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면 천지일보 편집인.
이상면 천지일보 편집인.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이 말은 누구의 말인가를 따지기 전에 진리라 함이 옳다. 왜일까. 지나온 역사 속엔 반면교사 즉,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나간 역사를 통해 오늘과 내일의 미래를 열어 줄 청사진이 담겨 있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지즉위진간(知則爲眞看)”이라 했다. 이는 ‘내가 참으로 알 때 비로소 보인다’는 이면적 차원의 뜻이 담겨 있다. 즉, 역사가 남긴 문화재(문화유산)를 진정 알고 깨닫기 위해선 그 역사의 진면목을 온전히 알고 난 후에 문화재를 바라볼 때, 진정 그 역사가 남긴 문화재의 참된 의미가 비로소 보인다는 뜻이다.

요즘 최대 이슈가 있다면 ‘청와대(靑瓦臺) 개방과 용산 이전’일 것이다. 그리고 청와대 개방과 용산 이전 이슈는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돼 있다. 나아가 숨죽이며 지켜보게 하는 신구권력의 힘겨루기가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먼저 이 일에 대한 필자의 소회부터 밝히고 싶다. 한마디로 청와대 개방과 용산 이전은 때가 되어 진행 될 수밖에 없는 필연이며 역사적 소명이며 신정권의 사명이 틀림없다고 봐진다.

단재 선생이 남긴 말을 생각하면서 우리 민족이 걸어온 영욕(榮辱, 영광과 치욕을 아우르는 말)의 역사, 그 가운데서도 오욕(汚辱, 명예를 더럽히고 욕 되게 함)의 역사의 필름을 되돌려 보자.

청와대는 고려(숙종 때)시대부터 궁궐이 자리하고 있던 자리다. 물론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궁궐의 옛터가 너무 좁아 남쪽에 궁궐을 지은 것이 바로 경복궁이다. 조선왕조가 남쪽에 경복궁을 확장했으나 후원격인 청와대 터는 계속 왕실 부지로 남아 있었다. 결국 청와대 터 역시 예부터 내려오던 왕궁 터라는 점이다.

이 왕궁 터(청와대)는 구한 말 1910년 일제가 강제 합병한 후 경복궁을 훼손해 나갈 때 옛 왕궁 터 역시 일부를 제외하곤 철거되는 운명을 맞았다. 더욱이 1942년에는 중일전쟁에서 전사한 일본군의 유골을 이곳에 보관하던 곳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 청와대 터는 일제가 경복궁 건물을 철거한 뒤 조선 총독 관저를 세웠으며, 이때 보천교(증산도) 본당의 화려한 청기와(靑瓦)를 옮겨 지붕을 설치했다고 하여 오늘까지 ‘청와대(靑瓦臺)’라는 이름이 내려오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구한 말 조선 총독관저는 중구 예장동에서 경복궁 안으로 옮겨졌고, 다시 현 청와대 터로 옮겨 신축).

해방이 되자 미 군정 사령관인 하지 중장의 관저로 사용됐다.

그 후 이승만 대통령에서부터 시작해 문재인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그 터를 이용해 왔으니 이 어찌 지나온 역사를 잊어서 되겠는가.

이를 의식해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들(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문재인 등)은 치욕의 자리를 벗어나고자 애를 썼지만 늘 현실이라는 벽을 핑계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또 한 가지 잊어선 안 될 역사는 바로 용산기지다. 어쩌면 이 용산(龍山)은 지명에서부터 심상치 않다. 나아가 지형적으로도 인왕산 안산으로 뻗어 지맥의 한 줄기가 만리재와 지금의 청파동을 거쳐 한강까지 이어지는데 그 형상이 용의 모습과 닮아 용산이라 칭하게 됐다.

이 대목에선 이해를 돕기 위해 이면적 사실을 고찰해 봐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성경에 보면 용(龍)은 하나님을 대적한 사단과 마귀에 비유한다(계 20:2). 이를 다르게 해석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을 선민(選民)이라 한다면, 이를 대적하는 상대는 곧 이방(異邦) 내지 이방 왕 이방 나라가 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 용산은 그야말로 용산이다. ‘비산비야(非山非野) 인산인해(人山人海)’라 했으니, 이방 즉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해 온 이방군대가 주둔해 왔던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고려 말 몽골군, 조선 시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나라 군대, 구한 말 임오군란 계기로 들어와 러일 전쟁 등을 위해 일본은 아예 용산을 군용지로 강제 수용했으며, 광복 후엔 대한민국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용산으로 이전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또 다시 용산은 미군이 주둔하게 됐고 오늘에 이르렀다.

용산은 그렇게 이방 군대(외국 군대)의 주둔지로 이어오다 1990년 6월 한미 정부가 용산기지를 이전하는 내용의 기본합의서와 양해각서를 체결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예고했다.

그리고 오늘의 정치 이슈로 새롭게 부각됐으니, 이는 ‘신의 한 수’며, 섭리 가운데 찾아온 회복의 기운이 이 한반도에 불어오는 까닭이 아닐까 생각된다.

청와대와 용산, 민족의 영욕의 역사 가운데 가장 비참한 오욕의 역사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는 정치적 이해득실을 떠나 우리 민족 앞에 다가오는 새로운 기운을 여는 첫 단추라 생각해야 한다.

무슨 일이든 누군가 시작하는 사람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법, 우리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는 절호의 기회임을 깨닫고 지혜와 양보를 바탕으로 찾아온 회복의 기회를 함께 만들어 가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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