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빨리 빨리!”

군 훈련 때나 듣던 이 말을 필리핀 관광지에서 현지인들에게서 듣고 필자는 실소(失笑)와 함께 아연실색했다. 필리핀에서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서두르며 ‘빨리 빨리’라고 해댔기에 그럴까. 오죽했으면 관광객을 인솔하는 외국인이 ‘빨리 빨리’를 외칠까 싶었다. ‘빨리 빨리 문화’가 이제는 한국민의 국민성인 양 오인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궁금함과 함께.

논산훈련소에서 땀에 범벅된 몸을 씻으라고 해 훈련소 목욕탕에 들어섰을 때였다. 차례를 기다려 겨우 비누칠을 하자마자 조교는 말했다. “남은 시간 1분! 동작 봐, 빨리 빨리!” 목욕탕에 들어온 지 수분도 채 되지 않은 훈련병들은 또다시 얼차려를 받지나 않을까 전전긍긍이었다. 필자도 비누거품조차 제대로 닦아내지 못했다. 급히 밖으로 뛰어나와 기다리고 있던 훈련병 행렬에 들어가 줄을 서야 했다. 동시에 겉모습만 번드레하기 일쑤였던 군대행정이 떠올랐다. 상급부대 검열을 앞두고는 군 막사며 탱크며 각종 장비에 페인트칠하기에만 바빴다. 각종 무기의 제 기능 작동여부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겉모양만 그럴 듯하게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당초 보급담당 병사는 자동소총 개수가 모자란다며 울상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숫자를 채웠는지 검열은 별 탈 없이 지나갔다. 나중에 물어보자, “다 ‘까라’야, ‘까라’”라며 그 병사는 씨익 웃었다. ‘까라’는 ‘가짜’라는 말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었다. 그랬다. 당시 군대행정은 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전시행정(展示行政)이었다. 지금도 가끔씩 대형 방산비리가 터져 나온다. 툭하면 겉치레식 날림공사와 무책임한 행정이 원인이 돼 큰 참사가 일어난다. 그럴 때마다 생각하게 된다. 모두 60년대, 70년대 혹은 그 이전 일제 때 ‘까라’ 투성이 군대문화의 유산이라고. 그 낡고 부패한 군대문화가 족쇄가 돼 발전하는 선진 한국의 발목을 아직도 잡고 있다고. 부끄럽다고. 뉴스를 보던 필자는 불쑥 “다들 영화 ‘타워링’도 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됐다.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현장. 소방안전점검부터 형식적인 셀프점검. 대부분의 스프링클러가 먹통. 지독한 안전불감증을 말해주듯 비상구는 폐쇄. 문 앞에 떡하니 가로막고 서 있는 수납창고. 소방차가 들어갈 진입로에 가득한 불법주차 차량들. 제대로 펼쳐지지 않은 소방대 구조사다리차. 작동되지 않은 화재경고 벨. 방화벽을 쌓지 않은 층과 층 사이. 가연성 외장재에 불이 붙어 불길이 실내로 들어올 때 소화기는 모두 작동불능. 화재경보기가 설치조차 돼 있지 않은 2층 여성 목욕탕 내부. 탈출하려고 해도 작동되지 않는 자동문. 아무도 유리창을 깨고 구조해주지 않았던 골든타임…’ “수원 광교신도시 오피스텔 공사장 화재는 용접·용단 작업을 하다 단열재로 불꽃이 튀어 벌어진 참사였다. 가연성 소재가 가득한 실내에서 불꽃작업을 하다 빚어진 화재 참사는 동탄 메타폴리스 상가(2017년), 고양종합터미널(2014년), 서이천물류창고(2008년) 화재와 판박이였다.”

“화재 때에는 (시장보다) 내가 더 윗사람이오.”

몸을 아끼지 않고 화마(火魔)와 사투를 벌인 정의로운 소방대장 마이클로 분한 스티브 맥퀸이 날린 명대사다. 글라스타워 개관파티에서 던칸 사장으로 분한 윌리엄 홀덴은 “당신 상관인 시장이 참석한 자리이니 소란 떨지 말라”며 참석자들을 대피시켜야 한다는 소방대장의 말을 묵살한다. 연인과 파티에 참여한 건물설계자 로버츠로 분한 폴 뉴먼도 항의와 함께 당장 파티를 중단하라고 소리쳤다. 부실자재를 사용해 스프링클러가 작동하지 않고 방화벽에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한 데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건물주는 파티를 강행하다 엄청난 참상을 빚는다. 1970년대 한국의 대연각 화재 사고를 모티브로 했다는 영화 ‘타워링’. 135층 건물 개관일에 화재가 발생한다. 건축비를 아끼려고 건축설계와 달리 규격미달의 전선을 사용해 일어난 누전이 원인이었다. 대연각 화재는 1971년 크리스마스에 충무로에서 발생해 사망자만 163명이었던 화재 사고였고, 타워링은 1974년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시점에도 한국은 어이없는 인재(人災)를 반복하고 있다. 세월호 사고, 영흥도 낚싯배 사고,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감염 사망, 각종 화재사고 등이 우리를 절망하게 한다. 안전관리가 부실하게 이뤄진 탓에 대형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평소 비상구 스프링클러 소화기 등 재난대비 시설을 세심히 살피고 소화시설 사용법도 잘 익혀두어야 하겠다. 민방위훈련도 전시행정이 안 되도록 내실을 기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 각자의 선진 안전의식이 아닐까 싶다. 소 잃고 나서 후회할 게 아니라 경각심을 갖고 외양간부터 고쳐놔야 하겠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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