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철 한국기술금융협회 IT 전문위원독자들도 이집트 피라미드 등과 함께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불리는 바빌론의 공중정원에 대해 많이 들어봤으리라 생각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2600년 전인 신바빌론시대에 고대이라크 북부 사막지역에 세워진 산 모양의 정원인데, 높이가 매우 높아 멀리서 보면 공중에 떠 있는 정원처럼 보여 ‘공중정원’이라 불렸다. 당시의 왕이었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산이 많은 메디아에서 자라, 사막지역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아미티스 왕비를 위로코자 산 모양을 본뜬 정원을 만들었다는 것인데, 현대의 토목·개관기술로도 구현이
한병권 논설위원“빨리 빨리!”군 훈련 때나 듣던 이 말을 필리핀 관광지에서 현지인들에게서 듣고 필자는 실소(失笑)와 함께 아연실색했다. 필리핀에서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서두르며 ‘빨리 빨리’라고 해댔기에 그럴까. 오죽했으면 관광객을 인솔하는 외국인이 ‘빨리 빨리’를 외칠까 싶었다. ‘빨리 빨리 문화’가 이제는 한국민의 국민성인 양 오인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궁금함과 함께.논산훈련소에서 땀에 범벅된 몸을 씻으라고 해 훈련소 목욕탕에 들어섰을 때였다. 차례를 기다려 겨우 비누칠을 하자마자 조교는 말했다. “남은 시간 1분! 동작 봐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파란 가을 하늘을 연상시키는 고려청자의 비색(翡色). 세계 도자 가운데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고려청자는 어떤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신라시대 이미 중국의 ‘월주요(越州窯)’에서 초기 청자를 굽는 기술을 받았지만 청색의 유약을 쓰기 시작한 것은 북송(北宋)과의 교류부터다. 그 시기가 지금으로부터 약 1천년 전이다.송나라 여요(汝窯)는 허난성 임여현 여주(汝州)에 있었던 가마다. 고려 장인들은 여기에서 고급자기 유약을 전수 받았다. 여요자기는 은은한 담청색을 띠고 있으며 오늘날 세계적 평가를 받고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0월 26일은 안중근 의거 107주년이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1879~1910) 의사는 중국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사살했다. 오전 9시경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멈췄다. 이토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체프와 약 25분간 대화를 나눈 뒤, 의장대를 사열하고 각국 사절단의 인사를 받았다. 안중근은 이토가 10여보 떨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 3발을 쏘았고, 이토는 고꾸라졌다. 안중근은 저격 후 ‘코레아 우라!’(‘
전경우 작가/문화 칼럼니스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격의 없는 대통령으로 유명하다. 권위적이지도 않고 위엄을 뽐내지도 않는다. 소탈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상대를 배려한다. 얼마 전에는 워싱턴 국립흑인역사문화박물관 개관식에서 조지 부시 전 대통령과 흑인 가족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모습이 외신을 통해 전해졌다. 부시 전 대통령이 오바마의 등을 툭 치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자 흔쾌히 응했다고 한다. 미국 언론들은 놀랍고 좋은 일이라며 대통령도 우리와 똑같다고 호평했다. 지난해에도 오바마 대통령의 인간적인 모습이 전 세계에 전해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의 전승절 70주년 관련 기념행사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재개관식 참석 등 2박 3일간 중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했다. 박 대통령의 방중 기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의 한중 정상회담 등으로 인해 한국의 위상이 동남아에서 견고한 위치를 점했다는 외교적 평가를 받았다. 이번 외교적 활동은 앞으로 한중 간 더욱 긴밀한 소통을 이루는 계기가 됨으로써 북한의 도발 우려를 잠재우고, 한반도 평화 정착과 통일을 위한 실질적 준비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임은 국민들에게 기대를 주는 호작용(好作用)이다. 그 효과는
석호익 통일IT포럼 회장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초빙연구원 정부가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메디텔’을 활성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가운데 지난 10일 국내 최초로 한국형 ‘의료+관광+휴양’의 결합모델 즉, 병원과 건강 검진 센터‧치료‧휴양‧웰빙‧관광서비스의 결합모델인 제주 메디컬 리조트 ‘The WE 호텔’이 개장됐다. The WE 호텔은 현행 의료법상에서 허락된 부대사업 이외에, 제주도 조례로 정하는 부대사업을 할 수 있다는 제주특별자치도특별법의 특례 규정에 따라 제주 한라병원의 한라의료재단이 3년간 준비 끝에 설립됐다. The W
장순휘 국민행복운동협의회 사무총장 중국정부가 19일 개관한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안 의사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역사 내 플랫폼 바로 옆에 있는 귀빈용 대합실 일부를 개조해 만들어졌다. 기념관 입구는 하얼빈역의 옛 입구 모습을 축소한 모습으로 꾸며서 역사적 현장감을 생생하게 재현됐다.입구 외부 벽면에는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시간에 맞춘 ‘오전 9시 30분’에 고정된 대형 벽시계가 걸렸다. 안 의사의 의거의 시간을 영원토록 기억하자는 의미로 보이는 이 장식에서 중국의 세심한 배려를 엿볼 수 있다
만 나이로 서른 살의 청년, 안중근이 1909년 10월 26일 조선의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했던 중국 하얼빈 역 플랫폼 현장 바닥은 그 후 103년이 지나도록 붉은색 바닥 돌로 간단한 표시만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현장의 천장에 ‘안 의사 이등박문 격살 사건 발생지. 1909년 10월 26일’이라는 설명 문구가 걸려 있고, 현장이 훤히 내다보이는 역구내에는 중국정부가 세운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들어섰다.200㎡ 규모로 꾸며진 기념관에는 안중근 의사의 흉상을 비롯해 그의 일생과 사상을 담은 사진, 자료 등이
1. 씨튼연구원의 설립 역사한국의 다종교문화 속에서 종교 간의 대화의 필요성에 응답해 1994년에 설립된 씨튼연구원이 올해로 설립 스무 돌을 맞았다. 씨튼연구원의 설립은 1991년 10월 네덜란드의 한 베네볼렌시아(Benevolentia, 후에 포티쿠스(Porticus)로 재단 이름을 변경) 문화재단의 관계자 두 명이 방한해 한국 내 종교 간 대화프로그램 실시를 권유받으면서 시작됐다. 그 후 1993년 11월 동아시아 종교연구소 연합체 형성에 지도적 역할을 한 일본 난잔(南山) 대학교 종교문화연구소의 소개로 포티쿠스에서 종교대화 사
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서울 동대문에서 장충동로를 따라 차를 타고 가다 지금은 사라진 추억의 스포츠 명소를 바라볼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 장소는 동대문운동장과 장충체육관이다. 동대문운동장은 지난 2008년 도시 현대화 계획에 따라 철거됐고 그 자리에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와 시민 공원 설치 공사가 한창이다. 내년 3월 개관을 목표로 막판 단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는 우주선을 연상케 하는 환상적인 곡선과 조형미를 갖춘 초현대식 건물로 자리잡아가는 모양새다. 한동안 사람 키를 훨씬 넘는 펜스로
최경호 안산 감골도서관 관장 예로부터 사람들은 심신(心身)에 이로운 맑은 물을 마시기 위해 샘을 찾아왔다. 오늘날에는 정수기라는 샘을 통해 어디서나 편리하게 맑은 물을 마실 수 있지만 상수도 시설이 잘 갖추어지지 않았던 시절에는 펌프를 이용하여 맑은 지하수를 끌어 올려 마셔야만 했다.그런데 펌프질에 선행되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우선 한 바가지의 물을 펌프에 부어야만 했는데 그제야 비로소 펌프질에 따라 맑은 지하수가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한 바가지의 물을 ‘마중물’이라 한다.현대사회를 흔히 지식정보사회라고 한다. 그러나
김옥랑 꼭두박물관 관장 2010년 4월 29일은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 꼭두박물관이 개관한 날이다. 내가 꼭두를 만난 지 거의 40년 만이다. 꼭두를 수십 점 정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저 나의 소유물같이 느껴지더니, 꼭두가 좀 더 많아지면서 자연히 생각이 바뀌게 됐다. 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음미하고 누려야 할 소중한 자산으로 된 것이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꼭두박물관을 생각해 왔지만, 그제야 실행에 옮긴 것이다. 꼭두는 전통 상여에 속해 있는 나무 조각품을 일컫는 말이다. 꼭두의 종류는 다양한데, 용, 봉황, 그리고 인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다. 과거가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가 있을리 만무하고, 지금의 우리가 없다면 미래 또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 민족처럼 숱한 외세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지켜온 민족은 드물다. 인내와 끈기, 애국심으로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아직도 일본과의 역사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저질렀던 숱한 만행들과 수탈해간 문화재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아직도 우리 앞에 산재한 이런
일본의 독도 침탈 야욕이 극에 달하고 있는 시점에서 서울에 첫 독도체험관이 문을 열어 화제다. 비록 지하에, 그것도 셋방살이로 들어서긴 했지만 독도에 대해 제대로 알리기 위해 개관했다는 자체만으로도 환영할 만한 일이다. 독도체험관이 위치한 곳은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임광빌딩으로 동북아역사재단이 자리한 곳 지하다. 동북아역사재단에 따르면 체험관 건립 상업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 왔지만 실제 건립 예산이 집행된 것은 지난해 12월로 광화문로, 신문로 등에 체험관 후보지를 검토했지만 예산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광화문이나 청계천, 시
김옥랑 꼭두박물관 관장 1994년에 국내 최초의 디지털 음향시스템을 갖춘 300석 규모의 영화관을 두 곳에 설립했다. 그리고 이 영화관은 1996년 11월에 문화체육부로부터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공식승인을 받았다. 예술영화 전용관을 열기까지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예술영화를 따로 수입을 하기 이전이어서, 무엇이 예술영화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웠을 정도였다. 1995년부터 영화사 백두대간과 손잡고 운영을 하기 시작했으나, 그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동숭은 돈만 댈 뿐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직원들 사기에도 문제가 생기
김옥랑 꼭두박물관 관장 국내 최초의 예술영화전용관 ‘동숭시네마테크’는 남다른 선정 기준을 고수하면서 국내 예술영화 상영을 선도했다. 높은 수준의 프로그램 덕분에 영화계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경영 현실은 쉽지 않았다. 예술영화의 관객층이 두텁지 않았기에 날이 갈수록 쌓이는 적자는 도무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며, 한편으로는 예술영화 프로그램의 한계라는 어려움도 있었다. 어려움 끝에 1994년에 이르러 250석 규모의 상영관 두 개가 문을 닫게 되었다. 2000년 8월 여전히 많은 어려움과 현실적인 문제
김옥랑 꼭두박물관 관장 개인의 힘으로 동숭아트센터를 운영하면서 종종 경영의 한계에 부딪혔고, 고민 끝에 동숭홀에서 영화를 상영했던 시기가 있었다. 500석 규모의 공연장이었던 동숭홀이 공연뿐만 아니라 영화 상영도 가능하게끔 설계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1995년 동숭시네마텍이라는 이름의 예술영화전용관을 따로 열게 되고 영화관의 인지도도 높아지면서, 동숭홀을 순수 공연장으로 환원하겠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공간의 용도만 변경한 것이 아니라 이와 연계하여 자체 제작한 연극 ‘어머니’를 무대에 올렸다. 동숭아트센터
김옥랑 꼭두박물관 관장 개인의 힘으로 문화공간을 운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그동안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다. 동숭아트센터를 개관한 이후 적지 않은 세월을 보내는 동안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났으나 나 혼자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운영을 유지할 수 있는 수익이 나질 않았고, 지원을 받을 곳은 아무데도 없었기 때문이다. 돈을 벌 수 없는 일만 골라서 하니,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오해를 사기도 했고 남편조차 내가 왜 그런 일을 하는지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런 와
김옥랑 꼭두박물관 관장 동숭아트센터라는 문화공간을 운영하는 동안, 점차 예술 지원의 방법론에 관한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예술 지원은 예술 경영과 분명한 구분이 필요하며 명분과 원칙이 요구됨을 깨닫게 된 것이다. 80년대 후반에는 지원을 하는 쪽이나 받는 쪽 모두가 서툴렀다. 예술가들은 지원받는 상황을 어색해 하고 불편해 했으며, 나 역시 지원하면서도 그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 회의가 든 적이 많았다. 그때까지는 사실상 상하의 위계질서 속에서 지원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평등한 관계에서 호혜적으로 이루어지는 지원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