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여유창해미귀인(旅遊滄海未歸人),
사의고정망북신(徙倚高亭望北宸).
청초만당가절과(靑草滿塘佳節過),
도화영락전잔춘(桃花零落殿殘春).

너른 세상 떠돌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높은 정자에 기대어 북쪽 대궐을 바라본다.
푸른 풀 제방에 가득하니 좋은 시절은 가고,
복사꽃 떨어지며 봄날은 간다.

사명대사께서 무려 7년을 끈 임진왜란을 마무리하기 위해 일본에 갔을 때 우에노(上野)의 죽림원(竹林院) 벽에 적었다는 시이다. 음력 3월이었으니 남국은 이미 초여름이었으리라. 우에노는 도요토미정권을 무너뜨린 도쿠가와정권이 새로운 본거지로 건설한 에도(江戶)의 동북쪽에 위치한 얕은 구릉지대로 훗날 일본 최초의 공원인 은사(恩賜)공원이 세워진 곳이다. 이에야스는 원래 호오조오(北條)씨의 영지였던 이곳을 차지하면서 광활한 무시시노(武藏野)를 확보해 서남을 장악한 도요토미와 대등한 강자로 부상했다. 그는 우에노에 죽림원이라는 별장을 건설하고 영빈관으로 사용했다. 사명대사가 오자 죽림원을 거처로 내주었다. 대사는 이곳에서 일본 정계와 종교계의 인사들과 두루 만나 전후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대담을 나누었다. 이에야스에 이어 제2대 쇼군이 된 히데타다도 이곳을 찾아 대사께 선학(禪學)을 배웠다. 대사는 ‘거대한 우주공간은 무진장이요, 고요함을 알면 냄새도 소리도 없다네. 지금 설법을 들었으니 또 무슨 번민을 묻는가? 구름은 푸른 하늘에, 물은 병속에 들어있다네’라는 시로 화담했다.

히데요시가 밑바닥에서 일어나 벼락처럼 일본 최고의 권력자가 되기까지의 추동력은 끊임없이 팽창하는 호기심과 욕망이었다. 그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전력을 다했고, 새로운 욕망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히데요시에게 세상은 정복의 대상이었다. 그에 비해 이에야스는 약소국의 후계자로 태어나 6살에 이마가와가의 인질이 되면서 욕망을 버리는 것부터 배웠다. 노부나가의 압력으로 장남 노부야스에게 할복명령을 내려야 했고, 부인 세나는 가신과의 간통으로 고통을 주었다. 노부나가가 암살된 후에도 건곤일척의 한 수를 던지는 것보다 기다림으로 일관하며 팽창하는 히데요시의 욕망을 지켜보았다. 버림으로써 기회가 오고, 기회가 와도 그것마저 버렸다. 비워야 채워진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았던 그는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방관자의 입장에서 조용히 지켜보았다.

조선, 중국, 일본의 거대한 충돌이 끝난 후, 동아시아에서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했다. 욕망의 불길인 히데요시는 사라지고, 중심이던 명은 동북에서 성장하는 누르하치와 서북을 압박하는 몽고의 후예에게 시달리면서 기력을 잃었다. 유학이 세상을 구하지 못한다는 것이 증명됐다. 새로운 시대는 무엇으로 열어야 하고, 새로운 시대는 무엇일까?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하던 변환기에 불교가 던진 조용한 화두가 바로 평화와 공존이었다. 푸른 풀이 우거지니 봄의 상징이던 복사꽃도 떨어지면서 봄날은 간다.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속에 있으니 저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서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대사의 눈에 비친 일본인은 침략자가 아니라 또 다른 피해자였다. 오랜 내전과 침략전쟁은 있어야 할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넘어선 공멸의 길이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대사의 가르침을 깊이 받아들인 히데타다는 제2대 쇼군이 된 이후 일본의 해외진출을 강력하게 통제하면서 속죄의 길을 걸었다. 메이지유신으로 다시 욕망이 분출될 때까지 약 250년 동안 일본은 동아시아의 문제아가 아니라 모범생이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