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열사 앞에 작은 태극기들이 걸려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애국선열묘역 ‘효창공원’
‘꽃다운 이름이 후세에 길이 남다’
애국지사 7위 영정 안치된 의열사
삼의사·임정요인·김구 묘역 있어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서울시 용산구 효창동과 청파2동 사이에 시민들이 자주 찾는 효창공원이 있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자연친화적인 이 공원은 많은 나무와 꽃들로 밤낮 구분 없이 일년 내내 시민들이 드나든다.

공원을 둘러싸고 있는 평토장한 산책로가 가벼운 산책이나 달리기를 하기 안성맞춤이다. 낮에는 유모차를 끄는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을 찾는다. 여름에는 어린이 물놀이장을 개장해 무더위를 시원하게 이기려는 아이들로 붐빈다. 밤이 되면 효창공원은 바둑을 두는 어르신들과 운동하는 시민들로 가득하다.

▲ 서울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의 작은 연못의 모습. 효창공원은 도심 한가운데 넓게 자리한 자연친화적인 공원으로 나무와 꽃이 가득하고 산책로와 운동기구 등이 잘 갖춰져 있어 일년 내내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시민공원일 뿐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이기도 하다. 근처에는 백범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제공: 용산구) ⓒ천지일보(뉴스천지)

공원 곳곳 나무 아래엔 벤치가 있어 행인들의 훌륭한 쉼터가 된다. 최근 생긴 하트모양 그네는 아이들은 물론 커플과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놀이터가 된다. 또한 사계절에 따라 나뭇잎 색이 바뀌며,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다. 자연학습장에선 다양한 곤충과 식물을 접할 수 있다. 하지만 효창공원은 단순히 산책하기 좋은 공원이 아니다. 그렇다면 효창공원은 어떤 곳일까.

효창공원은 과거 효창원(孝昌園)으로 불렸다. 묘역이 넓고 송림이 울창했던 효창원은 조선 22대 왕 정조의 장자로 세자책봉까지 받았으나 5세의 어린 나이로 죽은 문효세자의 무덤이 있던 곳이다. 처음에는 효창묘라 불렀으나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묘, 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와 그의 딸 영온옹주의 묘 등 왕가의 묘를 몇 기 더 모시고 1870년(고종7년) 효창원으로 승격됐다.

▲ 광복 70주년 기념광장 내에 있는 태극기 조형물. 조형물에는 독립운동에 쓰였던 태극기가 함께 전시돼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그러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빌미로 일본군이 불법적으로 이곳에 주둔하면서 한동안 효창원의 흑역사가 시작된다. 1924년 일제강점기, 일제는 효창원 일부를 공원용지로 책정해 일반인의 유람지로 사용한다. 1940년 효창원은 정식 공원으로 지정되고, 1945년 3월 일제는 이곳 묘들을 강제로 서삼릉(西三陵, 고양시)으로 이장했다.

이런 비운의 사적지를 애국선열 묘역으로 바꿔 놓은 장본인이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이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효창공원은 이때 조성된 것이다.

▲ 애국지사 7위의 영정이 봉안된 의열사. ⓒ천지일보(뉴스천지)

정문으로 공원에 들어서면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삼의사 묘역과 임정요인 묘역이 있다. 광복 이듬해 김구 선생은 일본 땅에 묻혀 있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삼의사(三義士)의 유해를 이곳에 안치했다. 들어서서 왼쪽에 있는 4개의 묘다. 이름은 삼의사지만 묘의 개수는 네 개다. 하나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다. 현재 유해를 찾지 못해 가묘로 세워져 있지만 유해를 찾게 되면 해당 묘에 안치된다. 묘단 아래에는 ‘꽃다운 이름이 후세에 길이 남다’라는 뜻의 유방백세(遺芳百世)라는 네 글자를 새겨 넣었다.

공원관리사무소 뒤에는 임정요인의 묘역이 있다. 효창공원의 임시정부요인 묘역에는 임시정부에서 일하다 중국 땅에서 순국한 이동녕 임시정부 주석과 임시정부 국무장관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숨진 차리석 국무원 비서장,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역임하고 환국 후 서거한 조성환 군무부장의 묘소가 있다. 김구 선생은 1948년 임시정부 요인의 유해를 이곳에 모셨다.

▲ 일제강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의 유해가 안치된 삼의사 묘역.  ⓒ천지일보(뉴스천지)

삼의사 묘를 등지고 오른쪽으로 걷다보면 의열사가 나온다. 의열사 안에는 애국지사 7위의 영정이 봉안돼 있다. 1989년 6월 사적 제330호로 지정됐다. 영정을 보니 오늘날 한국이 건립되기까지 희생한 순국선열들을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다. 의열사는 평소 관리를 위해 개방하지 않았으나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지난해부터 상시 개방되고 있다.

▲ 안중근 의사의 가묘. 안 의사의 유해를 찾게 되면 이곳에 안치될 예정이다.(제공: 용산구) ⓒ천지일보(뉴스천지)

의열사 옆으로 올라가면 커다란 묘 하나가 보인다. 바로 김구 선생의 묘다. 살아생전 자신도 죽으면 이곳에 묻히길 원했던 김구 선생은 우익 테러에 의해 살해돼 1949년 7월 5일 효창공원에 묻혔다. 이후 이 일대가 독립운동에 앞장선 선열들의 묘역으로 자리 잡게 됐으며, 2000년에는 묘역 아래 백범기념관이 건립됐다.

 

◆효창공원 묘역에 묻힌 독립운동가(정리: 지승연 기자)

 

*거사는 실패했지만 조선의 위용 알린 이봉창
이봉창(1901~1932) 의사는 1931년 중국 상해로 건너가 김구 선생과 함께 일본 국왕 폭살 계획을 세웠다. 이봉창 의사는 이듬해인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히로히토 일왕 마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맞히지 못하고 현장에서 체포됐다. 같은 해 10월 교토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32세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거사는 비록 실패했지만, 그 내용이 중국 국민당 기관지 ‘국민일보’ 등 중국 신문에 대서특필 되면서 중국과 일본에 조선의 위용을 알리게 됐다.

 

 

 

*망국 설움 안고 조국광복에 청춘 바친 윤봉길
윤봉길(1908~1932) 의사는 12살이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덕산 보통학교를 자퇴하고 농촌 계몽운동에 전력했다. 그는 1930년 한인애국단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대열에 나섰다. 1932년 4월 29일 일왕 생일을 기념하는 천장절 행사와 전승기념식이 열린 중국 상해 훙커우 공원에 도시락·물통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 요인들을 폭살했다. 거사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같은 해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25살의 나이로 순국했다.

 

 

 

*적극적 항일 행보 보인 백정기

백정기(1896~1934) 의사는 이봉창·윤봉길 의사와 함께 ‘3의사’로 꼽힌다. 1919년 3.1운동 후 중국 상해로 가 무정부주의자 연맹에 가입, 노동자 운동과 일본상품 배격 운동을 지도하고 친일파 숙청 등을 목표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33년 3월 17일 중국 상해 음식점 육삼정에서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와 중국 국민당 정부 내 친일 거목이 회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들을 처단하려 했으나 거사 대기 중에 일본 경찰에 발각돼 체포됐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34년 6월 5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군인의 기개 보여준 조성환
조성환(1875~1948)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군부장이다. 1900년 26세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해 부패한 군부를 개혁하고자 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항일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해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1912년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 만주사찰 때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옥고를 치렀다. 1918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군무차장에 임명됐다. 그는 청산리·봉오동 전투 등 무장 독립투쟁을 전개했고 광복군을 창설했다. 1945년 조국으로 돌아와 대한독립촉성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48년 서거했다.

 

 

*교육활동 통한 항일구국운동 중시한 이동녕
이동녕(1869~1940)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초대의장이자 수석이다. 28세에 독립협회에 가담 후, 언론·계몽운동, YMCA 운동과 을사늑약 반대운동 등을 전개했다. 1906년 만주 북간도에 가 한국 동포와 2세의 민족 교육을 위해 서전의숙을 설립하고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했다. 1907년 귀국해 신민회를 조직했고 언론·교육활동을 통한 항일구국운동에도 나섰다. 그는 3.1운동 후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국무위원, 주석 등을 역임했다. 김구 선생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이면에는 이동녕의 지원이 있어 가능했다”라고 평했다.

 

 

*임정기관지 독립신문 통해 구국운동한 차리석
차리석(1881~1945) 선생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이다. 평양의 명문 숭실중학교의 첫 졸업생으로 대성학교 교사가 됐다. 그는 신민회 평양지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중 이동녕과 처음 만났고 훗날 임시정부에서 함께 조국 독립을 위한 활동을 하게 됐다. 그는 3.1운동 때 만세시위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중국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창간에 참여했다. 차리석 선생은 독립신문의 기자이자 편집국장으로서 활약했다. 그는 임시정부가 존폐위기에 처했을 때 대동단결을 외쳤고 1935년 비서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조국 자주독립 위해 일평생 바친 김구

 

김구(1876~1949) 선생은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가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군 장교 스치다를 의살했다. 그는 신민회에 가입하고 애국계몽 운동을 펼쳤다. 1919년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으로 임명됐고 주요 요직을 거쳐 주석에 올라 이봉창·윤봉길 의사 등 여러 한인애국단 단원들과 함께 거사를 논의·주도했다. 1945년 해방 후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미·소의 한국 분할정책에 맞섰고 남북의 단독정부 수립이 민족분열을 일으킬 것을 예견, 남북협상에 앞장서다 암살자에 의해 1949년 숨을 거뒀다.

 

 

*나라 위해 걱정하고 마음 애태운 안중근
안중근(1879~1910) 의사는 구한말의 교육자이자 의병자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상해로 갔다가 국내에서 교육을 통한 독립사상 고취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1905년 귀국했다. 1906년 진남포에서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남포의 돈의학교를 인수해 학교 경영에 전념했다. 1907년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면서 항일운동을 시작했고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중국 하얼빈역에 잠입해 일본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1910년 3월 26일 만주 뤼순감옥 형장에서 순국한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많은 유필을 남겼으며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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