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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윤문거(尹文擧)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하기 4개월 전인 1636(인조 14)년 8월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조정(朝廷)은 주화파(主和派)와 척화파(斥和派)로 대립됐다. 석호(石湖)의 부친 윤황(尹煌)은 척화의 주창자(主唱者)였으며 그 또한 척화를 주장하는 계차(啓箚)를 올렸다가 체직(遞職)되었다. 그 이후 10월에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이어서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으나 결국 그 해 12월 병자호란이 발생하였다.

이와 관련해 윤문거는 병자호란 때 부친을 따라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갔는데 결국 인조(仁祖)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淸太宗)에게 항복을 한 이후 청은 척화의 주모자(主謀者)를 압송하라는 요구를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석호는 상소하여 척화신(斥和臣)으로 지목된 부친을 대신하여 청나라에 가기를 청하였으나 인조는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병자호란이 종식된 이후 윤문거는 병조(兵曹)의 낭관(郎官)이 되었으며 정언(正言)을 비롯하여 수찬(修撰), 교리(校理)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38(인조 16)년 순검사의 종사관으로 삼남 지방의 수군을 시찰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부친의 상을 당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상복을 벗은 이후 금산에 은거하였는데 여기에서 임천에서 유배생활을 마치고 금산에 있던 유계(兪棨)를 만나게 되었다.

윤문거는 이후에도 여러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제천현감(堤川縣監)과 동래부사(東萊府使) 같은 외직(外職)에는 부임해도 내직(內職)에는 일체 나아가지 않았으니 당시 그의 결의가 대단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제천현감은 1643(인조 21)년에 부임하여 2년 동안 관직을 수행하였는데 요역을 덜어주고 유학을 진흥시켰으며 또한 제방을 수축하고 농업을 권장하는 등의 치적을 남겼다.

한편 2년 동안의 관직생활을 마치고 다시 낙향한 이후 발생한 ‘황지의 변’이 일어났을 때 김충립(金忠立)이 이를 윤문거에게 알렸으며, 석호는 김충립으로 하여금 관청에 고발하게 하여 주모자(主謀者)가 체포되었다. 윤문거는 이러한 반란이 평정된 이후 그 공로를 인정받아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에 올라도 이를 사양하였으나 면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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