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조선왕조(朝鮮王朝) 역대 국왕들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국왕이 영조(英祖)였는데 52년동안 재위(在位)하였으며, 향년(享年) 83세를 일기(一期)로 승하(昇遐)했다. 인열왕후(仁烈王后)가 42세라는 젊은 연령(年齡)에 승하한 사실을 생각하면서 정조(正祖)가 동궁(東宮) 시절 여러차례에 걸친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영조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었기에 결국 왕위를 계승하였듯이 인열왕후가 좀더 오래 살았다면 소현세자(昭顯世子)와 강빈(姜嬪)에게 큰 버팀목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한편 인열왕후가 승하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627(인조 5)년 1월 후금(後金)은 아민이 3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광해군(光海君)이 폐위(廢位)된 것에 대한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한 후금의 주력부대는 용천, 선천을 거쳐 안주성 방면으로 남하했으며 일부 병력은 가도의 모문룡(毛文龍)을 공격하였다.이러한 후금의 침략에 대응하여 조선군(朝鮮軍)은 곽산의 능한산성(凌漢山城)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후금의 주력부대(主力部隊)를 막으려 했지만 실패하였으며 가도의 모문룡도 신미도로 패주(敗走)하게 되었다. 후금의 침략이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조선군의 저항이 없었던 것도 이유였지만, 홍타이지 자신이 조선을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략은 금적금왕(擒敵金王)이었다. 왕만 잡으면 전쟁은 끝이라는 생각에는 그를 따라 참전한 강홍립의 조언도 기여했을 것이다. 병자호란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남한산성의 포위와 광교산의 일전, 강화도에서의 소규모 전투를 제외하고 이렇다할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홍타이지의 금적금왕계가 주효했다는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전국적 규모의 의병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격안관화(隔岸觀火)는 강 건너 언덕에서 남의 집에 불이 난 것을 구경한다는 뜻이다. 싸움판에 직접 뛰어드는 것보다, 바깥에서 관망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바라보면서 기회를 기다리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선택이다. 다른 의미로는 냉정하게 객관적 현상을 분석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역사도 당사자로서의 시각보다 그렇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바다 건너 중국 산동의 깊은 산 속에서 청나라 황실의 후손을 만난 김에 우리 역사의 중요한 장면을 되짚어본다. 파주 봉일천은 청과 조선의 군사적 충돌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윤문거(尹文擧)가 31세가 되는 1636(인조 14)년에 발생한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살펴본다. 거슬러 올라가서 광해군(光海君)이 서인세력에 의하여 1623(인조 1)년 폐위된 이후 불과 4년 만에 전쟁이 발생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이었다. 이와 관련해 정묘호란 당시 청나라는 후금(後金)이라는 국가명(國家名)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본래 후금은 건주 여진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누르하치가 1616(광해 8)년 이러한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세운 나라가 바로 후금이었다. 이러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올해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지 430년이 되는 해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 계속된 전쟁은 한·중·일이 싸운 ‘동아시아판 세계대전’이었다. 조선왕조는 1392년 건국 이래 큰 외침(外侵) 없이 200년간 태평 시대를 누렸다. 그런데 100년간의 전국(戰國)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4월 13일에 조선을 침략했다. 이는 해양세력의 대륙세력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다. 전쟁 초기엔 일본과 조선의 전쟁이었지만, 이윽고 명나라가 참전해 국제전쟁
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1631(인조 9)년 인조(仁祖)가 승지(承旨) 강홍중(姜弘重)을 통하여 이원익(李元翼)의 집이 초가집 두서너 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깊은 감동을 받아서 새로운 집을 하사(下賜)하였다. 그러나 이원익은 극구 사양하였지만 인조의 의지가 강력하다는 사실을 알고 결국 살게 되었다고 하며 바로 이것이 현재 경기 광명시 오리로 347번길 5-6(소화동)에 위치하고 있는 관감당(觀感堂)이다.이원익은 1634(인조 12)년 1월 29일 향년(享年) 88세를 일기(一期)로 90 평생의 생애를 마쳤는데 청렴(淸廉)한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제국의 마지막은 언제나 처량하다. 대원제국을 몰아내고 한족의 정권을 세운 대명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 주유검(朱由檢)은 천계제 주유교(朱由校)의 아우로 권력을 전횡하던 환관 위충현이 옹립했다. 초기에 그는 제법 성실하게 국정을 처리했다. 사서에 따르면 20대에 이미 머리카락이 백발로 변했고, 눈가에는 주름이 생길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다고 한다. 닭이 울면 자리에서 일어나 늦은 밤까지 정무를 처리하며 잠자리에 들지 않았고 노심초사하다가 과로로 병에 걸리기도 했으며, 궁중에서 화려한 잔치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1645년, 청군이 북경을 점령한 이듬해, 섭정왕 도르곤은 명의 멸망이 당연하다고 평가하면서 ‘숭정제는 탓할 수 없지만, 무관은 엉터리 전공으로 상을 받았고, 문관은 탐욕으로 법을 파괴했다. 천하를 잃은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지적했다. 청의 통치자는 숭정제와 그의 조상이 남긴 천하를 빼앗은 것은 정치적으로 장기간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청의 위업은 1618년 무순(撫順)을 공격하면서 시작해, 1680년대 초, 강희제가 삼번(三藩)을 평정하고, 대만의 정(鄭)씨 정권을 무너뜨린 시점에서 정점에 달했다.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만주족은 어떻게 수십 배가 많은 한족을 통치하고 장기간 동아시아의 평화치제를 구축했을까? 북경을 점령한 섭정왕 도르곤은 ‘숭정황제는 탓할 수 없지만, 무관은 엉터리 전공으로 상을 받으려고 했으며, 문관은 탐욕으로 법을 파괴했다. 천하를 잃은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지적했다. 청의 통치자는 숭정제와 그의 조상이 남긴 천하를 빼앗기까지 장기간 정치적 노력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청의 위업은 1644년 이전인 1618년 무순(撫順)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1680년대 초, 강희제가 삼번을 평정하고, 대만의 정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명의 천계 5년(1625), 조야를 뒤흔든 일대 사건이 발생했다. 양련(楊漣), 좌광두(左光斗), 위대중(魏大中), 원화중(袁化中), 주조서(周朝瑞), 고대장(顧大章) 등 ‘6군자’가 뇌물을 받았다는 고발이 접수됐다. 6명은 차례대로 하옥됐다. 양련과 좌광두는 옥사했다. 죽을 때 양련의 몸에는 한 점의 살도 남아 있지 않았으며, 흙을 담은 자루로 시신을 눌러 놓았고, 양쪽 귀에는 못이 박혀 있었다. 그는 피가 묻은 옷을 입은 채로 관 속에 들어갔다. 좌광두의 시신은 썩어서 악취가 진동했으며 벌레가 기어 다녔고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대부분 만주족의 청이 한족의 명을 멸망시켰다고 생각하지만, 명의 숨통은 농민반란을 주도한 이자성(李自成)이 끊었다.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하자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는 매산(煤山)으로 올라가 자살했다. 시원찮은 황제였지만 반란군에게 치욕은 당하지는 않았다. 훗날 청왕조에 반항하던 한족은 그의 죽음을 대단한 것으로 묘사했다. 이자성은 국호를 순(順)로 정하고 칭제했다. 훗날 중국공산당은 이자성을 위대한 농민혁명가로 받들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북경 곳곳에 있던 대신들의 저택에 불을 지르고 창고에서 진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누르하치는 평생 수많은 전투에서 거의 패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원에서 명의 원숭환(袁崇煥)에게 참패했다. 1622년, 누르하치는 명의 요동경략 웅정필(熊廷弼)과 요동순무 왕화정(王化貞)을 대파하고 광령(廣寧)을 탈취했다. 웅정필과 왕화정은 산해관으로 후퇴했다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참수됐다. 명조정은 손승종(孫承宗)을 요동경략으로 임명했다. 손승종은 원숭환을 등용해 영원성을 수축하여 전쟁준비를 완료했다. 누르하치는 명의 경략 따위는 우습게 여겼지만 경거망동하지는 않았다. 4년 동안 그는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했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여유창해미귀인(旅遊滄海未歸人),사의고정망북신(徙倚高亭望北宸).청초만당가절과(靑草滿塘佳節過),도화영락전잔춘(桃花零落殿殘春).너른 세상 떠돌다가 돌아가지 못하고,높은 정자에 기대어 북쪽 대궐을 바라본다.푸른 풀 제방에 가득하니 좋은 시절은 가고,복사꽃 떨어지며 봄날은 간다.사명대사께서 무려 7년을 끈 임진왜란을 마무리하기 위해 일본에 갔을 때 우에노(上野)의 죽림원(竹林院) 벽에 적었다는 시이다. 음력 3월이었으니 남국은 이미 초여름이었으리라. 우에노는 도요토미정권을 무너뜨린 도쿠가와정권이 새로운 본거지로 건설한
정라곤 논설위원 시인 박 선생! 지난 목요일에 다렌을 거쳐 선양(沈阳)에 왔습니다. 그동안 중국여행은 몇 차례 다녀보았지만 동북지방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중국을 여행할 때마다 문득문득 느껴지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 속도가 빠르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물론 여행 다니는 곳이 공항이 있거나 고도시 또는 볼거리가 풍성한 이름난 관광지 등 중국정부가 중점적으로 발전을 시도하고 있는 지역이라서 그런가봅니다. 그렇다고 해도 땅이 넓고 인구 또한 많다보니 현지에서 부딪혀가며 체감되는 것은 대국으로서 중국의 면모이니 돌아다녀 볼수록 새삼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14세기 말까지 청황실의 시조 멍거테무르가 이끌었던 오도리(斡朵里)는 두만강 하류 훈춘과 중류 회령 일대에 살면서 조선에 부속된 작은 부락에 불과했다. 1423년, 명을 도와 타타르를 정벌하러 갔다가 타타르의 보복이 무서워 고토인 두만강 중류로 돌아올 때 그가 거느린 인구는 6500명에 불과했다. 조선과 명은 이들을 ‘야인’이라 불렀다. 건주여진은 내분과 외침에 시달렸다. 설상가상 조선이 두만강 유역에 6진을 개척하자, 건주좌위는 압록강의 지류 파저강(婆猪江) 유역으로 이동해 건주위의 오랑캐(兀良哈)와 합류했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1645년, 북경을 점령한 청왕조의 통치자는 한족의 천하를 오랫동안의 군사적, 정치적 노력을 통해 빼앗았다고 생각했다. 청왕조의 위업은 1680년대 초, 강희제(康熙帝)가 삼번(三藩)을 평정하고, 대만의 정(鄭)씨까지 무너뜨린 시점이 정점이었다. 만주족의 정권이 공고해지기까지는 명의 북쪽 국경을 위협하던 준비단계에서, 입관 이후 명의 구체제를 활용하고 조정하는 시험단계를 거쳐, 마지막으로 한족과 만족을 융합하는 통치방식을 절묘하게 적용한 정치체제가 완성되었다. 이러한 통치방식에 따라 만주족과 한족은 모두 청의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게르만 민족은 삼림에서 뛰쳐나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이후 독특한 사유와 행위 방식으로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전쟁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는 오랫동안 원시적인 삼림에서 생활한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민족마다 유년기에 대자연으로부터 생존방법을 배웠다. 게르만은 울창한 삼림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독특한 세계관을 형성했다. 삼림의 세계에서는 약육강식이 자연법칙이다. 이러한 대자연의 잔혹함이 독일 민족의 영혼에 깊이 각인되었다. 농경, 유목, 해양민족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의식이다. 근현대사에서 게르만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독도를 비롯한 섬 때문에 동북아시아가 시끄럽다. 그러나 작은 섬 하나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한다. 모문룡(毛文龍, ?~1629)은 지금의 항주인 인화(仁和) 출신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요동에서 근무했다. 1622년 1월, 요동이 후금에게 무너지자 해로로 돌아서 진강을 수비하던 적장을 죽이는 무공을 세웠지만, 오만한 성격 때문에 상관과 마찰이 잦았다. 왕화정의 추천으로 좌도독으로 승진하여 압록강 하구 피도(皮島)에 주둔했다. 피도는 명의 전략기지인 내주와 등주에서는 멀리 떨어진 황폐한 섬이었다. 남쪽은
우리가 말하는 간도는 현재 우리나라 국경으로부터 하얼빈을 훨씬 넘어선 흑룡강 일대까지를 말한다. 일본은 무력을 앞세워 대한제국을 침략한 후 고종황제가 국새도 누르지 않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그런 다음 수많은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는 간도를 관리하기 위해 파출소까지 설치했다. 그때까지도 간도는 대한제국 땅이라는 분명한 증거이다. 그러나 일본은 청나라에 만주의 철도부설권과 탄광개발 조건으로 간도조약을 체결해 저희 마음대로 우리 땅을 주고받았다. 주권국을 제외한 채 제3국끼리 체결한 영토의 양도는 무효라고 국제법에 명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