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 바로 서야 조국이 바로 선다
자나 깨나 오직 청년교육… 철저한 준비에 의한 의거
 

 

애국충정의 마음이 느껴지는 3월이 다가왔다. 93년 전 3월의 초하루, 전국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진 만세의 함성이 아직도 우리들 귓가에 맴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던 이들. 그들의 생명과 맞바꾼 광복이라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았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염원하던 애국지사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봄으로써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목적을 아는 것이다. 흔히 독립운동가라 하면 안중근 윤봉길 김구 김좌진 등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들 외에도 똑같이 조국을 위해 피를 흘려가며 목숨을 바친 많은 선진들이 있었다. 비록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아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지는 못했지만, 오늘의 역사를 만들어낸 이들. 그들의 피와 땀 역시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희생과 수고였다는 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에 본지는 왈우 강우규(1855~1920) 선생을 시작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던 투사들과 독립운동의 흔적에 대해 조명해 나가고자 한다.

 

▲ 서울역광장에 서 있는 강우규 동상 ⓒ천지일보(뉴스천지)

서울역 광장에 외로이 서있는 동상

서울역 광장 한복판에 동상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다. 한 손엔 폭탄을 든 채 비장함이 가득한 표정이 마치 당장이라도 행동을 취할 기세다. 아래 한켠에는 ‘왈우 강우규 의사’란 이름과 함께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어찌 감회가 없으리오(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壹無感想)’란 의미심장한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그 아래는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강우규 의사가 순국 직전에 남긴 유시’란 짤막한 글귀로 마무리돼 있다.

근처를 지나가는 행인들을 잠시 붙잡고 ‘강우규’에 대해 아느냐고 물어봐도 고개를 갸우뚱 할뿐 제대로 아는 이가 거의 없다. 그나마 그동안 지나다니면서 봤다며 그를 알아보는 몇 사람이 띄엄띄엄 보일뿐 그의 행적 혹은 업적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독립운동가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게 전부였다.

그럼 동상의 주인공인 왈우(曰遇) 강우규 의사는 어떤 인물이기에 서울역 한복판에 이렇게 자리하고 있는 걸까.

◆신임총독 암살기도 현장 남대문역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수천 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제3대 신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맞이하기 위해 모여든 것이다. 수천 군중은 아이러니하게도 대다수가 조선인이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사이토의 환영 행렬에 참석해야 했던 것이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발발해 애국운동이 고취된 상황에서 힘을 모아도 모자를 판에 억지로 웃으며 적의 수장을 맞이해야 하는 기막힌 상황이다.

누구 하나 대항하기 위해 나서는 사람 없어 그저 속으로 분통만 터트리고 있을 즈음, 갑자기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이토가 열렬히 환영을 받으며 서울 땅을 밟은 뒤 마지막으로 마차에 올라타려는 순간 누군가 참다못해 울분을 터뜨리듯 폭탄이 던져진 것이다. 순식간에 축제와 같았던 신임총독 환영 행사는 아수라장이 됐고, 군중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쉽게도 폭탄은 사이토를 비껴갔다. 외려 사이토 총독 주변에 있던 수행원, 일본경찰, 신문기자 등 37명이 다치거나 죽었을 뿐 총독에게는 가벼운 상처만 남겼다.

◆노년의 나이로 의거, 강우규 의사

이같이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한 채 적의 수장을 꼭두각시처럼 맞이해야 하는 억울한 상황에서 모두의 심정을 대신해 폭탄을 던진 이는 누구였을까. 현장에 있었던 조선인 모두의 가슴이 뻥 뚫리듯 통쾌하게 만든 동시에 서울 땅을 막 밟은 신임총독의 간담을 싸늘하게 한 인물은 혈기왕성한 젊은 독립투사가 아닌 65세의 노인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은 다음날 조선과 일본 양국 언론에 대서특필됐지만 범인이 누군지는 몰랐다. 이후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 듯 했으나, 발생한 지 한 달이 한참 지나 10월 7일자 매일신보에 경찰이 범인을 체포했다는 기사가 게재되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됐다.

그 주인공은 강우규 의사였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강 의사를 조선 물정을 모르는 우매한 늙은이로 보도해 마치 테러분자인 양 여론을 몰고 갔다. 진실이야 어찌됐든 간에 그래도 폭탄을 던진 이가 젊은 청년이 아닌 예순을 넘긴 노인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사건은 모두에게 충격과 놀라움을 던져준 사건이었다.

 

▲ 매일신보 1919년 9월 4일자에 ‘새 총독에게 폭탄을 투하’라는 제목으로 실린 기사(왼쪽)와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오른쪽). ⓒ천지일보(뉴스천지)

◆앞날을 내다보고 청년교육에 힘써

결국 강우규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강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고, 이후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에 의해 지난 2011년 9월 2일 동상이 되어 정확히 92년 만에 의거현장을 다시 찾았다. 2008년 6월부터 모금활동을 벌여 3년 여 만에 동상 건립의 뜻을 이룬 것이다.

강 의사는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학자들 사이에선 꽤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는 학계에서 안중근, 윤봉길 의사와 함께 3대 의사로 꼽힌다.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을 보고 선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3대 의사란 말이 무색하게 그는 누구에게나 쉽게 회자되지 못하고 너무나 조용하다. 기념사업회 강인섭 회장은 “강 의사의 행동 동기라든지 그가 독립운동에 미친 파장은 굉장히 크다. 하지만 결과 중심적으로 알려지다 보니 그런 면에서 덜 알려졌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강 의사가 아무도 하지 못했던 신임총독 암살에 나선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행적에 대해 잠시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일찍이 독립운동의 뜻을 가지고 만주로 떠나 장로교에 입교했고, 한약방을 운영하며 모은 돈으로 학교와 교회를 설립했다.

나라 잃은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그는 무엇보다도 청년교육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조국을 되찾으려면 무엇보다 민족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의 ‘교육’이 선행돼야 한다는 게 그의 한결같은 지론이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함남 영덕리 영명학교, 러시아지역 이만 협성학교, 요하현 신흥동 광동학교, 밋가루시카에 학교를 설립해 청년 교육에 힘썼다.

특히 서울역 의거를 시도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같은 청년교육을 위해서였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그동안 가르친 교육을 실천함으로써 살아있는 교육자의 본이 되고자 의거를 택했던 것.

이는 그의 유지((遺志)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내가 이번에 죽으면 내가 살아서 돌아다니면서 가르치는 것보다 나 죽는 것이 조선청년의 가슴에 적게나마 무슨 이상한 느낌을 줄 것 같으면 그 느낌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라고 말해 의거로써 청년들의 마음에 애국심을 강하게 심어주고자 나섰던 것임을 엿볼 수 있다. 또 그가 어떠한 사상과 정신으로 독립운동을 해왔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강 의사의 삶은 오늘날 우리 교육계 현실과 대비된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학교폭력의 근본 원인은 아이들이 아닌 학부모와 교사, 즉 기성세대의 무관심 때문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맞벌이 부부가 늘면서 직장으로 떠나는 부모는 자녀를 제대로 돌보기 어려워 무방비 상태로 학교에만 맡긴 채 내버려두기 십상이다.

또한 교사 임용은 성적으로 당락이 결정되다보니 대학에선 인성을 가르치기보다는 임용고시 위주의 교육을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결국 우리 아이들을 보듬고 이끌어줄 어른이 거의 없다.

그렇기에 강우규 의사가 보여준 정신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청년들에게 오로지 대의가 무엇인지 심어주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려 산 교육자의 모습을 보여준 어른. 그가 바로 모두를 대신해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져 애국심을 일깨워준 강우규 의사였다.
 

 

▲ 서울역광장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강우규 동상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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