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이제철 풍산화동양행 대표 속리산, 내장산, 경주 기념주화(2019년)한국은행은 우리나라 자연환경의 아름다움과 생태 보전의 미래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기념주화를 발행하였는데 2017년 ‘지리산’ ‘북한산’을 시작으로 약 7개년에 걸쳐 발행할 계획을 수립하였다.2019년 세 번째 시리즈로 속리산, 내장산, 경주를 11월 14일에 발행하였다.▶ 속리산앞면 도안은 문장대와 정이품송을 묘사하였다. 문장대(1054m)는 속리산을 대표하는 고봉 중 하나로 화강암의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운장대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경기도 김포에 있는 장릉(章陵)은 왕세자가 아니었으나 추존 왕이 된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쌍릉이다. 원종은 인조의 아버지로서 선조의 5남이자 어머니 후궁 인빈 김씨의 3남으로 태어났다. 1619(광해군 11)년 정원군의 신분으로 세상을 뜨니 이듬해 양주 곡촌리(현 남양주시 금곡동)에 묻혔다. 1623년 아들 인조가 즉위하니 대원군이 됐다. 1626(인조 4)년에 부인 구씨(계운궁)가 세상을 뜨니 김포 육경원에 안장했고, 이때 대원군의 무덤을 흥경원으로 명했다. 이듬해 육경원으로 옮겨 합치고 흥경원으로 통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태릉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의 능이다. 태릉은 여느 왕후의 무덤과 달리 웅장할 뿐만 아니라 왕후의 무덤임에도 중국의 황제처럼 ‘태릉(泰陵)’의 묘호를 가졌다. 문정왕후는 봉은사 주지 보우와 의논해 장경왕후의 곁에 있던 남편 중종의 무덤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자신이 그 곁에 묻히고자 했다. 그러나 아들 명종은 왕후를 태릉에 묻었다. 문정왕후는 중종, 인종, 명종 대를 거치며 27년간의 왕비와 8년의 수렴청정, 21년의 대비의 역할을 하며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왕후는 전임 단경왕후나 장경왕후와 달리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조선 최고의 세도가 딸로, 20세에 왕비에 이른 듯하더니 7일 만에 궁궐에서 쫓겨난 단경왕후. 왕과 결혼해 10여년 만에 왕자를 낳았으나 엿새 만에 25세로 세상을 뜬 장경왕후. 중종과 부부의 연을 오래 잇지 못한 왕후들이다. 조선 왕후들은 최고의 권세와 부귀를 누리는듯하다 이내 허망하게 사라진 경우가 흔했다. 집안 배경과 처세, 그리고 권력의 어느 하나가 못 미치면 왕후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단경왕후는 남편 중종이 왕이 되었으나 신하들에 의해 강제로 생이별을 했다. 아무 잘못도 없이 쫓겨나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조선 왕릉에는 두 개의 정릉, 신덕왕후(貞陵)와 중종(靖陵)의 능이 있다. 중종의 정릉은 강남구 선정릉에 선릉(부모인 성종과 정현왕후)과 함께 하고 있다. 중종이 여기에 묻히기까지는 사연이 많다. 1544(중종 29)년 중종이 세상을 뜨고 이듬해 장경왕후가 묻혀있던 고양의 희릉 서쪽에 능을 조성하며 묘호를 정릉으로 바꿔 정했다. 그런데 1562(명종 17)년 세 번째 왕후 문정왕후가 중종의 무덤을 정릉에서 서초동 현 위치로 천장하고 본래 능은 다시 희릉으로 되돌렸다. 문정왕후는 사후 중종과 함께 묻히려 했으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연산군묘’는 신하들의 반란으로 쫓겨난 10대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소이다. 연산군은 조선 최 초로 재위 중인 왕과 왕비의 맏아들로 태어나 원자와 세자를 거쳤으니 단연 적통 중의 적통으로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또한 창덕궁이 건립된 이후 ‘인정전’에서 조선왕 최초로 즉위하니 ‘어진 정치’를 실현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대간과의 불화, 무력으로 대신을 억누르며 어머니 폐비에 대한 복수심으 로 참극을 벌이며 파멸에 이르고 말았다. 조선 최초로 폐위된 후 죽음을 맞아 일반 묘에 묻혔으니 단종 에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성종에게는 3명의 왕후가 있었으니 조선 처음이었다. 첫 부인 공혜왕후는 후사 없이 19세에 죽어 파주삼릉의 순릉에 묻혔다. 이어 1476년 후궁 숙의 윤씨가 왕비가 돼 아들(연산군)까지 낳았으나 왕실의 기대를 저버린 처세로 3년만에 폐비가 됐고 이어 1480년 후궁 윤씨(정현왕후)가 왕비가 됐다. 2년 후 폐비는 사사돼 파주에 묻혔다. 그 후 왕실은 평안했고 1494년 성종이 승하해 선릉에 묻혔고 연산군이 왕위를 이었다. 1504년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를 제헌왕후로, 무덤 회묘는 회릉으로 올렸다. 그러나 2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서울 강남의 한복판에 있는 선정릉(선릉+정릉)은 42기 조선왕릉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선릉은 제9대 왕인 성종(成宗)과 정현왕후, 정릉은 아들 중종이 잠든 곳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임진왜란 때 왜군이 파헤쳐 불을 질렀기에 시신이 없어지고 말았다. 성종은 세종에 버금가는 왕으로 꼽힌다. 세조(조선 제7대 왕)는 성종을 “도량이 태조에 비할 만하다”라고 했고, 정조(조선 제22대 왕)는 “조선왕가의 성대한 시기를 만든 성군”이라 극찬했다. 성종은 3명의 왕비에 후궁이 14명이었다. 31명의 자식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서오릉의 ‘창릉’은 예종(이황, 조선 제8대 왕, 1450~1469)과 안순왕후가 묻힌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각자 봉분을 둠)’이다. 형 덕종의 ‘경릉’이 세자의 무덤이었던 반면, 창릉은 서오릉 최초의 재위했던 왕의 능이다. 조선 왕릉에서 유일하게 형제가 이웃하고 있다. 예종은 형 의경세자(추존 덕종)가 20살에 죽자 뒤를 이어 세자와 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불과 1년 2개월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예종의 첫 부인 장순왕후는 17세에 아들을
글 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경기 고양시 서오릉(궁 서쪽의 5개 능)은 평일 낮에도 방문객들이 줄을 잇는다. 이곳에는 가장 먼저 ‘경릉(敬陵)’이 들어섰다. 추존 덕종(조선 제7대 왕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과 소혜왕후의 능이다. 1457(세조 3)년 의경세자가 20세에 죽자 정역(효령대군의 장인)의 묘역을 옮기고 그 자리에 묘를 썼다. 그 후 의경세자의 아들 잘산군(성종)이 왕이 되자 덕종으로 추존하고 세자빈 한씨는 왕비에 이어 왕대비로 봉했다. 능호는 경릉이라 지었다. 1504(연산군 10)년 소혜왕후(당시 인수대비)가 세상을 뜨자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경기도 남양주 광릉수목원로에 있는 광릉은 조선 제7대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이다. 최초의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각자 봉분을 둠)’이며 세조의 유명에 따라 민폐를 줄이고자 능침에 석실(관을 돌로 둘러 만든 방)을 없애고 회격(관 사이를 석회로 메워 다짐)을 썼다. 봉분을 화려하게 두른 병풍석도 없앴다. 광릉은 정창손의 선대묘역을 옮기고 그 자리에 조성했다. 세조는 왕자 시절부터 능력과 효도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계유정난을 일으켜 친형제와 많은 사람을 죽이고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경기 남양주에 있는 ‘사릉(思陵)’은 17세의 젊은 남편 단종(조선 제6대 왕)을 잃고 한 많은 세월을 보낸 정순왕후 송씨의 능이다. 왕후는 15세에 조선 최초의 간택 왕비가 됐다. 부귀영화를 손에 쥐는가 싶더니 불과 몇 년 만에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남편인 왕은 폐위되고 유배되고 죽임을 당했다. 친정은 멸문하고 본인은 폐비가 되어 궐문 밖으로 내쳐졌다. 생이별과 죽음은 부부를 영영 갈라놓았다. 왕후는 자식도 없이 단종 사후 64년을 외롭고 힘들게 지내다 82세에 세상을 떴다. 그나마 양아들 정미수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강원도 영월의 장릉은 조선 제6대 단종 대왕의 무덤이다. 서울 경복궁에서 500리 떨어진 영월에 어찌 왕의 무덤이 있는가. 왕릉은 궁궐에서 반나절 행차의 거리에 조성한다. 그러니 장릉은 애초 왕릉 자리가 아니었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 유배에서 죽음에 이르렀지만, 시신조차 거두지 않았다. 영월의 호장 엄홍도가 몰래 아들들과 단종의 시신을 거둬 땅에 묻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내팽개쳐졌다. 241년이 지난 1698년 숙종 24년에 이르러 ‘장릉’이라는 능호를 정하자 비로소 왕릉이 됐다. 장릉은 조선왕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현릉은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동원이강릉(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각자 봉분을 둠)이다. 경기도 구리 동구릉에 태조 건원릉 이후 46년 만에 들어선 두 번째 능이다. 원래 문종 혼자 있었는데 나중에 왕후가 옮겨왔다. 1441년 세자빈 권씨(현덕왕후)가 아들(단종)을 낳고 이튿날 세상을 뜨자 경기 안산에 묻혔다. 그러나 문종은 1452년 승하해 현릉에 자리했다. 1456년 세조가 단종의 복위에 가담한 현덕왕후의 친정을 멸하고, 왕후도 폐한 후 무덤도 파헤쳐 버렸다. 그렇게 세월이
조선왕릉 42기 중 영릉 명칭을 가진 능은 세종(英陵), 효종(寧陵), 추존 진종(永陵)의 능이다. 역사상 최고 임금인 세종대왕의 여주 영릉은 소헌왕후가 한 봉분에 묻힌 조선 최초 합장릉이다. 원래 아버지 태종의 헌릉(서초구 내곡동) 주변에 있었으나 1469년 예종 1년에 여흥(여주)으로 천장했다. 엄청난 왕릉 이전작업을 거쳐 이곳 여주의 명당에 온 것이다. 영릉은 세종의 국민적 인기를 나타내는 역사와 문화, 과학의 학습장이기도 하다. 세종의 성공에는 소헌왕후의 뒷받침이 컸다. 왕후는 8남 2녀로 총 10명의 왕자와 공주를 낳아 왕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봉의산성을 노래한 성현 춘천부 누정조에 봉의루(鳳儀樓) 절구가 실려 있다. 조선 중종 때 학자 성현(成俔, 1439~1504)이 봉의루를 찾아 감회를 적은 것이다. 성현은 조선 성종(成宗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불암산성은 고구려 매성군 땅 서울 노원구 불암산성(佛巖山城)은 본래 경기도 양주목에 속한 땅이었다. 의 기록을 보면 양주는 고구려 시기 매성군(買省郡) 혹은 창화군(昌化郡)이라고 불렸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시인들이 앞다퉈 사랑한 용인 형승조에도 “용인은 왕도(漢陽)와 가까워서 옛부터 빈객들이 모여드는 땅”이라고 했다. 조선 세조 때 문신인 김수녕(金壽寧)이 지은 신정(新亭) 기문에 사통팔달
왕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조선의 왕들께 묻고 싶은 질문이다. 왕의 직분과 개인 삶의 조화를 이룬 왕이 바람직하겠지만 다수는 불행했고 심지어 왕의 자리는커녕 목숨까지 잃은 왕들도 있다. 이 점에서 정종은 독특한 왕이다. 카리스마, 장기 재위, 업적 면에서 내노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삶은 조선의 왕들이 부러워할 정도였다. 동생 이방원의 들러리로 잠시 왕을 했다고 하지만 그는 자신이 아끼고 인정했던 동생에게 ‘무거운 짐은 네가 져라’ 하듯 왕위를 물려주고 여유롭고 행복한 삶을 이어갔다. 행복의 아이콘이라 할 정종의 진면목을 알게 된
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강원도 평창군은 고구려 시대 ‘욱오현(郁烏縣)’ 혹은 ‘우오(于烏)’라고 불렸다. 한자사전에서 ‘郁’의 뜻을 찾아보면 성할 욱, 울창할 욱으로 나온다. 성하고 창성하다는 뜻이니 지금의 군명 평창(平昌)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