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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윤문거(尹文擧)가 31세가 되는 1636(인조 14)년에 발생한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살펴본다. 거슬러 올라가서 광해군(光海君)이 서인세력에 의하여 1623(인조 1)년 폐위된 이후 불과 4년 만에 전쟁이 발생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이었다.

이와 관련해 정묘호란 당시 청나라는 후금(後金)이라는 국가명(國家名)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본래 후금은 건주 여진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누르하치가 1616(광해 8)년 이러한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세운 나라가 바로 후금이었다.

이러한 후금이 1627(인조 5)년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朝鮮)을 침략하여 당시 인조(仁祖)는 강화도로 피신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피신하였으며 결국 강화도에서 협상하여 후금과 조선이 형제국(兄弟國)을 맺는 선에서 종식되었다.

그러나 정묘호란은 하나의 시작에 불과하였으니 그로부터 9년 후에 누르하치의 8남 홍타이지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고 국호(國號)를 청으로 변경한 이후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하는 등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청태종은 이러한 칭제건원을 하나의 명분으로 조선에 청나라의 권위를 인정할 것과 또한 기존의 형제관계(兄弟關係)를 군신관계(君臣關係)로 격상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이러한 청나라의 부당한 요구와 관련해 그 요구를 수용하자는 주화파(主和派)와 그것을 과감히 거부하고 전쟁도 불사하자는 척화파(斥和派)로 대립하는 국면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인조가 결국 척화파의 입장에 힘을 실어 주면서 상황은 급변하여 청태종(淸太宗)이 1636(인조 14)년 12월 2일 청군 7만을 비롯하여 몽고군 3만, 한족군사 2만 등 총 12만을 직접 진두지휘하여 압록강을 건너서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이 조선을  침략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청태종은 침략 경로를 임경업(林慶業) 장군(將軍)이 지키고 있는 의주 백마산성(白馬山城)을 피해 직접 한성으로 진격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청나라의 기습적인 침략에 철저히 대비하지 못한 조선의 조정(朝廷)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정묘호란에 이어서 인조를 비롯한 왕실이 피신하는 불행한 사태를 겪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인조는 본래 강화도로 피신하려다가 청군이 길을 가로막는 연유로 불가피하게 소현세자를 비롯하여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신하였으며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비롯한 다른 왕족들은 강화도에 피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강화도가 결국 청군에 의하여 함락되면서 남한산성에 있던 인조는 1637(인조 15)년 1월 30일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면서 조선의 자존심(自尊心)에 큰 상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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