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제국의 마지막은 언제나 처량하다. 대원제국을 몰아내고 한족의 정권을 세운 대명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 주유검(朱由檢)은 천계제 주유교(朱由校)의 아우로 권력을 전횡하던 환관 위충현이 옹립했다. 초기에 그는 제법 성실하게 국정을 처리했다. 사서에 따르면 20대에 이미 머리카락이 백발로 변했고, 눈가에는 주름이 생길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다고 한다. 닭이 울면 자리에서 일어나 늦은 밤까지 정무를 처리하며 잠자리에 들지 않았고 노심초사하다가 과로로 병에 걸리기도 했으며, 궁중에서 화려한 잔치를 베푼 적이 없었다. 그의 집정기간에 조정은 여진족이 세운 신흥강국 후금에 대한 주전파와 주화파로 양분됐다. 숭정제는 주전파인 원숭환(袁崇煥)을 등용했다. 원숭환은 압록강 하구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전횡하던 모문룡(毛文龍)을 죽여 지휘권을 강화하고, 금주에서 홍이포로 누르하치에게 부상을 입혀 죽게 만들 정도로 맹활약했다. 그러나 누르하치에 이어 제위에 오른 청태종 홍타이지의 반간계에 걸려 원숭환을 죽이면서 명군은 전투력을 크게 상실했다. 문관집단은 군중의 장수를 임명할 때 문벌출신을 고집하다가 후금에 대한 군사작전에서 여러 차례 참패하면서 명의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결국 명군은 농민군도 진압하지 못할 정도로 약화되면서 명의 멸망을 초래했다.

강성했던 명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조정은 두 개의 정파가 서로 대항하느라고 인재를 찾기가 어려웠다. 숭정제가 즉위 초에 문관집단의 도움으로 위충현이 우두머리인 엄당을 제거했기 때문에 문관집단의 세력이 팽창하게 됐다. 숭정제와 신하들의 관계는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거북했다. 재위 17년 동안 숭정제는 농민군 진압과 후금에 대한 저항을 제외하고 문관집단의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침식을 잊을 정도로 최선을 다했지만 나라를 다스릴 모략과 용인술이 부족했으며, 게다가 시기심과 의심이 많아 유능한 대신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위충현과 같은 부류로 여겼다. 문무백관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너무 자주 직무를 교체시켰다. 17년 동안 17명의 형부상서와 50명의 내각대학사를 교체했다. 인재가 부족하자 진심으로 국가를 위하는 사람들까지 명을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대책이 없었던 숭정제는 사조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부패하고 무능한 환관들을 다시 기용해 10만에 이르는 환관이 대명을 망하게 한 역사의 비극을 초래했다. 주유검은 몇 차례 죄기조(罪己詔)를 내려 자신의 실정을 반성했지만, 가혹한 잡세가 끊임없이 부과돼 민생이 불안해졌다. 명말의 빈번한 농민기의는 그 결과였다. 이밖에도 요동에서 패배가 계속될 때 주황후의 천도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아 마지막 기회까지 잃고 말았다. 주유검은 성격이 복잡했지만, 위충현을 제거할 때 보여준 기지는 대단했다. 전임인 신종, 희종 심지어 명왕조 중기의 여러 황제와 비교해보면 그는 책임감과 웅심은 매우 강했기 때문에 역사가들의 동정심을 받기도 했다. 그는 망국의 군주가 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연이은 재난으로 농민반란이 중국의 대지를 흔들고, 동북장에서 후금이 끊임없이 변경을 침범하자 군비가 계속 늘었다. 세수가 부족하자 각종 명목으로 세금이 가중됐다.

주유검이 명을 중흥할 능력을 지녔더라도 전대로부터 쌓인 어려움을 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기근, 질병, 민란, 후금의 침략이 겹쳤지만 그는 어떻게든 위기를 극복하고 싶었다. 그러나 의심과 강퍅한 성격으로 큰 실수를 반복했다. 전기에는 환관을 제거했지만, 문관들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불안해져서 후기에 다시 환관을 중용했다. 5년 이내에 요동을 수복할 것이라는 원숭환의 장담을 믿고 전력을 영원과 금주를 잇는 방어선에 집중했다가 홍타이지가 몽고로 우회해 북경을 공격하자 망하기 직전까지 몰렸다. 이자성(李自成)의 농민군까지 막아내느라고 내우외란의 위기에 몰렸다. 역사학자 맹삼(孟森)은 주유검이 만력 이전에 황제로 등극했다면 망국의 군주는 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천계 이후였기 때문에 망하고 말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마음은 있었지만 처방이 없어서 망국의 비극을 숙성시켰으니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남명정권의 대신들은 그를 천고의 성주로 받들었다. 예부랑 여욱(餘煜)은 다른 황제들과 달리 애완용 동물이나 신선술 또는 토목공사를 좋아하지 않았고, 사직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천고에 드문 군주였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는 나중에 북경을 점령하고 한족의 지지를 얻으려는 대청에 의해 확산됐다. 소중화를 주장하며 명에 대한 의리를 내세운 조선에서는 그가 죽은 후에도 숭정이라는 연호를 오랫동안 사용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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