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내 몸뚱이는 샘골과 조선을 위해 생긴 것이다” “너희는 우리나라의 보배다.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면 큰 일군이 된다”라고 피폐해져 가는 농촌에 민족의식과 계몽의 필요성을 외쳤던 여성독립운동가! 그녀는 심훈 <상록수>의 실제 모델이자 농촌계몽운동에 서슴지 않고 뛰어들었던 독립운동가 ‘최용신’이다.

3.1운동 이후 1920년대는 농민운동, 노동운동이 활발해지고 야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지식층은 민중 속으로 파고들면서 ‘농촌 계몽 운동’의 주류인 ‘브나로드(Vnarod)’ 운동을 전개했다. 그 흐름과 같이 조선일보사는 1929년 6월에 ‘문명퇴치운동’을 전개하여 125개 학교에서 학생 4917명과 특별반 161명 등 5078명이 참여하는 문자보급운동을 확산시켰다. 이어 동아일보도 1931년 7월에 전국농촌을 상대로 한 문화계몽사업을 전개하여 문맹타파에 일조했다.

물론 조선총독부의 제지로 농촌계몽운동은 일시에 중단되거나 금지조치로 위기를 맞이했지만, 지식인들이 농촌에 불어넣었던 민족정신은 농촌계몽의 의미를 넘어서서 조국광복의 염원을 부가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샘골마을에서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신여성, 최용신(1909년 8월~1935년 1월)은 함경도 출생으로 2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외래문물유입과 선교활동이 활발했던 함경도 지역의 특성은 최용신 일가에 고스란히 전달되어 조부의 교육사업과 부친의 신간회 활동에 이어 최용신의 농촌계몽활동으로 이어졌다. 최용신은 원산소재의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농촌계몽운동을 이끄는 여성지식인으로 과감히 민중 속에 파고들었다.

그 후 경기도 안산 남산평 작은 마을의 암울했던 현실은 농촌여성의 자발적인 계몽 행보로 민족정신 고취와 문명퇴치가 화두로 떠오르게 되었다. 샘골 강습소의 작은 강의실부터 시작된 최용신의 교육은 천곡학원 건축발기인조직과 부인회 기금 확보를 통해서 건물 완공으로 이어졌고, 농촌 지역 소수계층의 배우고자 하는 열망에 불을 지폈다.

‘민족계몽이 곧 민족성장의 동력’이라고 강조했던 여교사 최용신의 외침은 계급과 빈부, 귀천을 뛰어넘는 민족의 힘으로 발산되어 메말랐던 땅을 적시는 단비와 같은 행보로 이어졌다.

민족의 사랑, 문명의 필요성, 국제평화를 외치며 핍박받는 조선이 아름답기를 희구했던 최용신의 외침! 그것은 일제의 탄압과 경제적 어려움, 현실적 한계에 부딪히며 이상적인 농촌모델의 구상에 그치고 말았다. YWCA 농촌지도부 파견교사에서 시작된 지도자의 열의가 농촌계몽운동의 불씨를 일으키며, 민족정신 고취와 자발적인 민중 개혁운동을 꿈꾸는 민족운동가로 거듭났던 최용신의 일생에는 진취적인 민족기상으로 민족개조를 염원했던 독립운동가의 정신이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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