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문화칼럼니스트

실패로 끝난 갑신정변으로 김옥균과 함께 일본에 망명했다가 어렵게 귀국한 박영효는 개혁에 대한 꿈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변화하고 있는 세계의 조류에 조선이 밀려나지 않고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문호를 개방하여 대대적인 혁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영효의 개혁 의지에 동참하고 있는 인물은 법무대신 서광범, 훈련대장 우범선, 경무관 이규완 등이었다. 이들 개화당은 러시아를 등에 업은 중전(명성황후)에 대해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개화당은 중전의 정치적 간섭을 차단시킬 방안을 강구했다. 그것은 고종을 상황으로 물러앉게 하고 세자를 옹립하자는 것이었다. 그 처방을 내놓은 인물이 훈련대장 우범선이었다.

그러나 황제를 당장 폐위시키는 것은 무리한 행동이라 결정하고 우범선 수하의 신식 군대를 앞세워 각 군영과 경호대를 규합하여 유사시에는 쿠데타도 불사한다는 결사를 맺었다.

엄청난 거사일을 앞두고 개화당의 계획은 일본 공사관에서 정보를 얻은 보수파 심상훈의 폭로로 발각되고 말았다. 분노한 고종의 명령으로 체포령이 떨어지자 박영호와 개화당 핵심 간부들은 우범선만 남기고 당장 일본 공사관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변화하는 세계정세에 대한 나름대로의 부국안민의 대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꿈을 잠시 접은 박영호는 기약없는 망명의 길을 또 다시 떠났다.

총리대신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킨 명성황후와 보수파 세력은 개화당을 완전히 배제하고 조정의 권력을 장악했다. 러시아를 등에 업은 조선 조정이 강경책을 펼치자 찬밥 신세가 된 일본공사 이노우에와 일본인들은 저희네 나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청일 전쟁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기득권이 당연히 일본한테 있음은 물론이고 세계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조선을 절대 포기 할 수 없었다. 조선의 식민지화 성공만이 일본이 부강해질 수 있는 절실한 문제였다.

새로운 조선주재 공사에 임명된 미우라는 일본의 낭인 불량배들을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왔다. 박영효가 일본으로 도망간 뒤 숨을 죽이며 칩거하고 있던 훈련대장 우범선은 하늘을 날듯이 기뻐했다.

그는 일본공사 대리인과 함께 공덕리 별장에서 한숨만 짓고 있는 대원군을 찾아 갔다. 우범선은 대원군과 대담한 정치협상을 벌였다. 대원군이 조정으로 들어가는 조건으로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이 중심이 된 개화당 내각을 출범시키는 것이었다.

고종 32년 10월 7일 밤이었다. 신식 정예군과 일본 병력, 일본 불량배 낭인 무리와 함께 경복궁으로 쳐들어간 우범선은 막아서는 궁성 수비대장 홍계훈을 단칼에 베고 곤녕전으로 내달렸다.

그곳은 명성황후의 침전이었다. 궁내부대신 이경직도 우범선의 칼날에 목숨을 잃었다. 그날 밤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게 무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일국의 황후로서 있을 수 없는 죽음이었다.

참극은 그렇게 막을 내렸으나 세계 여론을 두려워한 일본은 정치적인 쇼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국제적 비난을 면하기 위하여 미우라 공사를 비롯한 50여 명의 사건 관련자들을 형식적으로 체포하여 본국으로 압송시켰다.

국민적 분노 앞에 우범선도 도저히 국내에 숨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일본으로 달아나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망명 중 그는 일본인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얻었다.

그가 바로 대한민국 정부수립 때 이승만 대통령에게 극진히 초대되어 와서 미개했던 한국의 농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세웠던 육종학의 대가 우장춘 박사였다.

우범선은 일본 망명 후 7년 만에 조선 조정에서 파견한 암살자 고영근의 손에 살해되었다. 생각이 깊지 못했던 젊은 시절 혁명가 우범선은 조국에 큰 죄를 지었지만 망명 시절 그가 뿌린 씨앗 하나는 위대한 과학자가 되어 조국에 큰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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