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627(인조 5)년 1월 후금(後金)은 아민이 3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광해군(光海君)이 폐위(廢位)된 것에 대한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한 후금의 주력부대는 용천, 선천을 거쳐 안주성 방면으로 남하했으며 일부 병력은 가도의 모문룡(毛文龍)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후금의 침략에 대응하여 조선군(朝鮮軍)은 곽산의 능한산성(凌漢山城)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후금의 주력부대(主力部隊)를 막으려 했지만 실패하였으며 가도의 모문룡도 신미도로 패주(敗走)하게 되었다. 후금의 침략이 조정(朝廷)에 알려진 이후 인조(仁祖)는 강화도로 피난하였으며, 소현세자는 분조를 이끌고 전주로 내려가는 상황이 되었다.

이와 관련해 소현세자는 남도(南道)의 민심(民心)을 수습하면서 군량미(軍糧米)를 거두고 의병(義兵)을 모집했으며 무사(武士)를 선발하여 후금과의 전투에 투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무렵 장만(張晩)이 이끄는 조선군 역시 개성을 거쳐 황해도 평산까지 진출했다가 후금군이 황주까지 오자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후금군은 평산까지 남하해 주둔했으며 조정에서는 군대를 정비하여 임진강과 한강을 방어선(防禦線)으로 삼으면서 전쟁은 일시적으로 소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움직임이 감지됐는데 본래 후금은 조선이 이전에 자신들과 원한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명을 도와 심하전투에 가담하여 자신들을 공격했으며, 자신들의 후방을 교란하는 모문룡을 지원했으며, 누르하치가 사망하고 홍타이지가 즉위할 때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을 침략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후금의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조선은 후금이 까닭 없이 침략했다고 항변했으며 만약에 후금군이 전쟁을 중단하고 본국으로 철수하면 협상을 추진할 의사가 있다는 뜻을 밝혔다. 그 이후 최명길(崔鳴吉) 등을 대표로 한 협상단을 구성하고 강화도에서 후금과 협상한 결과 후금이 명나라에 적대적인 감정을 갖지 않는다면 형제관계를 맺겠다는 등의 5개항을 합의한 정묘화약(丁卯和約)을 체결하였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맹약을 맺지만 기존의 명과의 관계는 유지한다.

둘째, 화약 성립 즉시 후금은 군사를 철수하고 서로 국경을 침범하지 않는다.

셋째, 양국은 서로 사신을 교환하며, 국경에서 개시를 통해 무역한다.

넷째, 조선은 매년 정해진 양의 세폐를 바친다.

다섯째, 후금에서 조선으로 도망쳐 온 사람을 송환한다.   

이상과 같이 정묘화약을 체결한 이후 후금이 철군하면서 전쟁이 종식되었으며, 소현세자는 그 해 10월에 입학례(入學禮)를 행했다. 그리고 12월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재임 중이던 강석기(姜碩期)의 차녀와 가례(嘉禮)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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