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평화시대(平和時代)
[고전 속 정치이야기] 평화시대(平和時代)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만주족은 어떻게 수십 배가 많은 한족을 통치하고 장기간 동아시아의 평화치제를 구축했을까? 북경을 점령한 섭정왕 도르곤은 ‘숭정황제는 탓할 수 없지만, 무관은 엉터리 전공으로 상을 받으려고 했으며, 문관은 탐욕으로 법을 파괴했다. 천하를 잃은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지적했다. 청의 통치자는 숭정제와 그의 조상이 남긴 천하를 빼앗기까지 장기간 정치적 노력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청의 위업은 1644년 이전인 1618년 무순(撫順)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1680년대 초, 강희제가 삼번을 평정하고, 대만의 정(鄭)씨 정권을 무너뜨린 시점에서 정점에 달했다. 청의 정권이 공고해지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경과됐다.

명의 국경을 위협하던 준비단계에서 입관 이후 명의 구체제를 활용하고 조정하는 시험단계를 거쳐 마지막으로 만주족과 한족을 융합하는 통치방식을 절묘하게 융합한 정치체제가 완성됐다. 만주족과 한족은 모두 청이 최고의 권력을 장악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권력은 역사상 전무무후한 형태였다. 만주족 통치자는 유가의 군주제도 형식을 발전시킨 한족의 도움이 필요했다. 두 민족이 어떻게 보조를 맞추며 협조해 통치체제를 완성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이들은 다른 시기에 다른 각색으로 체제를 유지했다. 사회적 배경도 몇 단계 정복 과정에 상응했다.

창업초기 누르하치는 여진의 귀족으로 명의 국경 외부에 거주하는 백성이었다. 이후 북방의 몇 개 성을 함락한 그는 한족으로 ‘한8기군’을 편성해 요동의 군호로 삼았으며, 서양식 총과 대포를 사용해 산동의 해적과 대항하는 방법을 배웠다. 도르곤은 명의 고관들에게 후한 녹봉을 주어 북경을 점령할 때 북방 향신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들은 청의 선전요원이 돼 남방을 무혈점령하는데 기여했다. 일부 한족들은 청의 한족 포용을 만주족의 모순적 심리로 이해하기도 했다. 만주족 가운데에도 한족과의 합작을 꺼리는 사람이 많았다. 만주족 군주는 한족 관리와 연합하지 않으면 자기 민족의 귀족 세력을 약화시켜야 할 기로에 놓였다. 그러나 완전히 한족의 전통 방식에 따라 통치하면, 한족으로 흡수될 수밖에 없을뿐더러 만주족의 충성과 사랑을 잃게 된다는 점을 우려했다. 합작한 한인과 더불어 유가식 통치 방식을 채택한 것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면서, 명에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경멸하고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자들을 매국노로 매도했다.

쌍방의 화해는 만족 통치하에서의 평화시대를 열었다. 18세기 중국은 역사상 가장 강성한 시기였다. 직접적인 대가는 도의상의 불안이었다. 청에 힘을 보탠 한족은 명조말 도덕적 영웅주의를 허황한 것으로 규정하고 포기했다. 그에 따른 보상은 각종 정치개혁을 실행하는 현실적 기회였다. 개혁은 중앙 정부의 작용을 안정시켰다. 숭정제 시대에 겉돌던 문인학사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만주족과 합작한 한인들은 그들이 권력에 가담함으로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한다는 유가의 사명을 실질적으로 완수했다. 그러나 지난날 자신이 표방한 사회주의자로서의 자신감은 상실했다. 불안감은 두 가지 결과를 초래했다. 첫째는 이성적 자주와 도의적 태도를 포기하고, 도학자에서 어용문인으로 전향한다는 의미이다. 둘째는 유한한 개혁의 열기를 점차 증강해 조정의 영향력이 17세기의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빨리 극복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로 귀결됐다. 유한한 개혁은 어중간한 선에서 마무리됐다. 왕조 질서의 중건은 결국 새로운 시대에도 과거의 통치체제를 이어갔지만, 만주족은 그들의 독특한 방식으로 전통적 제국제도를 중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오랑캐라는 멸시를 받았지만, 자기들이 설계한 유효한 조치로 중원왕조가 당면한 곤경을 해결했다. 한족은 안마당에서 단단한 통치체제가 수립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