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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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안관화(隔岸觀火)는 강 건너 언덕에서 남의 집에 불이 난 것을 구경한다는 뜻이다. 싸움판에 직접 뛰어드는 것보다, 바깥에서 관망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바라보면서 기회를 기다리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선택이다. 다른 의미로는 냉정하게 객관적 현상을 분석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역사도 당사자로서의 시각보다 그렇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바다 건너 중국 산동의 깊은 산 속에서 청나라 황실의 후손을 만난 김에 우리 역사의 중요한 장면을 되짚어본다. 파주 봉일천은 청과 조선의 군사적 충돌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곳에서 방대한 청사를 읽었던 기억과 산동에서의 시각은 두 차례 여진족과 조선의 전쟁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해줬다.

청태조 누르하치의 실록에 이어서 청태종 홍타이지의 실록을 읽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정묘년(1627)에 조선을 군사적으로 압박해 명과 청 사이에서 중립을 강요했던 홍타이지는 조선이 여전히 명과의 우호관계를 고집하자, 병자년(1636)에 직접 조선을 침략했다. 그의 목적은 복잡했지만, 조선에 대한 압박전략은 강온양면에서 치밀하게 전개됐다. 출병에 앞서 그는 정묘년에 조선침략을 주도했던 사촌형 아민을 심양의 감옥에 구금했다. 정묘년에 홍타이지는 아민에게 대동강을 넘지 말고, 조선을 위협해 외교적 성과를 거두되 일체의 약탈을 금지하라는 제한전을 명했다. 이 명령에는 냉정한 복선이 깔려 있었다. 아민은 그의 친형 다이샨과 함께 누르하치 사후에 벌어진 제위쟁탈전에서 강력한 경쟁자였다.

누르하치는 임종하기 전에 조카 아민과 다이샨, 홍타이지 등 8기의 버일러 모두에게 후계자의 가능성을 열어뒀다. 실력이나 전공에서 아민과 다이샨은 홍타이지를 훨씬 능가했다. 그러나 아민과 다이샨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 결정되면, 심각한 분열이 초래될 위험이 있었다. 결국 제위는 버일러 가운데 가장 약한 홍타이지에게 돌아갔다. 홍타이지는 등극 초기에 두 형과 나란히 앉아서 정무회의를 주관했다. 대소사를 막론하고 반드시 두 형의 의견을 먼저 들은 후 결정했다. 그러나 다이샨이 죽은 후, 이러한 세력균형이 무너졌다. 홍타이지의 처가인 몽고 코르친부는 우수한 말을 청에 공급했다. 몽고의 외원은 홍타이지의 권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됐다. 아민은 위기가 다가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는 3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째는 홍타이지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것, 둘째는 반란을 일으켜 홍타이지를 제거하는 것, 셋째는 제3의 지대에서 독립하는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이러한 아민의 속내를 꿰뚫고 있었다. 아민에게 조선침략을 맡긴 것은 책임을 추궁하기 위한 전략적 목적 때문이었다. 조선의 저항이 생각보다 약하자, 아민은 대동강을 넘어 개성까지 남하했다. 그는 조선왕조를 전복하고,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를 확보할 가능성을 엿보았다. 홍타이지는 이 무렵에 아민에 대한 보급을 중단했다. 다급해진 아민은 몽골군을 앞세워 약탈을 본격화했다. 신중히 상황을 지켜보던 홍타이지는 조선과 강화를 체결하고 철수하라고 명했다. 나중에 아민이 구금된 것은 조선에서의 명령 불복종과 약탈에 대한 책임 추궁이었다. 강력한 정적의 제거, 사르후전투에서 투항한 강홍립의 조선군에 대한 회유, 침략의 성격을 표시해 조선의 저항을 약화시킨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강홍립의 부대는 8기에 골고루 분산배치됐다. 그들의 명단은 청사고에 남아 있다.

병자년 홍타이지의 침략은 주도면밀했다. 그 전해에 종족의 명칭을 여진에서 만주로 바꿨다. 혈연에 연연하지 않고, 사회적 공동체를 만들어 인구를 늘리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 선언 이후 조선을 침략한 것은 인구증가에 대한 구체적 실행의 일환이기도 했다. 임경업이 지키던 의주를 지나쳐서 신속히 한양으로 진격하는 동안 별다른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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