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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병(餠) 중에 찐 것을 증병(蒸餠), 구운 것을 소병(燒餠), 기름에 튀긴 것을 유병(油餠), 국물에 삶은 것을 탕병(湯餠)이라고 불렀다.

증병(蒸餠)은 취병(炊餠)으로 부르기도 했다. 송(宋)대 조언위(趙彦衛)는 ‘운록만초(雲麓漫抄)’ 권2에 “이여인종어명동음(以與仁宗御名同音) 인종(仁宗)의 이름과 발음이 같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송 인종의 이름은 조정(趙禎)이다. ‘청상잡기(靑箱雜記)’ 권2에는 “인종의 묘휘(廟諱)인 ‘정(禎)’을 자칫 잘못 발음하면 증(蒸)과 비슷해 지금 내정(內庭)의 상하에서 모두 증병(蒸餠)을 취병(炊餠)으로 부른다”고 설명했다. ‘수호전(水滸傳)’에서 무대랑(武大郞)이 팔았던 취병(炊餠)이 바로 증병(蒸餠)이다. 

​취병(炊餠:추이빙)은 만두와 맛이 비슷한 찐빵으로, 그 모양이 마치 꽃이 핀 듯하다고 한다. 무대랑(武大郞)이 처음 만들었다고 하여 ‘무대랑 취병(武大郞 炊餠)’이라 부른다.

인종(仁宗) 때에 궁녀들이 정월(正月)을 시월(始月)이라 하고 증병(蒸餠)을 취병(炊餠)이라고 한 것이 모두 이런 유(類)이니, 이후로는 다만 정명(正名)만을 휘(諱)하고 혐명(嫌名:임금이나 아버지의 이름과 음이 흡사한 것)이나 구명(舊名)은 휘하지 말도록 하소서”라고 했다. 

1700년대 초반 ‘음식보(飮食譜)’에 의하면 이 취병이라는 떡은 본디 ‘증병(蒸餠)’이었다고 한다.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제4권 만물문(萬物門) 조고(棗糕)는 ‘예원자황(藝苑雌黃)’에 “한식(寒食)날 밀가루로 증병(蒸餠)처럼 만들어 대추를 뭉쳐 붙인다”고 했다. 지금 우리나라 풍속에도 또한 이를 증병이라고 하는데, 팥가루로 소를 넣고 겉에 대추로 붙인 것은 고명(糕銘)이라 한다고 나온다.

조선 선조조(宣祖朝)에 내의(內醫)였던 퇴사옹(退思翁) 양예수(楊禮壽, ?~1597)가 쓴 ‘의림촬요(醫林撮要)’에 ‘증병(蒸餠)은 곧 밀가루로 찐 떡(小麥末蒸餠)인데 민간에서는 쌍화병(雙花餠)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상화병(霜花餠)은 밀가루에 술을 넣고 반죽해 발효시킨 다음 그 안에 팥이나 깨, 고기, 나물을 넣고 둥글게 빚어 찐 음식이다.

조선 숙종 때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이 청나라를 다녀온 사행(使行) 일기인 ‘연행일기(燕行日記)’에 “유박아(柔薄兒)란 우리나라의 상화떡처럼 만든 것인데, 밀가루를 써서 우리의 만두처럼 가장자리가 쭈글쭈글하다”고 적혀 있다. 

조선 말엽 황필수(黃必秀, 1842~1914)가 쓴 ‘명물기략(名物紀略)’에 상애라 했고, 부풀어 오른다는 뜻에서 기수(起溲), 기주떡 외에 찌는 떡으로 분류해 증고(蒸餻), 증병(蒸餠)이라고 적혀 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1818년 귀양살이하면서 쓴 ‘목민심서(牧民心書)’에 칙사(勅使) 접대를 지칙(支勅)이라 하는데 지칙 때 ‘증병(蒸餠)’을 상(床)에 올렸다고 한다.

조선 임금들의 직무를 반성하면서 왕이 하루하루 쓴 ‘일성록(日省錄)’ 정조(正祖) 10(1786)년 8월 8일 칙사의 유제(諭祭) 때 제물(祭物)로 ‘증병(蒸餠)’이 올려졌으며, 1865년 12월부터 1866년 사이에 각 관아에서 시행하던 모든 조례와 ‘대전회통’에서 빠진 여러 관사의 시행규정을 모아 육전으로 분류하여 편집한 ‘육전조례(六典條例)’에  ‘중국사신이 오면 예빈시(禮賓寺)에서 ‘상화(霜花)’를 만들어 대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正祖) 19년 1795년 6월 18일 자궁(慈宮)에게 진찬(進饌)한 음식 중에도 ‘증병(蒸餠)’을 올렸다. 

조선시대 후기 농학가문의 문신인 보만재(保晩齋)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이 집필한 ‘고사십이집(攷事十二集)’에 我國蒸餅,以豆屑和蜜爲塊,米麫裹其外,切乾棗,柿,栢子縱橫鏤文,酒醇以起之。此餠其來最古。《齊民要術》曰,餢鍮起餠也。發酵使麫輕高浮起炊之。賈公彦以爲起膠餠也。蜀人呼蒸餠爲鎚,李萼詩所謂“拈鎚舐指不知休”是也。《本草綱目》云,和脾胃及三焦,甚易消化。

우리나라의 증병은 콩가루에 꿀을 섞어 반죽을 만들어 쌀가루로 감싸서 자른 말린 대추와 감과 잣알을 가로세로 무늬로 박아 순주를 써서 부풀린 떡이다. 이 떡이 제일 오래 전에 만든 것이다. ‘제민요술’에 이르기를 부유 ‘중국 남북조 시기 떡’는 기병 ‘부풀린 떡’이라고 했다. 발효시켜 밀가루가 살짝 부풀면 만들어 먹었다. 가공언 ‘당나라 학자’은 이를 ‘기교병’이라 했다. 촉나라 사람들은 증병을 ‘추’라고 불렀는데 이약 ‘당나라 시인’의 시에 “추 ‘떡’를 집어 핥으니 멈출 줄 모른다고 손가락질 하는구나”라고 한 것이 이를 가리킨다. ‘본초강목’에 이르기를 증병은 비장과 위 그리고 삼초를 화기롭게 하여 특히 소화를 잘 시킨다고 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증병(蒸餠 증편)은 너무 시게 만들지 말고’라 했고, 1670(현종 11)년경 정부인 안동 장씨(貞夫人 安東 張氏)가 쓴 조리서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1809(순종 9)년 빙허각(憑虛閣) 이씨(李氏)가 엮은‘규합총서(閨閤叢書)’에  증편(蒸餠) 조리법이 나온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1946년 편찬한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에서 ‘멥쌀가루에 술을 넣고 질게 반죽한 것으로 더운 방에서 하루 동안 피어오르게 한 후 시루나 솥에 넣어 쪄내는 떡이라고 했다. 증편에 밤과 대추, 잣, 곶감, 석이버섯 등의 고명을 올려 색에 맞추어 쪄내기도 하는데 이는 상화를 고급화한 우리나라의 사치품이다’라고 했다.

증편(蒸餠)인 술떡은 예전에는 주로 음력 6월 15일 유두절(流頭節)에 먹었는데 술을 넣어 발효시켰기 때문에 여름철에 쉽게 상하지 않는 장점도 있는 한편으로 밀가루를 발효시킨 상화(霜花)를 대신하기 때문에 본래 밀의 수확철인 초여름에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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