 국한문혼용체가 아닌 순 한글표기로 돼 여성 항일의식의 확산과 여성항일단체결성을 이끌어내는 정신적 근간이 됐다.

시대의 순응보다 저항과 변혁의 중심에 서고자 했던 한국여성의 행보가 ‘대한독립여자선언서’에서 싹을 틔웠다. 그리고 틔워졌던 그 싹은 오늘날 주체적이고 진취적인 역할을 자처하는 한국여성상의 부각으로 이어졌다.

‘민족독립’을 위해 시대의 장벽을 넘어섰던 한국여성의 저항정신, 도전의식, 위기극복정신을 담고 있었던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단순한 역사 기록물의 의미를 넘어서서 나라사랑을 실천했던 한국여성의 정신적 요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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