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난민 대혼란 속 열차탑승현장. 조선인 학살 소식이 알려지자 이를 피하기 위해 급히 열차라도 타고 빠져나가려는 인파들의 모습. 죽음을 피하기 위한 긴박한 순간임을 직감할 수 있는 사진 (제공: 정성길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지진 피해현장과 처참한 시신더미
학살 피하려는 긴박한 순간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하게 죽어

역사 미화·왜곡시키려는 일본
증거사진에도 韓정부 묵묵부답
후손으로서 할 마땅한 책무는?

천지일보가 9월 1일 창간일을 맞아 93년 전 9월 1일부터 발생했던 관동대지진(간토대지진)과 관련한 미공개사진 5점을 공개한다. 관동대지진 학살사건은 1923년 9월 1일 일본 수도 도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지역에 진도 7.0이상의 강진이 발생한 뒤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정부는 정부에 대한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 ‘우물에 독을 뿌렸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트려 무려 6000여명(독립신문 발표)에서 많게는 2만명 이상(외국인 증언)의 한민족을 대학살한 사건이다.

일본은 계속해서 정부 차원에서 이 같은 역사적 사건을 자국 교과서 내용에서 수정·삭제 등으로 덮어가려고 하는데, 정작 국내에서는 어떠한 정부차원의 규명작업이 없어 잊어져 가고만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더구나 우리는 국사 교과서에조차 언급이 안 되고 있다.

나라 잃고 노예처럼 살다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타국 땅에서 억울하게 처참하게 죽어야만 했던 우리 선조들. 그 후손으로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책무가 무엇인지를 재차 상기하고자 사진을 공개하게 됐다.

 

▲ 철도 역구내 지진충격의 흔적. 좌우 반동에 의한 지진충격으로 피해가 더 컸다. (제공: 정성길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 열차 선로가 탈선된 모습 (제공: 정성길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 대기역 부근 열차가 전복된 모습 (제공: 정성길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 자경단, 경찰, 군인, 불령단에 의해 집단 살해돼 시신더미로 쌓여 있는 처참한 현장 (제공: 정성길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이번에 공개되는 사진은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으로부터 입수했다. 정 관장은 전 세계를 40여년간 돌아다니며 약 7만장의 근현대사 기록사진을 모았고, 그중 관동대지진 사건과 관련한 사진은 700~800장을 찾아냈다.

이번에 공개되는 사진을 통해 관동대지진의 위력이 당시 어느 정도인지를 알게 하며, 또한 그 지진으로 인한 아비규환의 현장을 느낄 수 있는 사진이다. 특히 학살이 진행된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열차를 타고 빠져나가기 위해 탑승하려는 피난민으로 인해 대혼란을 겪고 있는 역내 모습의 사진은 긴박함과 긴장감까지 돌게 한다.

본지가 앞서 공개했던 사진 중에는 무동력의 배를 이용해서라도 바다로 탈출하려는 조선인이 무더기로 잡혀 배안에 갇혀 있고, 결국 학살당해 해안가에 시체로 버려진 사진도 있었다.

철도와 관련된 사진은 일본 철도국이 관동대지진으로 인한 철도 피해를 조사하기 위해 카메라로 찍어서 도록으로 만들었고, 여기에 실린 사진이다. 이 도록은 당시 주일 영국공사관에 근무했던 영국인의 후손으로부터 정 관장이 입수했다.

일본인은 학살과 관련이 없는 사진들로 자료를 남겼고, 학살된 사진은 당시 대사관에 근무했던 외국인이나 외국여행가들에 의해 찍힌 사진들이다. 후쿠소 철도 회사는 조선인 노동자 500여명을 고용했는데, 학살이 진행되자 57명 근로자들이 경찰서로 피신했으나, 자경단에게 모두 살해됐다는 기록도 있다.

정 관장은 ‘관동대지진 사건이 왜 일어났을까’라는 의구심을 갖고 40년간 사진과 문서 등의 입수한 자료를 정리했다. 그에 따르면 일본인에게는 한민족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다. 일본인에게는 추앙받지만 한민족에게는 침략의 원흉이고 분노의 대상인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사살됐다. 1919년부터 한반도 전국적으로 일어난 3.1만세운동에 이어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대첩으로 인해 일본군이 독립군에게 크게 패해 조선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때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관동대지진은 큰 진도의 강진인 데다 상하가 아닌 좌우 반동에 의한 지진으로 피해가 훨씬 컸다. 대부분 주요도시 전체가 마비될 정도였기 때문에 민심은 그야말로 흉흉해졌다.이 같은 상황에서 끈기와 단합 등이 우월한 조선인의 민족성을 잘 알고 있었던 일본은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민심까지 흉흉한 데다 내심 조선의 독립운동이 일어나진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이에 일본 집권층은 자신들을 향해 불만을 갖고 있는 민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동시에 그간 독립운동에 당한 좋지 않은 감정을 이용해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언론에 거짓으로 흘려 일본 민심을 자극시키게 했고, 무전을 이용해 유언비어를 유포시켰다.

명확한 사실이 아님에도 일본인들은 유언비어만 믿고 조선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가득해져 결국 전국적으로 자경단을 구성해 경찰, 군인과 함께 조선인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특히 청년들 위주로 구성된 불령단은 계엄사령관이 직접 지시하고 관헌의 지원으로 움직여 조선인 학살에 동참했다.

대학살은 9월 3일부터 8일 정도까지 이어졌고, 발음이 부정확한 일본인도 살해되는 등 자경단의 만행이 도를 넘어서자 그제야 치안유지를 위해 계엄령을 선포해 사건을 종결시켰다. 그러나 무전 등으로만 전달됐기 때문에 지시를 늦게 전달받은 지역에서는 계엄령 선포 후에도 열흘간 학살이 이어졌다고 한다.

사건이 종결될 때까지 일본정부는 언론을 검열해 이번 사건과 관련된 기사가 나가지 못하게 했고, 종결 후에는 일본 일부 언론들이 이번 사건에 대해 알아봤고, 결국 잘못된 유언비어에 의해 많은 조선인이 무고하게 희생됐다는 사실을 알아내 기사와 사설 등으로 언론에 내보냈다.

이 같은 제대로 된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에서는 교과서에 명백히 일본인이 조선인을 학살했다는 내용을 기술했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일본은 학살이라는 표현을 ‘살해’라고 수정한 데 이어 ‘희생’이라고 변경하더니 급기야 2013년 초에는 교과서에서 내용을 삭제하는 등 자신의 선조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미화 혹은 왜곡시켜왔다.

이에 맞서 우리나라는 2014년 4월 유기홍 전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국회에서 103명의 여야 의원이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발의했으나 현재는 어떠한 움직임도 찾아볼 수 없다. 많은 증거사진이 공개되고 있는 데다 희생자 명단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지만, 여전히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정 관장은 “일본 군함도에서 강제노역으로 수백 명의 우리 선조가 죽었지만, 그보다 더 잔혹하게 많이 죽은 것이 관동대지진이다. 이 치욕의 아픈 상처는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정 관장은 현재 억울하게 희생당한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위령탑을 세우기 위해 서명을 받고 실제 일어난 사진으로 입증하고 규명하기 위해 민간차원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는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인권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는 국민의 어떤 권리도 찾아주지 못한다”며 “서명을 통한 국민들의 동의로 위령탑을 세우는 것이 후손으로서 의무라고 생각해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