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파란 가을 하늘을 연상시키는 고려청자의 비색(翡色). 세계 도자 가운데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고려청자는 어떤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신라시대 이미 중국의 ‘월주요(越州窯)’에서 초기 청자를 굽는 기술을 받았지만 청색의 유약을 쓰기 시작한 것은 북송(北宋)과의 교류부터다. 그 시기가 지금으로부터 약 1천년 전이다.

송나라 여요(汝窯)는 허난성 임여현 여주(汝州)에 있었던 가마다. 고려 장인들은 여기에서 고급자기 유약을 전수 받았다. 여요자기는 은은한 담청색을 띠고 있으며 오늘날 세계적 평가를 받고 있는 최고의 자기다.

12세기 송나라 휘종황제는 고려에 파견되는 한 사신에게 수도 개경의 풍속도를 그려 바치라고 명한다. 당시 어명을 받은 관리는 비로 서긍(徐兢)이라는 사람이었다. 서긍은 약 1개월 개경에 머물면서 느끼고 체험한 것을 그림과 함께 기술하여 ‘고려도경’이라는 이름으로 황제에게 진봉했다. 이 책은 기록이 없는 12세기 고려시대 제도와 풍속 생활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서긍은 서문에서 고려를 오랑캐라고 지칭하는 등 비하했지만 놀라운 눈으로 바라본 것들이 많았다. 고려 군사들의 대오와 예의범절이 확립된 선비들의 자세에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비색의 청자를 보고는 그 정교함에 감탄한 것이었다.

“도자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 사람들은 비색(翡色)이라고 부른다. 근년에 와서 만드는 솜씨가 교묘하고 빛깔도 더욱 예뻐졌다. 술 그릇의 모양은 오이와 같은데, 위에 작은 뚜껑이 있고 연꽃이나 엎드린 오리 모양을 하고 있다…(하략)”

이 시기 송나라에 태평노인이란 학자가 있었다. 그가 지은 ‘수중금(袖中錦)’이란 책에는 고려청자의 비색을 더 높게 평가했다. 최고의 산품이며 절대 모방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건주(建州)의 차, 촉(蜀)의 비단, 정요(定窯)의 백자, 절강(浙江)의 차 등과 함께 고려비색(高麗翡色)은 모두 천하제일이다. 다른 곳에서는 따라 하고자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

태평노인의 고려청자에 대한 감탄 때문이었을까. 송(宋)나라 왕실은 다량의 고려청자를 수입하여 애완하고 사용했다. 남송의 수도 절강성 항저우(杭州) 유적에서 고려청자가 집중적으로 발굴된 것은 이들의 얼마나 청자를 갖고 싶었나를 입증하는 증거다.

필자는 지난 90년대 중반 일본 오사카의 유명한 원로 도자예술가 댁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전시관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바로 고려청자를 닮은 비색의 도자기들이었다.

예술가는 작품을 설명하면서 평생 자기를 빚어 온 결과 종착지는 비색의 청자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작품이 고려청자의 높은 예술성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최근 중국 도자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고려청자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필자가 얼마 전 만난 원로 유명 도자감정가는 고려청자의 예술성이 중국이 최고라고 꼽는 여요자기보다 우수하다고 솔직한 대답을 했다. 한국의 전통 문물을 얕잡아 평가하는 중국의 전문가들이 왜 이런 후한 점수를 주고 있을까.

고려청자를 굽던 관요는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에 있다. 이 지역은 세계도자문화를 대표하는 비색 고려청자가 탄생한 성지다. 그런데 강진 청자박물관은 현재 군립박물관으로 국가적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군립박물관의 국립승격이 군민들의 해묵은 숙원이다. 정부나 문화재청이 왜 이리 인색한 것인지. 이들 유적은 사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도 손색이 없다. 보물을 보물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문화적 장애가 아닐까.

내년 2017년은 ‘남도답사 1번지 강진 방문의 해’라고 한다. 강진군은 내년에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고려청자 박물관 개관20주년 특별전도 열린다. 전 국민의 가슴속에 세계의 자랑, 고려청자예술의 혼이 살아났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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