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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631(인조 9)년 인조(仁祖)가 승지(承旨) 강홍중(姜弘重)을 통하여 이원익(李元翼)의 집이 초가집 두서너 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깊은 감동을 받아서 새로운 집을 하사(下賜)하였다. 그러나 이원익은 극구 사양하였지만 인조의 의지가 강력하다는 사실을 알고 결국 살게 되었다고 하며 바로 이것이 현재 경기 광명시 오리로 347번길 5-6(소화동)에 위치하고 있는 관감당(觀感堂)이다.

이원익은 1634(인조 12)년 1월 29일 향년(享年) 88세를 일기(一期)로 90 평생의 생애를 마쳤는데 청렴(淸廉)한 관리(官吏)의 표상(表象)으로서 개인(個人)의 명예(名譽)와 부(富)보다는 국가(國家)를 위하여 한평생(限平生) 바친 그의 삶은 오늘날 모든 공직자(公職者)들의 귀감(龜鑑)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원익이 세상을 떠나고 2년 이후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하였다는 것인데 9년 전에 발생하였던 정묘호란(丁卯胡亂)의 결과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조선(朝鮮)에 큰 불행을 겪게 하였던 병자호란의 전모(全貌)를 소개한다.

정묘호란이 일어난 지 9년 후가 되는 1636(인조 14)년 누르하치의 8남이 되는 홍타이지는 후금(後金)이라는 국호를 청으로 변경하고 칸이라는 칭호도 황제(皇帝)로 격상(格上)하면서 조선이 이에 앞장서 응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태종(淸太宗)은 조선에 청나라의 권위를 인정할 것과 기존의 형제관계(兄弟關係)에서 군신관계(君臣關係)로 한 단계 격상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와 관련해 그해 3월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이같은 내용의 문서를 가지고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그러나 조선은 청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는데, 여진(女眞)을 오랑캐로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가 있는데 또 다른 황제를 수용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와 관련해 강경파(强硬派)가 주류(主流)를 이루던 조정(朝廷)은 특히 사헌부(司憲府)가 앞장 서서 그 부당함을 성토(聲討)하고 사신의 목을 베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런데 심지어 강경파가 사신이 묵는 숙소에까지 가서 항의하였다고 하니 당시의 민심(民心)이 사신에 대하여 얼마나 반감을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사신은 결국 본국(本國)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그 이후 조정은 청나라와 국교 단절(國交斷絶)을 선언하였다.

덧붙이면 인조는 청과의 국교 단절 이후 전국 8도의 감사(監司), 병사(兵使), 수령(守令)들에게 “군비를 정돈하고 의주 등 서·북방 각 고을에 군량을 보충하는 등 조만간 있을 청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교서(敎書)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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