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범기념관 입구 부근에 자리하고 있는 이봉창 의사 동상 ⓒ천지일보(뉴스천지)

기념관 하나 없이 쓸쓸하게 생가터 표시석만 있어
사철나무에 가려지고 각종 쓰레기로 표시석 존재가치 실종
용산구 효창동·원효로 소재 2군데 생가터 복원 추진 중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83년 전 1월 8일 일본인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일왕을 제거하고 조선의 독립 의지를 천명하고자 죽음의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던 이봉창 의사. 일본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신년 관병식(觀兵式)을 마친 후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안타깝게도 실패로 끝난 도쿄의거.

이 의거는 비록 불발에 그쳤지만, 이는 훗날 윤봉길 의사의 의거(1932. 4. 29) 등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의 활발한 항일 독립투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잠자던 우리의 독립의지와 정신을 일깨웠다는 점에서 절반은 성공한 의거였던 것이다.

다만 이봉창 의사 일가족과 친인척들의 희생이 너무나 컸다. 일왕을 건드렸다는 것만으로 이 의사는 일제에겐 최고의 대역죄인이 됐고, 가족과 친가들까지 같은 죄를 뒤집어쓰면서 숨어 살아야만 했다.

2015년 1월 8일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이봉창 의사 의거 83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일왕 살해는 고사하고 눈에 보이는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해 이 의사의 의거가 저평가돼왔던 탓에 다른 독립운동가 기념사업에 비해 활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아직 기념관 하나 제대로 없고 너무나 초라하다. 그나마 곳곳에서 의식을 가진 이들이 나서면서 기념사업이 몇 년 전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 시발점이 된 것은 다름 아닌 윤봉길 의사의 집안에서 발 벗고 나서면서부터였다.

▲ 8일 서울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 대회의실에서 이봉창 의사의 도쿄의거 83주년 기념식이 진행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기념사업회 발족, 우여곡절 과정
이봉창 의사는 거사 전까지 미혼이었기 때문에 자식이 없었다. 더구나 일제로부터 일왕에게 대들었다는 명목으로 최고의 대역죄인으로 분류돼 일가족은 물론 친인척까지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 외 사람들도 함부로 관계를 가져선 안됐다.

그러다보니 이봉창 의사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도 있는 데다 다른 독립운동가에 비해 활약이 묻혀 1975년까지 어떠한 추모식이나 기념식이 따로 없었다. 1946년 5월 15일 윤봉길, 백정기 의사 유해와 함께 일본에서 발굴, 부산으로 봉안돼 오며 추모제를 지냈고, 그해 7월 6일 해방 후 첫 국민장으로 모셔진 뒤 효창공원에 묻히게 된 게 전부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1965년 설립된 이래 활발한 추모사업을 펼치고 있었던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에서 윤 의사의 친동생인 윤남의 선생과 조카 윤주 매헌기념관장이 주축으로 나선 다. 당시 청년이었던 윤 관장은 심부름을 주로 하며 도왔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낼 탄원서의 초안을 작성했다. 탄원서에는 이봉창 의사의 비석조차 없고, 추모식 없는 현실을 담았다. 윤 관장은 “박 대통령이 탄원서를 받아보고 난리가 났다. 최규하 국무총리를 시켜 44주기를 맞아 첫 추모식을 성대하게 치를 수 있도록 도왔다”고 말했다.

▲ 효창공원 내 이봉창 의사 묘소 ⓒ천지일보(뉴스천지)

이 추모식이 시초가 돼 윤 관장 선친(윤남의)은 남은 찬조금을 이봉창 의사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 입금시키라고 지시해 계속해서 기념사업회 발족을 위한 노력에 발 벗고 나섰다.

윤 관장 선친은 추모사업을 위해 수년간 빈병과 깡통 등의 폐품을 주워 모아 팔았고, 그 돈은 고스란히 이 의사 명의 통장에 입금시킬 정도로 열성이었다. 윤 관장은 “당시는 실명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의사 명의로 통장을 만드는 것이 가능했고, 도장은 선친 이름으로 했다. 이 통장은 아직도 보물처럼 잘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윤 관장의 선친과 김재홍 선생의 꾸준한 선양사업으로 1981년 이봉창기념사업회가 발족됐다. 하지만 이봉창 의사가 거사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애국지사로서는 국민적 관심이 적었기에 윤 관장 선친은 이 의사 자료를 수집해 1992년 위인전기집을 발간한다. 이 의사의 의거를 기리고 널리 알리기 위해 읽기 쉽게 아동용 도서로 출판했다. 이로 인해 언론과 국민들의 관심을 얻었고, 각계각층의 도움을 얻어 1995년 동상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운영의 어려움으로 1997년 기념사업회가 없어졌다가 2001년 다시 부활시키고,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윤 관장과 그의 선친을 중심으로 한 노력이 없었다면 이봉창 의사는 더 관심 밖으로 묻힐 뻔 했던 것이다.

◆쓸쓸하게 표시석만 남아, 관리 소홀

▲ 6호선 효창공원앞역 1번 출구 앞에 이봉창 의사 표시석이 있으나 사철나무와 과일박스로 가려져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현재 이 의사 생가 터에는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고, 생가 주소를 알려주는 표시석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는 채 생가복원이 추진되고 있다. 더욱 비참한 것은 이 의사의 흔적을 나타내는 표시석이 유동인구가 많은 지하철역(효창공원앞역) 입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철나무에 가려지고 각종 쓰레기가 주변에 버려져 대다수의 관심 밖이 됐다. 표시석이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지나치는 이들이 많다. 위대한 의거를 치르고도 이 의사는 이래저래 외면당하고 있는 안타까운 처지인 셈이다.

이종래 이봉창의사생가복원추진위원회 회장은 “사철나무를 뽑아버려야 표시석이 잘 보이고, 이어 울타리를 쳐야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 용산구에 수차례 제안했으나 시정이 되지 않았다. 조만간 문화체육과를 방문해 다시 강력하게 건의할 예정”이라 말했다.

김동영 부회장 역시 “살신성인해서 나라와 민족의 자긍심을 높인 분인데, 어찌 이다지도 푸대접을 하는지 부끄러운 일”이라며 제대로 된 관리가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용산구에는 이 의사의 생가터가 2군데 있다. 하나는 이 의사가 태어나고 9살까지 자란 곳인 원효로 2가 1번지 생가터다. 주소지 자리에는 현재 건물이 들어서 있고, 그 옆에는 지하철 공사가 한창이다. 이종래 회장은 공사하고 있는 자리에 생가터를 복원하고 공원로로 조성할 계획을 내비쳤다.

▲ 이봉창 의사가 태어나고 9세까지 자랐던 생가터인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 1번지. 현재 이 자리에는 높은 빌딩이 들어서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나머지 한 군데는 9세부터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25세까지 살았던 효창동 118-1번지다. 표시석에 나와 있는 주소이기도 하다. 주소대로 가다보면 근처에 이 의사가 사용했던 공동우물터가 나온다. 1990년까지 식수로 사용했다가 현재는 덮개로 덮어놨다. 이종래 회장은 “보통 주변에 높은 산이 있어야 물줄기가 나와 우물을 파는데, 이 자리에 우물터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며 “이 의사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받은 게 아닐까 싶다”고 신기해했다.

그리고 이곳은 현재 재개발 아파트 구역인데, 여기 부근에도 생가터를 복원 계획 중에 있다.

▲ 이봉창 의사가 9세부터 25세까지 자란 생가터인 서울 용산구 효창동 118-1번지. 근처에 우물터가 보인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간다’면서 혈혈단신으로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재차 건너 도쿄의거를 거행하다 32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 이봉창 의사. 83주기를 보내며 그의 정신을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

▲ 1931년 12월 13일 한인애국단 선서식을 마치고 찍은 이봉창 의사 사진 (사진제공: 이봉창생가복원추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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