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논설위원, 시인) 청와대(靑瓦臺)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관저를 뜻하는 말이다. 이곳은 고려시대에 별궁이 있던 터였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종 8년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연무장과 과거장 등이 있었으며, 일제 강점기 때에는 조선총독부가 총독관저를 지었는데 이때에 청와대 본관이 지어진 것이다. 그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면서 ‘경무대(景武臺)’라 불렀다. 그러다가 4·19혁명 후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름을 ‘청와대’로 바꾸었으니 지금의 이름으로 불린 지도 어언 53년이나 된다. 자유당 때의 경무대나 5.
조선시대 대원군이 나라의 위엄을 세우려고 경복궁을 중축하는데 자꾸 불이 났다. 각 지방에서 커다란 목재를 힘들게 실어와 기껏 지어놓으면 불이 나고, 또 지어놓으면 불이 났다. 나라의 재산을 축내면서 그런 큰일을 한다고 백성의 불만이 많았는데, 자꾸 불이 나니 고민 끝에 잠도 못 잘 지경이 됐다.하루는 너무 피곤해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새로 지어놓은 경복궁 건물에 또 불이 났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을 모르고 헤매는데, 이상하게 생긴 동물이 하늘에서 날아와 입으로 물을 뿜어내며 순식간에 불을 껐다. 그리곤 다시 하
이재술 정치컨설팅 그룹 인뱅크코리아 대표 필자는 2011년 8월 2일 천지일보 칼럼에서 우리의 안보태세와 관련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 사건을 비교하며 논평을 한 바 있다. 당시 칼럼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1592년부터 시작된 7년간의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우리 조선은 경복궁을 비롯한 많은 국보급 문화재들이 손실되거나 약탈당했으며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치욕의 역사를 보며 임진왜란 발발 9년 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임진왜란 9년 전인 선조 16년 문신들은 당파의 이익을 둘러싸고 분열돼 나라의 기강이 위태로웠다
강종일 한반도중립화 연구소장 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明治維新: 일본왕의 권한을 회복한 정치개혁)을 단행한 후, 서구와 같은 산업 국가를 지향하면서도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한국을 반드시 지배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확산시켰다. 사이고 다가모리(西鄕隆盛)의 정한론 추진 주장에 반해 한국과 평화공존을 주장한 이와구라 도모미(岩倉具視)의 반대로 정한론은 일시 유보되지만 일본은 한국병합을 치밀하게 추진하였다. 첫째, 일본은 정한론 실현을 위한 첫 단계로 무력으로 한국을 개항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1875년 9월
이 재 술 정치컨설팅 그룹 인뱅크코리아 대표 1592년부터 시작된 7년간의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우리 조선은 경복궁을 비롯한 많은 국보급 문화재들이 손실되거나 약탈당했으며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치욕의 역사를 보며 임진왜란 발발 9년 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임진왜란 9년 전인 선조 16년 문신들은 당파의 이익을 둘러싸고 분열돼 나라의 기강이 위태로웠다. 오직 병조판서 율곡 이이만이 외세의 침략에 대비한 10만 양병을 주장했으나 간신 같은 문신들에 의해 결국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그 때문에 임진왜란에 있어
한국을 찾는 중국과 일본의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로 명동이 꼽혔다고 한다. 20~30대 젊은이들에게는 쇼핑과 먹을거리가 관광의 우선 목적이 된 것이다. 외국인 관광객이 늘어난 것은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들이 경복궁이나 창덕궁, 인사동과 같은 역사성이 짙은 궁궐이나 전통문화의 거리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문화재 지키기, 전통문화거리 만들기, 전통문화체험 등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정작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경복궁이나 인사동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소리다. 한류의
전통문화상품의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2010 한국스타일 박람회’가 12월 15일부터 5일간 코엑스에서 열린다. 주요 한스타일 품목은 6H라 불리는 한식 한지 한옥 한국음악 한복 한글이다. 벌써 4회를 맞는 한국스타일 박람회는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고 있지만, 한류열풍에 비교해 본다면 일반인들에게는 한스타일이라는 개념부터 생소한 것이 사실이다. 본지는 그간 한국문화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전통문화의 깊이를 알리고자 애써오면서 한스타일을 생업으로 하거나, 한스타일의 세계화를 부르짖는 이들의 호소를 들어왔다. 한스타일에 종사
1945년 8월 15일, 지금으로부터 65년 전 이 날은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에게 항복함으로 한반도는 36년 아니 그보다 더 긴 세월의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된 바로 그 날이다. 그 날을 우리는 ‘광복절’이라 하여 해마다 기념하고 있다. 해마다 찾아오는 광복절을 ‘광복절 기념식’이라는 요식행위로 끝내고 말 것인가. 특히 65주년을 맞는 금년은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해로 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과 맞물려 안중근 유골봉환사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혜문스님이 주관하고 있는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 등
며칠 있으면 새로 짓는 광화문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다. 오히려 우울하다. 왜냐면 문화재청이 그 현판을 우리 글자 한글이 아닌 한자로 써서 단다고 하기 때문이다. 광화문 현판은 지난 40여 년 동안 한글현판이었다. 나는 지난 40년 동안 광화문의 한글현판을 보면서 세종대왕과 한글을 떠올렸고 한없는 민족적 자긍심과 자신감을 얻었다. 나뿐이 아니라 많은 국민이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 다. 그런데 정부가 문화재를 복원한답시고 그 한글현판을 버리고 한자현판을 단다고 한다. 정부가 나라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한
문화재청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올해 광복절을 기점으로 원형 복원된 광화문을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소실돼 1864년(고종 1년)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옛 모습을 찾았지만 1927년 일제에 의해 또 다시 제 모습을 잃은 뒤 엉뚱하게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되는 등 굴곡진 민족의 역사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이런 아픔이 있었으니 하루라도 빨리 광화문이 복원돼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정부가 공기(工期)를 몇 차례 앞당겨 7월 말까지 공사를 마무리하겠다는 것에는
실패로 끝난 갑신정변으로 김옥균과 함께 일본에 망명했다가 어렵게 귀국한 박영효는 개혁에 대한 꿈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변화하고 있는 세계의 조류에 조선이 밀려나지 않고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문호를 개방하여 대대적인 혁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영효의 개혁 의지에 동참하고 있는 인물은 법무대신 서광범, 훈련대장 우범선, 경무관 이규완 등이었다. 이들 개화당은 러시아를 등에 업은 중전(명성황후)에 대해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개화당은 중전의 정치적 간섭을 차단시킬 방안을 강구했다. 그것은 고종을 상황으로 물러앉게 하고 세
금년에도 어김없이 어린이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린이날은 1922년에 방정환(方定煥) 선생이 5월 1일을 기념일로 정한 것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처음에 어린이날을 정하게 된 취지는 천도교 제2대 교주인 해월신사의 ‘어린아이를 때리지 말라. 어린아이를 때리는 것은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니라’라는 말씀을 근본으로 하였다고 하며, 어린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한다는 뜻도 들어 있었다고도 하는데, 1925년부터는 어린이날 기념행사도 개최하였고 1927년부터는 5월 첫째 일요일에 어린이들을 위한 행사를 개최했다고 한다. 그러나 민족항일기 말 일
[뉴스천지=김현진 기자] 최근 문화재청은 오는 11월 서울에서 열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맞춰 예정보다 3개월 앞당긴 9월 말까지 광화문 복원공사를 완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항간에서는 이에 대해 무리한 행정이 아니냐는 비난도 있지만,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광화문을 대한민국의 상징으로 세계에 알릴 기회라며, 여러 문제를 감안해 넉넉히 잡았던 일정을 앞당기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 청장의 말처럼 광화문 완공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경복궁을 중심으로 조선왕실의 자태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
2010년 올해는 한·일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해이며 독도가 일본 군홧발에 고통을 당한 지 105년째 되는 해이다. 2009년 12월 23일 일본 문부과학성은 민간출판사의 교과서 제작 지침서인 고등학교 ‘사회과학습지도요령해설서’에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로 명기한다는 방침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곧이어 한국 국민의 분노가 들끓자 일본은 2008년 7월 개정된 “중학교 사회과 해설서에 표기된 내용에 따르라”는 눈가림으로 슬쩍 비켜가는 듯하며 대한민국을 우롱하였다. 2008년 7월 개정된 중학교 사회과 해설서에 표기된 내용은
경복궁 하면 문뜩 떠오르는 것이 그 정문인 광화문이 떠오르는데, 사실 경복궁의 모든 전각들의 이름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하여도 적어도 광화문은 선명히 각인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만큼 정문이 나타내는 상징성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오늘 언급하고자 하는 원구단 정문의 상징성도 광화문 못지않다고 볼 수 있다.이와 관련하여 작년 12월 9일에 비록 원자리는 아니지만 근처에 원구단 정문이 무려 40년 만에 복원이 되었는데, 이러한 정문이 여기에 위치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이다. 원구단이 최초로 조성된 것은 189
요즘 문화재의 발굴이나 복원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먹고 살기 바빴던 격동의 20세기를 보내고,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여유가 생기자 삶의 질에 대해 무심코 지나쳤던 역사(歷史)에 대해 돌아보게 된 것이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우리가 소홀히 여겼던 소중한 문화재의 가치를 깨닫게 된 시기가 온 것이다. 이 같은 까닭에선지 곳곳에서 활발한 발굴 작업 및 복원이 진행되는 것이라 본다.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서울성곽과 돈의문, 숭례문 복원에도 박차가 가해지면서 2013년이면 경복궁을 중심해 성곽으로 둘러싸인 옛 수
불교계 사정에 눈이 어두운 나는 서울 강남의 봉은사 주지 명진스님과 개인적인 안면이 없다. 스님이 1986년의 저 유명한 ‘9.7 해인사 승려대회’를 주도하고 10.27법난 진상규명에 앞장선 다소 사회참여적 인물이란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간 만나 뵐 기회는 별로 없었다. 다만 지난 5월 경복궁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 때 4대 종단 중 불교계를 대표해서 명진스님이 장의식 집전을 할 때 잠깐 스친 적은 있었다. 바로 그 명진 스님이 기축년 세모에 속진이 난무하는 속세의 잡것들을 향해 벽력같은 일성을 날려 화제를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