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랑 꼭두박물관 관장

개인의 힘으로 문화공간을 운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그동안 여러 차례 이야기하였다. 동숭아트센터를 개관한 이후 적지 않은 세월을 보내는 동안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났으나 나 혼자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운영을 유지할 수 있는 수익이 나질 않았고, 지원을 받을 곳은 아무데도 없었기 때문이다. 돈을 벌 수 없는 일만 골라서 하니,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오해를 사기도 했고 남편조차 내가 왜 그런 일을 하는지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런 와중에 남편이 영화 사업을 권유하였는데, 아마도 영화가 돈이 된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다. 제안을 듣고 정작 내가 몰두한 부분은 어떻게 하면 영상을 통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예술영화였다. 선정적인 장면으로 사람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영화가 아니라, 삶에 힘이 되고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영화가 막상 눈에 쉽게 띄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 ‘백두대간’의 이광모 감독이 예술영화 필름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서로 의견을 나누고는 뜻이 맞아 예술영화관을 같이 운영하기로 손을 잡았다. 그렇게 해서 동숭아트센터 안에 만들어진 것이 국내 최초의 예술영화전용관인 ‘동숭시네마테크’다.

그러나 250석 규모의 상영관 2개를 마치 백두대간에서 혼자 운영하고 나는 돈만 댈 뿐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직접 해외 마켓에 나가 필름을 구해 와서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주일 동안 70여 편이 넘는 영화를 보고 나도 건질 수 있는 것은 겨우 한두 편 정도였고, 사왔다고 해서 그 영화가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더군다나 그때는 아직 예술영화 마니아층이 만들어지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언론에 내가 예술영화를 한다고 보도되자, 돈을 벌라고 영화관 사업을 지원했던 남편과 그 주변에서는 큰 난리가 났다. 나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수지를 맞추면 된다고 남편을 설득했다. 사업에 매진해도 시간이 부족할 판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는 것도 내겐 중요했다. 당시 나는 마치 문화 전사처럼 살았다. 정신적으로 고독하고 외로운 날들이 이어지면서 신념은 굳어졌지만, 또 그만큼 신경은 예민해지는 터라 심신에 피로가 쌓이고 갑상선에 이상이 생기기도 했다. 결국 갑상선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수술을 받고 누워있는 와중에도 어떻게 이 문화공간을 잘 운영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었다.

그동안 일반 극장들이 돈벌이가 안 된다고 기피했던 세계영화제 수상작과 문제작, 그리고 단편영화 등이 동숭시네마테크를 통해 상영되면서, 관객들은 이전보다 훨씬 수준 높고 다양한 영화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사회에 이런 영화관이 적어도 하나쯤은 필요하다는 생각에, 문화운동의 차원에서 어느 정도 적자를 감수하면서 시작한 사업이었다. 다행히 개관 1년이 지나면서 회원만 3천 명에 달했고 좌석점유율도 안정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후 예술영화전용관은 ‘하이퍼텍 나다’로 명맥을 잇게 된다. 최근에는 학창 시절 동숭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즐겨보았다는 분을 만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어쩌면 그런 작은 즐거움 때문에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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