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자宮] ⑤구한말 역사 견디고 꿋꿋이 선 ‘덕수궁’
[가보자宮] ⑤구한말 역사 견디고 꿋꿋이 선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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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절인 15일 오후 서울 중구 덕수궁. 한 할머니가 덕수궁 중화문에 앉아 있다.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 사건이 떠올랐는지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대한제국’ ‘3.1만세운동’ 현장

본래 ‘경운궁’… 현재 3배 크기
고종 물러나며 ‘덕수궁’으로 개칭
궁궐 곳곳에 고종의 흔적 느껴져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빽빽한 도심 숲 사이, 오롯이 서 있는 궁궐 ‘덕수궁(德壽宮)’. 파란만장한 구한말 역사를 견뎌낸 듯 꼿꼿이 자리하고 있었다. 덕수궁의 전통식 전각과 현대식 건물은 마치 아물지 않은 상처마저 감싸 안고 있는 듯했다. 그 날의 아픔을 기억해 달라는 걸까. 궁궐 곳곳은 아련한 느낌으로 가득했다.

덕수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됐다. 처음엔 임진왜란 당시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조선 제14대 왕)에 의해서다. 당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전소되는데, 머물 궁궐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로 삼는다. 그리고 ‘경운궁(慶運宮)’이라 부른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건, 조선 말기 러시아공사관에 있던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부터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다. 새로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궁궐은 현재 정동과 시청 앞 광장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로, 현재 궁역의 3배 정도 크기였다.

하지만 고종은 일제의 강압으로 왕위에서 물러난다. 이때부터 경운궁은 ‘덕수궁’이라 불리게 된다. 고종은 승하할 때까지 덕수궁에서 지냈다. 고종 승하 후 덕수궁은 빠르게 해체·축소됐다. 파란만장했던 근대사의 자취를 기억하는 덕수궁, 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 만세운동을 위해 흰옷입은 민중이 모인 대한문. ⓒ천지일보(뉴스천지)

◆대한독립 외친 ‘대한문’

원래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다. 하지만 동쪽에 큰 도로가 생기면서 인화문이 사라지고, 동쪽문인 ‘대안문’이 정문으로 사용됐다. 그리고 ‘대한문(大漢門)’이라 불리운다.

대한문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다. 1919년 3월 1일. 이곳 대한문 앞에도 흰옷 입은 군중들이 모였다. 그리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목 놓아 외쳤다. 그날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말을 쓰고 있을까.

현재 대한문 앞은 외국인 관광객의 셔터 소리로 가득하다. 하지만 여전히 3.1운동의 모습이 남아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마음 모아 함성을 외치는 선조들. 그 함성이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 덕수궁 법전인 중화전 ⓒ천지일보(뉴스천지)

◆덕수궁 법전 ‘중화전’

덕수궁의 법전인 ‘중화전(中和殿)’은 1902년 중층으로 지어진다. 하지만 1904년 함녕전에서 대화재가 일어나 현재 중화전을 포함해 덕수궁 영역이 시커먼 잿더미로 변한다. 그 후 1906년 중화전은 재건됐다. 하지만 옛 모습을 잃은 단층 팔각지붕 모습이었다.

원래 법전은 ‘정(政)’자 돌림이다. 그래서 경복궁은 근정전, 창덕궁은 인정전, 창경궁은 명정전, 경희궁은 숭정전이라 불렀다. 하지만 경운궁은 ‘정’자 돌림이 아니다. 이는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사용한 궁궐이기 때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화전 주위에는 ‘회랑’이라는 벽이 둘려 있었다. 하지만 현재 중화전은 사방이 ‘뻥’ 뚫려 있다. 고종이 승하한 후 일제가 대부분의 건물을 헐었기 때문. 사지가 절단된 듯한 중화전은, 얼마나 힘든 세월을 견뎌냈는지를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 덕혜옹주를 위한 왕실유치원 준명당. ⓒ천지일보(뉴스천지)

◆덕혜옹주 위한 왕실유치원 ‘준명당’

“태왕 전하, 감사하옵니다.”

5살 된 어여쁜 덕혜옹주. 고종은 환갑에 낳은 덕혜옹주 덕에 시름을 잊고 살 정도였다. 그런 덕혜옹주를 위해 왕실유치원인 준명당을 지어준다. 원래 이곳은 고종의 옛 침전이었다. 덕혜옹주는 쓸쓸한 말년을 보내는 고종에게 한 줄기의 삶의 낙이었다. 또 덕혜옹주는 왕실뿐 아니라 국민의 새로운 희망이었다.

그런 덕혜옹주를 지키려 했지만, 1919년 고종은 갑자기 승하하고 만다. 그리고 어린 덕혜옹주는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땅에 강제로 보내졌다. 일본 사람과도 결혼하게 된다.

38년 만에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그는 어린 시절의 모습이 아니었다. 정신분열증세로 사람조차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비운의 황녀로 남은 덕혜옹주. 그런 덕혜옹주의 웃음 가득했던 어린 시절을 기억해 주듯 준명당은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 고종이 커피를 마신 덕수궁 정관헌. ⓒ천지일보(뉴스천지)

◆고종 커피향 가득한 ‘정관헌’

흔히 ‘궁궐’하면 나무 기둥에 기와를 얹은 건물을 생각한다. 하지만 정관헌은 서양식 건물로 돼 있다. 대한제국시대에 여러 가지 서양건물이 들어오게 되는 데, 이곳도 서양식으로 지어졌다. 정관헌은 고종이 커피를 마시던 장소로 유명하다.

지금은 텅 비었지만, 사랑하는 가족, 외국 사신과 함께하는 고종의 모습이 저절로 떠오른다.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 커피향 마저 느껴졌다.

▲ 덕수궁 함녕전.ⓒ천지일보(뉴스천지)

◆고종 승하한 ‘함녕전’

함녕전은 고종황제의 침전이다. 그리고 고종은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고종은 평소 식혜를 좋아했는데, 고종이 승하하기 전에도 식혜를 마셨다. 그리고 1919년 1월 21일 그는 눈을 감는다.

고종의 죽음을 두고 ‘독극물에 의한 사망이 아니냐’는 말이 여전히 나오고 있다. 시신이 많이 부어올랐고, 이가 빠지고 혀가 손상됐기 때문. 고종의 독살설은 전국에 빠르게 퍼진다. 그해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재일유학생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건에 울분을 참아왔던 민중들은 3.1독립운동을 일으킨다.

어쩌면 3.1독립운동은 살아생전 평화를 갈망하던 고종이 민중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 아닐까. 비록 눈은 감았지만, 3.1독립운동 속에는 고종의 마음이 녹아 있는 듯하다.

고종과 덕혜옹주의 숨결, 그리고 대한독립을 외치던 평화의 손길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까. ‘이 시대는 정말 평화의 세상이 왔는가’ ‘나는 평화를 이루는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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