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여자도 배워야 산다! 장옷을 벗고 긴 치마를 잘라 버리고 첩첩이 닫힌 속에서 뛰쳐나오너라!”고 외치던 여성은 신여성의 옷차림에 구두를 신고 있었다. 전통적인 사회통념 속에서 여성은 다소곳해야 한다고 교육해왔건만, 얼굴을 높이 들고 구둣소리를 내며 힘차게 걷는 차미리사의 모습에 장안 시민은 문화충격에 휩싸였다.

당당했던 구둣소리처럼 여성대중교육의 선두에 섰던 차미리사(1879~1955). 그녀는 한성부 서부 공덕리의 차유호(車柳鎬)와 장씨(張氏) 사이에 태어났는데, 손위 5형제가 모두 요절한 뒤 얻는 귀한 자식이었다. 어려서부터 “완전히 독립해 살아갈 생각을 해라”며 자립정신과 독립심을 고취시켰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진취적인 신여성으로 자랐고, 출가한 뒤 행복했던 결혼생활에 젖었지만, 남편이 중병으로 세상을 등지면서 그녀의 평범했던 삶도 마감되고 만다.

그리고 삶에 드리웠던 그늘의 무게를 극복하고자 맺었던 종교와의 인연은 상동교회에서 빛을 발하고, 인간존중과 평등·박애정신에 귀 기울이며 넓은 세상을 갈망하는 여성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23세의 나이에 소개장을 손에 들고 나섰던 중국 유학과 이은 미국 유학길에서 그녀는 힘없는 조국의 모습을 지켜보며 다시금 어깨에 힘을 주었다.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의 것이라고 했던가…. 차미리사가 일생동안 추구했던 독립활동은 전통적 사회통념과 일제강점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민족해방의 길과 여성각성에 대한 고뇌로 가득 차 있었다. 참담한 조국현실을 떠올리며 잠겼던 상념은 조국을 향한 의기(義氣) 있는 여성으로 거듭나게 했고, 재미여성단체인 한국부인회의 창립(1908.5.23.회장)과 3.1운동을 계승하는 조선여자교육회의 창립(1920.2.20.회장)을 통해 조국 앞에 당당히 섰다.

특히 조선여자교육회의 산하에 부인야학강습소와 전국순회강연단이 조직됐을 때, 그녀는 한국여성을 대상으로 한 민족의식 고취와 애국계몽 활동을 이끌며 대중적 여성교육 활동의 선두에 자리했다. 그리고 여성의 각성과 민족해방의 염원을 담아서 근화학원(1923.3.11, 부인야학강습소의 근화학원 변경), 덕성여자실업학교(1938.10.20, 덕성여자실업학교로 교명 변경)를 설립하면서 그녀는 여성교육계에 진중한 무게를 드리웠다. 차미리사는 일제의 억압과 민족말살 정책을 극복하는 조국의 모습에 대해 남성에 의존한 민족독립이 아닌 한국여성이 참여하는 통합된 민족독립이기를 원했다. 즉, 민족해방과 여성평등이 함께 실현되는 모습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 실천의 선두에서 민족주체와 자율의 의미를 전달했던 차미리사. 그녀는 한국여성의 심장 소리가 조국광복에 함께 전달되기를 염원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진정한 여성대중교육의 횃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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