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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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선생은 18세기 말 조선의 진정한 한류였다. 20대 초반에 이미 천재적인 지식으로 청나라 학자들 사이에 이름이 회자됐다. 대학자 옹방강은 처음 만난 젊은 추사를 필담으로 대면하고 ‘동국 제일가는 경학자’라고 칭찬했다. ‘조선의 젊은이들이 이 정도면 나이 든 학자들은 과연 어떠할까.’

추사는 일찍부터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학문을 펼치고 싶었다. 중국을 다녀온 후에도 계속 연경을 찾아가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를 원했다. 그러나 이 꿈은 정적들의 참소로 죽을 때까지 이루지 못했다.

필자는 전국에서 수선화 꽃 축제가 열리던 지난 5월 중순 뜻밖에 추사의 묵적인 ‘창해등룡(蒼海登龍)’이라는 예서 글씨 한 점을 고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창해’란 조선시대 동해를 지칭한 용어다. 바다를 힘차게 차오르는 용을 지칭한 글이다.

필자가 지금까지 공부한 추사의 예서 가운데 가장 힘찬 묵적이었다. 청나라 스승 옹방강을 흠모해 새긴 보담재(寶蘇齋)라는 인장이 찍혀있어 우물 안 개구리 식 조선을 떠나 대륙으로 날고 싶었던 것이다.

수선화는 선생이 지극히 사랑한 꽃이다. 추사는 사실 난(蘭)을 즐겨 그리지 않았다. ‘난을 그리기가 어렵고 훌륭한 인격을 지니지 않고서는 그릴 수 없다’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주위에서 묵란화 한 점을 부탁하면 정중히 사양했다. 제자였던 대원군 이하응이 난을 잘 친다고 그에게 보내기도 했다. 추사의 묵란화가 귀한 것은 이 때문이다.

적소 제주도에서 추사는 울타리 안에서 자유가 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데 그를 반겨 맞이 해주는 것이 뜰아래 자생하는 수선화였다.

날씨는 차가워도 꽃봉오리 둥글둥글 / 그윽하고 담백하여 감상하기 그만이다 / 매화나무 고고해도 뜰 밖 나기 어렵지만 / 맑은 물에 핀 수선화 해탈신선 너로구나(一點冬心朶朶圓 品於幽澹冷雋邊 梅高猶未離庭砌 淸水眞看解脫仙) - 완당집

‘해탈한 신선’이라고 이름까지 붙여주며 수선화를 연인처럼 보듬었다. 추사가 수선화에 대해 애착을 가진 데는 이유가 있다. 선생이 존경했던 송나라 말기 시인은 학문과 서화에 뛰어났던 바로 이재 조맹견(彝斋 趙孟堅)이었다. 그는 몽골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저장성(浙江省)에 은거,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바로 은둔해 사는 삶 속에서 반려로 삼은 꽃이 수선화였던 것이다.

추사의 흠모는 바로 조맹견의 훌륭한 인격과 이민족의 침공으로 나라를 잃었어도 굴복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정신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아무 보살핌 없이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수선화를 보고 조맹견의 환생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추사는 특별한 죄도 없이 모함을 받아 10년간이나 적소에서 보냈다. 그의 학문 탐구에 대한 의지와 열정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온갖 고난 속에서도 목숨을 지키고 62세가 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수선화의 끈질긴 의지를 마음속에 새겼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은 새 정부 출범 이후 처음 맞는 현충일. 국가를 지키다 산화한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날이다. 수선화 같은 의지로 수천년 고난을 극복해온 우리 민족. 대한민국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자랑스러운 선진국가가 됐다.

온상에서 자란 수선화는 연인들 사이에 진정한 사랑의 의미로 주고받는 꽃이 되고 있다. 지방의 한 도시는 7월 꽃 축제를 하면서 수선화 꽃길을 조성한다고 한다. 추사를 생각하면 수선화를 대하는 의미가 남다르게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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