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1645년, 청군이 북경을 점령한 이듬해, 섭정왕 도르곤은 명의 멸망이 당연하다고 평가하면서 ‘숭정제는 탓할 수 없지만, 무관은 엉터리 전공으로 상을 받았고, 문관은 탐욕으로 법을 파괴했다. 천하를 잃은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지적했다. 청의 통치자는 숭정제와 그의 조상이 남긴 천하를 빼앗은 것은 정치적으로 장기간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청의 위업은 1618년 무순(撫順)을 공격하면서 시작해, 1680년대 초, 강희제가 삼번(三藩)을 평정하고, 대만의 정(鄭)씨 정권을 무너뜨린 시점에서 정점에 달했다. 청의 정권이 공고해지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경과됐다. 준비단계에서 입관 이후 명의 구체제를 활용하고 조정하는 시험단계를 거쳐 마지막으로 만주족과 한족을 융합하는 통치방식을 절묘하게 융합한 정치체제가 완성됐다. 만주족과 한족은 모두 청조정이 최고 권력을 장악한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 권력은 누구도 보유한 적이 없었던 새로운 형태였다. 만주족 통치자는 유가의 군주제도 형식을 발전시킨 한족의 도움이 필요했다. 두 민족이 어떻게 보조를 맞추며 협조해 통치체제를 완성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이들은 다른 시기에 다른 체제를 유지해왔다. 사회적 배경도 이러한 정복 과정의 몇 개 단계에 상응한 것으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창업초기 누르하치는 여진 귀족으로 명왕조의 국경 외부에 거주하는 백성에 편입됐다. 이후 북방의 몇 개 성을 함락한 그는 한족으로 ‘한8기군’을 편성해 요동의 군호로 삼았으며, 서양식 총과 대포로 산동의 해적과 대항하는 방법을 배웠다. 도르곤은 명의 고관들에게 후한 녹봉을 주어 북경을 점령할 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들은 청조의 선전요원이 되어 남방을 무혈점령하는데 기여했다. 이들을 제외한 일부 한족들은 청조가 한족을 포용하는 것을 정치적 모순으로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만주족 가운데에도 한족과의 합작을 꺼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만주족 군주는 한족 관리와 연합하기 위해 자기 민족의 귀족 세력을 약화시켜야 할 기로에 놓였다. 그들은 완전한 한족의 전통적 방식에 따라 통치하면, 한족에 흡수될 수밖에 없을뿐더러 만주족의 충성도 잃게 된다는 점을 우려했다. 관건은 유가식 방식으로 통치하게 된 것에 감개무량한 것처럼 보이면서, 명왕조에 반란을 일으킨 자들과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자들을 매도했다.

쌍방의 화해는 만족 통치하에서의 평화시대를 열었다. 18세기 중국은 역사상 가장 강성한 시기였다. 청조에 힘을 보탠 한족은 명조말 도덕적 영웅주의를 허황하다고 규정하고 포기했다. 그에 따른 보상은 각종 정치개혁을 실행할 수 있는 현실적 기회였다. 이러한 개혁은 중앙 정부의 작용을 안정시켰다. 이는 숭정제 시대에 겉돌던 문인학사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만주족과 합작한 한인들은 새로운 권력에 가담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한다는 유가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지난날의 자신감은 상실했다. 이러한 불안감은 두 가지 결과를 초래했다. 첫째는 도학자에서 어용문인으로 전향해 이민족 조정의 관료로 전환하게 된 것이고, 둘째는 조정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17세기 세계적 경제위기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귀결됐다. 그러나 개혁이 어중간한 선에서 마무리되면서 부흥은 철저하지 못하게 진행됐다. 그러나 왕조 질서의 중건으로 결국 과거의 통치체제를 새로운 시대에도 이어갈 수 있었다. 만주족은 그들의 독특한 방식으로 전통적 제국제도를 중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그들은 오랑캐라는 멸시를 받았지만, 자기들이 설계한 유효한 조치로 중원왕조가 당면한 곤경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청조의 위업에 대한 한인들의 심리는 모순적이었다. 그들은 이민족 왕조가 자신들의 안마당에서 단단한 통치체제를 유지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소수의 다수 지배가 250년 동안 지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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