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산 자연휴양림대전관광명소 12선 중 한 곳이국적 자연 경관에 ‘입이 떡’가족 휴양객 많은 ‘힐링명소’지친 도시생활의 완벽한 쉼터[천지일보=유영선 기자]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인 가을. 선선한 날씨 덕에 온가족 혹은 연인들이 나들이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이다.교통의 중심지이자 과학의 메카인 대전광역시 외곽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해 1시간 20분 정도 들어가면 이국적인 자연 경관을 접할 수 있는 곳이 있다.장태산 자연휴양림이 바로 그곳이다. 이곳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메타세쿼이아 숲이 울창하게 형성된 곳으
애국선열묘역 ‘효창공원’‘꽃다운 이름이 후세에 길이 남다’애국지사 7위 영정 안치된 의열사삼의사·임정요인·김구 묘역 있어[천지일보=이혜림 기자] 서울시 용산구 효창동과 청파2동 사이에 시민들이 자주 찾는 효창공원이 있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자연친화적인 이 공원은 많은 나무와 꽃들로 밤낮 구분 없이 일년 내내 시민들이 드나든다.공원을 둘러싸고 있는 평토장한 산책로가 가벼운 산책이나 달리기를 하기 안성맞춤이다. 낮에는 유모차를 끄는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을 찾는다. 여름에는 어린이 물놀이장을 개장해 무더위를 시원하게 이기
누정은 누각과 정자의 합친 말이다. 멀리 넓게 볼 수 있도록 다락구조로 높게 지어진 누각과 경관이 수려하고 사방이 터진 곳에 지어진 정자는 자연 속에서 여러 명이 또는 혼자서 풍류를 즐기며 정신수양을 하던 건축물이다. 옛 선비들은 마음의 여유를 느끼기도 하고, 마음을 다잡기 위해 누정을 찾았다. 이곳에 담긴 선조들의 삶을 알아보자. 학생대표 선언문 낭독 이어 울려퍼진 ‘대한민국 만세’대한제국 때, 황실 음악연주소로 사용되기도 해[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 팔각정’은 3.1운동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수많은 사람
이색 먹거리 가득 ‘통인시장’‘한글창제’ 세종대왕 나신 곳카페로 변신한 이상의 집인왕산 자락길 윤동주문학관[천지일보=이지수, 이민환 기자]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문들레가 되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1938년 5월 꿈 많던 22살의 윤동주(1917~1945)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 후 ‘새로운 길’이라는 시를 쓴다. 즐거움과 기대, 앞으로의 희망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지진 피해현장과 처참한 시신더미학살 피하려는 긴박한 순간영문도 모른 채 억울하게 죽어역사 미화·왜곡시키려는 일본증거사진에도 韓정부 묵묵부답후손으로서 할 마땅한 책무는?천지일보가 9월 1일 창간일을 맞아 93년 전 9월 1일부터 발생했던 관동대지진(간토대지진)과 관련한 미공개사진 5점을 공개한다. 관동대지진 학살사건은 1923년 9월 1일 일본 수도 도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지역에 진도 7.0이상의 강진이 발생한 뒤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정부는 정부에 대한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 ‘우물에 독을
‘대한제국’ ‘3.1만세운동’ 현장본래 ‘경운궁’… 현재 3배 크기고종 물러나며 ‘덕수궁’으로 개칭궁궐 곳곳에 고종의 흔적 느껴져[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빽빽한 도심 숲 사이, 오롯이 서 있는 궁궐 ‘덕수궁(德壽宮)’. 파란만장한 구한말 역사를 견뎌낸 듯 꼿꼿이 자리하고 있었다. 덕수궁의 전통식 전각과 현대식 건물은 마치 아물지 않은 상처마저 감싸 안고 있는 듯했다. 그 날의 아픔을 기억해 달라는 걸까. 궁궐 곳곳은 아련한 느낌으로 가득했다.덕수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됐다. 처음엔 임진왜란 당시 피난 갔다 돌아온
인터뷰 | 윤주경 독립기념관 관장 학생·군인·일반인·외국인 대상 역사교육으로 독립운동 알려독립정신 없었다면 현재 없어자랑스런 역사 깊이 새기길[천지일보=장수경 기자] ‘8.15광복’. 그 날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땠을까.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 우리 역사는 잘 보존되고 있을까. 이를 생각해본다면, 광복절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날이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세워진 독립기념관. 광복절을 맞아 독립기념관의 중요성을 들어봤다. 다음은 윤주경 관장과의 인터뷰.― 이 시대에서 독립기념관
우리나라의 독립은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조국을 생각하는 정신을 통해 이룬 성과다. 나라를 되찾은 지 불과 7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이를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것을 기념하는 광복절을 맞아 가장 대표적인 장소 독립기념관을 찾았다. 1987년 국민 모금운동으로 건립한 독립기념관은 우리 민족의 국난 극복사와 발전사 자료를 모아 보존·관리·전시하는 종합적 학술전시관이다.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조상들이 남긴 자취를 찾아 민족의 얼과 긍지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독립기념관 체험관 가보
우리나라의 독립은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조국을 생각하는 정신을 통해 이룬 성과다. 나라를 되찾은 지 불과 7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이를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것을 기념하는 광복절을 맞아 가장 대표적인 장소 독립기념관을 찾았다. 1987년 국민 모금운동으로 건립한 독립기념관은 우리 민족의 국난 극복사와 발전사 자료를 모아 보존·관리·전시하는 종합적 학술전시관이다.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조상들이 남긴 자취를 찾아 민족의 얼과 긍지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상(上)편에 이어
[천지일보=김예슬 기자]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유관순 열사는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한 여성 독립운동가다.당시 18세의 어린 나이였던 유관순 열사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칠 각오를 하고 “대한독립 만세”를 목 놓아 외쳤다. 결국 그는 아우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우리나라 여성 최초 美학사 학위 취득대학 졸업 후 이화학당 교사로 지내며기혼여성들에게까지 배움 기회 제공‘호랑이 선생님’이라 불릴 정도로 엄격日침략 부당함 알리러 가다가 타계[천지일보=박선혜 기자] “우리가 배우지 못해 캄캄한 게 이 등불 꺼진 것과 같으니 우리에게 밝은 학문의 빛을 열어 주세요.”19세기 후반, 조선에 신문물이 들어오고 유교적 관습에 매여 있던 여성들도 교육을 받을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1886년(고종 23), 조선에 파견된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일행 중의 한 사람인 메리 F. 스크랜튼(Mary F. Scrant
기념관 하나 없이 쓸쓸하게 생가터 표시석만 있어사철나무에 가려지고 각종 쓰레기로 표시석 존재가치 실종용산구 효창동·원효로 소재 2군데 생가터 복원 추진 중[천지일보=김현진 기자] 83년 전 1월 8일 일본인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일왕을 제거하고 조선의 독립 의지를 천명하고자 죽음의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던 이봉창 의사. 일본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신년 관병식(觀兵式)을 마친 후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안타깝게도 실패로 끝난 도쿄의거. 이 의거는 비록 불발에 그쳤지만, 이는 훗날 윤봉길 의사의 의거(1
의거는 실패했으나 잠자고 있던 우리의 독립의지를 드높인 쾌거폭탄 화력만 강했어도 성공… 윤봉길 상하이의거 성공 견인차 역할 “건국훈장 2등급서 1등급 올려야, 생가복원 꼭 필요”“상암 日장교숙소 복원, 문화재라 하는 부끄러운 현실”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 하면 31년 동안 인생 쾌락을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 쾌락을 도(圖)키 위해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을 목적하고 상해로 왔습니다.” “나는 영원 쾌락을 향(享)코저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양인이 희열한 안색을 띄고 사진을 찍읍시다.” 나 역시
아내의 시 을 읊조리며 한한국은 또 한 번 전율을 느꼈다. 아무리 부부는 일심동체라지만 어쩌면 이렇게 작품의 제목과 안성맞춤인 시를 써낸단 말인가? 한한국은 이 시를 지도의 마지막에 위치한 제주도에 담아 그 의미를 더했다.한한국은 그동안 수많은 작품을 그렸지만 이번 이야말로 어쩌면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위대한 걸작이 될 것 같은 예감에 빠졌다. 심지어 이 작품을 완성하기 전까진 죽을 수도 없다는 마음까지 들었다고 한다.“윤 시인, 머리띠 좀 가져다줘요!”7m의 한지를 펼쳐놓고 ‘희망 대한민국
그가 살았던 근처 슬라뱐까 항구에 여름이면 러시아 제국 해군의 대함대가 정박하여 많은 장교들과 그 가족을 위해 유축산업과 야채, 과일 딸기류의 재배와 양봉을 발전시켰다. 상업과 건설 청부업으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연해주 지방에 182개 한인학교를 세워 약 6000명의 학생이 260명의 교사 밑에서 공부하게 되었다.1905년 이른바 ‘보호조약’ 늑결(억지로 맺은 체결)과 이듬해 2월 통감부 설치를 통해 조선에 대한 정치, 외교, 군사, 경제적인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었다. 조선에서 애국지사들이 대거 연해주로 망명해 오자 최재형이 닦아놓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를 껴안다[천지일보=박선혜 기자] 경교장은 우리나라 근현대 시기의 비극을 껴안고 있는 역사적인 장소다. 60여 년간 국민 10명 중 5명이 경교장이 어떠한 곳인지 몰랐다. ‘여관’ 또는 ‘정자’ 등의 이름으로 짐작하고 있었을 뿐이다.경교장은 1938년 광산업을 하던 최창학이 지은 건물이다. 원래는 ‘죽첨장’이었으나 건물주인 최창학이 환국한 김구 선생에게 거처로 제공하면서 김구 선생이 옛 지명을 따라 지은 ‘경교장’으로 불렸다.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제강점기 27년간 중국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해방
“청년의 정신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교육은 국가의 백년대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아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강우규 의사의 행적을 잘 아는 사람은 드물어요. 젊은이들에겐 그 이름마저도 생소할 겁니다. 강 의사는 일제의 문화통치를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선 청년들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자주독립을 꾀할 수 있는 건 교육밖에 없기 때문이죠.” 지난 2009년 강인섭(76) 전 의원이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장으로 선임됐다. 진주 강씨라는 것 외엔 강우규 의사와 이렇다 할 관계는 아니지만
◆오랜 준비, 그 안에 깃든 정신 강 의사의 의거에서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젊은이 같은 혈기로 순간적인 충동에 의해 행동을 개시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준비해 왔다는 점이다. 청년교육에 힘써 왔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이보다도 그가 평소 주장한 ‘동양평화론’을 통해서도 가늠할 수 있다. 10년 전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를 저해한다는 이유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고 밝혔듯이, 강 의사 역시 사이토 총독을 죽이려 했던 이유도 동양평화론에 바탕을 뒀기 때문이었다. 1920년 4월, 강 의사는 법정 최후진술에서 신임 총
“청년이 바로 서야 조국이 바로 선다 자나 깨나 오직 청년교육… 철저한 준비에 의한 의거 애국충정의 마음이 느껴지는 3월이 다가왔다. 93년 전 3월의 초하루, 전국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진 만세의 함성이 아직도 우리들 귓가에 맴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던 이들. 그들의 생명과 맞바꾼 광복이라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았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염원하던 애국지사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봄으로써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목적을 아는 것이다. 흔히
국군묘지서 국립묘지령으로 명명 50년간 자연생태 그대로 보존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한강과 과천 사이에 자리 잡은 국립서울현충원(현충원)은 관악산 공작봉 기슭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는 북한 인민군의 도발로 나라가 위협을 받을 때 공비토벌작전 등을 펼치며 국토방위의 임무를 수행하다 전사한 장병들의 묘지와 각 지방 전선에서 전몰된 영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현충원이 위치한 공작봉의 산세를 보면 하나의 산봉우리와 한 줄기의 물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 명당으로 꼽히는 공작봉은 또한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