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독도를 비롯한 섬 때문에 동북아시아가 시끄럽다. 그러나 작은 섬 하나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한다. 모문룡(毛文龍, ?~1629)은 지금의 항주인 인화(仁和) 출신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요동에서 근무했다.

1622년 1월, 요동이 후금에게 무너지자 해로로 돌아서 진강을 수비하던 적장을 죽이는 무공을 세웠지만, 오만한 성격 때문에 상관과 마찰이 잦았다. 왕화정의 추천으로 좌도독으로 승진하여 압록강 하구 피도(皮島)에 주둔했다.

피도는 명의 전략기지인 내주와 등주에서는 멀리 떨어진 황폐한 섬이었다. 남쪽은 육지에서 멀지만 북쪽은 가까워서 80리만 가면 후금의 경계였다. 동북쪽은 조선이다. 북중국 일대가 후금에게 함락되자 백성들이 섬으로 이주했다.

모문룡은 주민을 모아 병력을 확보하고, 사방으로 초계선을 띄워 후금의 배후를 위협했다. 조정은 그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감안하여 섬에 관한 일을 모두 일임했다. 모문룡은 압록강 연안에서 백두산까지 병력을 파견하여 후금의 동쪽을 위협했다. 후금은 조선을 공격하면서 모문룡의 본거지까지 섬멸하려고 했다. 의주를 점령한 후금은 철산(鐵山)에서 모문룡을 야습했다. 패한 모문룡은 피도로 돌아갔다. 후금은 조선과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모문룡을 지원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모문룡은 후금의 배후를 위협했지만 대략을 지닌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일정한 전략적 개념에 따라 움직이지 못하고 수시로 출몰하여 후금과 조선을 왕래하는 사신을 습격하거나 약탈을 했다. 후금과 강화조약을 체결한 조선이 물자를 지원하지 않자, 다급해진 그는 금지된 물건을 거래했다. 명·청의 교체기에 분명한 외교적 선택을 하지 못한 조선은 정묘호란을 겪은 후에도 임진왜란을 지원한 명에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여론이 남아 있었다. 조선의 입장을 역이용한 모문룡은 조선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후금과 조선의 왕래를 차단했다.
명도 그의 필요성은 인정했지만 끈질긴 지원요청으로 시달렸다. 반사문(潘士聞)은 모문룡이 항복한 자를 죽였다고 탄핵했고, 동무충(董茂忠)도 너무 많은 물자를 소모하므로 산해관이나 영원으로 철수시키자고 주장했다. 명장 원숭환(袁崇煥)까지 반대하고 나섰다.

원숭환은 모문룡이 찾아왔을 때 정중하게 대했지만, 모문룡은 당연한 것처럼 거만하게 행동했다. 모문룡을 제거할 결심을 한 원숭환은 열병을 핑계로 쌍도(雙島)에서 모문룡과 만났다. 원숭환이 귀향을 촉구했지만 모문룡은 기회를 보아 조선을 기습하겠다고 거절했다.

다음날 원숭환은 활쏘기를 관람하자는 핑계로 모문룡을 유인하여 참수했다. 원숭환은 정중하게 장례를 치르면서 전날 참수한 것은 조정의 대법을 지킨 것이고, 오늘 장례를 치르는 것은 전우에 대한 개인적인 정이라고 말했다. 숭정제는 속으로 놀랐지만 죽은 모문룡보다 성과를 올린 원숭환을 중시하여 일단 덮어주었다. 모문룡의 필요성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원숭환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모문룡을 죽였다고 비판했다. 여론을 의식한 원숭환은 필부에 불과한 모문룡이 세력을 키워 방자해지니 무슨 일을 저지를지 두려웠다고 변명했다. 그는 모문룡을 죽였지만 남은 부하들이 변고를 일으킬까 염려하여 향은(餉銀)을 80만으로 증액했다. 그러나 주장을 잃은 섬에서는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 원숭환은 병력은 줄이되 자금은 증액하자고 건의했다. 숭정제는 당장의 묘안이 없어서 허락했다.

원숭환은 멸망 일보 직전인 명을 버티던 마지막 명장이었다. 몇 차례 청태조 누르하치와 태종 홍타이지의 공격을 물리쳤지만, 이 사건으로 숭정제의 의심을 받다가 홍타이지의 이간책에 넘어간 숭정제에게 피살되었다. 우리에게는 귀찮은 존재였지만 명의 입장에서는 모문룡의 군사적 중요성은 확실했다. 원숭환이 사적인 감정 때문에 모문룡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감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다. 두 군사지도자의 마찰은 그렇지 않아도 약화된 명의 전력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었다. 위대한 사람이라고 모든 평가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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