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민족의 디아스포라와 최재형의 삶 (下)
[칼럼] 한민족의 디아스포라와 최재형의 삶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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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대한민국역사문화원 이정은 원장

그가 살았던 근처 슬라뱐까 항구에 여름이면 러시아 제국 해군의 대함대가 정박하여 많은 장교들과 그 가족을 위해 유축산업과 야채, 과일 딸기류의 재배와 양봉을 발전시켰다. 상업과 건설 청부업으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연해주 지방에 182개 한인학교를 세워 약 6000명의 학생이 260명의 교사 밑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1905년 이른바 ‘보호조약’ 늑결(억지로 맺은 체결)과 이듬해 2월 통감부 설치를 통해 조선에 대한 정치, 외교, 군사, 경제적인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었다. 조선에서 애국지사들이 대거 연해주로 망명해 오자 최재형이 닦아놓은 지역사회 기반 위에서 연해주는 국권회복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최재형은 1906년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두만강을 넘어 일본 주둔군을 습격하였다. 1909년에도 의병투쟁에 2만7653명이 참가하여 일본군, 헌병, 경찰과 953번 접전했다.

▲ 최재형

안중근은 이 의병부대의 참모중장이었다. 1910년 7월에는 연해주, 서북간도, 국내의 13도 의군과 통합군단을 조직하여 국내진공을 계획했다. 일제는 러시아의 손을 빌려서 최재형을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처단도 최재형과 밀접한 관련하에서 이루어졌다.

거사계획과 실행 준비, 사격연습이 최재형의 입회하에 이루어졌다.

최재형은 1909년 1월 재정문제로 폐간의 위기에 몰린 ‘대동공보’의 사장에 취임하여 신문을 발간하였으며, 이 신문이 폐간되자 ‘대양보’ 발간을 추진하고 사장이 되었다. 이 신문은
1911년 권업회가 발기되자 권업회의 기관지로 발전하였다. 최재형은 동포사회 중심 조직인 권업회 총재도 역임했다.

1914년 노령 한인 이주 50주년과 러일 전쟁 발발 10주년을 맞아 대한광복군 정부를 조직하는 한편 재러 한인 50주년 기념대회를 준비하며 재러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군자금을 모집했는데, 그 회장이 최재형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극동지역은 혁명파인 적위파와 반혁명 백위파의 내전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었다. 이듬해 2월 미국 영국 등 16개국이 러시아 혁명의 극동파급을 막기 위해 국제간섭군을 파견하였다.

이때 일본은 그중 가장 많은 7만 3000명을 파견하여 바이칼 호수 이동의 전 시베리아 지역을 장악하려 했다. 일본의 시베리아 점령은 1922년까지 4년이나 계속되었다. 최재형은 반일 파르티잔 투쟁의 지도자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연해주 지방에서도 대한국민 의회가 조직되고 무장독립운동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 초기 연해주 한인들의 모습을 그린 당시 삽화. 노동과 연안 어업 등에 종사했다.

이와 같이 최재형은 연해주 반일독립운동의 최고 중심인물이었던 까닭에 그를 제거하고자 일본 군대가 1920년 4월 4일 니콜리스크시에서 열린 연해주 및 연흑룡강 지방 노동자대회를 습격하였다.최재형은 피신했다가 저녁에 돌연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놀란 가족들에게 최재형은 말했다.

“내가 피신하고 있는 동안 가족들을 괴롭힐 것이다. 나는 살 만큼 살았다. 너희들은 살아야 한다.” 그는 다음날 아침 일본군에 붙들려가 총살되었다.

최재형은 그를 구박했던 형수의 가족, 개척지 한인 공동체, 천대 이외에 약속할 것이 없었던 조국을 위해 가장 훌륭한 봉사를 했으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가족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놓았다.

한인 디아스포라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최재형의 삶은 그 자체가 조국과 현지사회 양면에서 훌륭한 삶의 모델이 되기에 충분했다.

▲ 최재형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우수리스크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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