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온릉, 고양 희릉
단경왕후, 왕비 7일 만에 내쳐져
영조, 왕후·왕릉의 지위 찾아줘
장경왕후, 출산 엿새 후 세상 떠
30년후 중종 함께 묻히나 또 이별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조선 최고의 세도가 딸로, 20세에 왕비에 이른 듯하더니 7일 만에 궁궐에서 쫓겨난 단경왕후. 왕과 결혼해 10여년 만에 왕자를 낳았으나 엿새 만에 25세로 세상을 뜬 장경왕후. 중종과 부부의 연을 오래 잇지 못한 왕후들이다. 조선 왕후들은 최고의 권세와 부귀를 누리는듯하다 이내 허망하게 사라진 경우가 흔했다. 집안 배경과 처세, 그리고 권력의 어느 하나가 못 미치면 왕후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단경왕후는 남편 중종이 왕이 되었으나 신하들에 의해 강제로 생이별을 했다. 아무 잘못도 없이 쫓겨나 폐비로 50년을 홀로 지내다 죽으니 경기양주의 거창신씨 묘역에 묻혔다. 182년이 지나서야 단경왕후로 추복되고 온릉의 묘호를 받았으니 과연 왕후는 크게 기뻐했을까 싶다.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이다. 원래 태종의 헌릉 서쪽에 있었으나 1537년 현 위치로 옮겨졌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이다. 원래 태종의 헌릉 서쪽에 있었으나 1537년 현 위치로 옮겨졌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뒤를 이른 장경왕후의 삶 또한 안타깝다. 17세 왕비가 되어 왕자를 낳지 못하니 가시방석의 나날이었다. 왕자 없는 왕비는 뿌리 약한 나무 아니던가. 25세에 드디어 아들(인종)을 낳으니 왕후의 앞날에 축복과 영광만이 펼쳐지는 듯 했다. 그러나 홀연 세상을 뜨고 말았으니 왕과 왕실 모두가 애처로워했다. 갓 태어난 왕자의 앞길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장경왕후는 경기 고양의 희릉에 홀로 묻혀 남편을 기다렸고 30년이 지나 중종과 함께 하게 됐다. 그러나 18년 후 문정왕후가 중종의 무덤을 강남 선정릉으로 옮겨버렸다. 최초로 무덤조차 이별을 한 것이다. 과연 이들 왕후들의 다하지 못한 ‘사랑과 그리움’은 아직도 남아있을까. 온릉과 희릉을 찾아가 본다.

단경왕후의 무덤인 ‘온릉’이다. 1557년 폐비의 신분으로 죽자 거창신씨 묘역에 묻혔으나 1739년 영조가 단경왕후로 추복하며 정릉(신덕왕후)과 사릉(정순왕후)의 예로 조성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8.14.
단경왕후의 무덤인 ‘온릉’이다. 1557년 폐비의 신분으로 죽자 거창신씨 묘역에 묻혔으나 1739년 영조가 단경왕후로 추복하며 정릉(신덕왕후)과 사릉(정순왕후)의 예로 조성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8.14.

◆대를 이어 폐비로 내쳐진 왕후들

중종의 단경왕후 신씨는 왕비가 되자마자 폐비가 돼 내쳐졌다. 그 배경에는 아버지 신수근이 있다.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이니 당대 최고의 권세가였다. 그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최고의 직을 지냈다. 단경왕후의 할아버지 신승선은 영의정이자 연산군의 장인이며 할머니는 임영대군(세종의 4남)이니 왕실과 긴밀하고 든든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의 견고한 권력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한 사람이 잘못되면 그 주변 전체가 화를 입게 되는 경우였다. 폐비윤씨의 불행이 아들 연산군의 폭정으로 이어지고 이는 마침내 연산군의 외척인 신씨 집안에 화를 미치고 말았다. 신수근이 1506년 좌의정으로 있을 때 박원종 등이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추대하고자 신수근에게 넌지시 누이(연산군의 부인)와 딸(중종의 부인)중 누가 더 중하냐고 물었다. 이에 신수근은 연산군이 잘못은 하지만 세자가 있으니 지켜보자고 했다. 그러자 박원종 등은 더 이상 협조가 어렵다고 보고 신수근과 아우 신수겸, 신수영을 살해했다. 신수근에 대해 ‘연산군일기’와 ‘중종실록’에는 왕의 총애를 받았고 남을 해치고 일을 멋대로 하며 상당한 뇌물을 챙겼다고 돼 있으나 영조 51년 8월 24일 실록에는 영조가 “신수근은 포은(정몽주)과 충의가 같다”고 했다. 엄청난 찬사가 아닐 수 없다. ‘국조인물고(태조에서 숙종까지의 주요인물에 관한 책)’에는 신수근이 외척임에도 재산이 없고 노비 수도 매우 적었다고 적혀 있다.

온릉의 ‘재실’은 작고 단조롭다. 온릉은 그간 군사지역으로 출입이 금해졌으나 2019년 11월 14일부터 무료로 시범 개방하고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8.14.
온릉의 ‘재실’은 작고 단조롭다. 온릉은 그간 군사지역으로 출입이 금해졌으나 2019년 11월 14일부터 무료로 시범 개방하고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8.14.

◆왕비 책봉식도 못하고 쫓겨난 단경왕후

단경왕후 신씨는 1499(연산군 5)년 13살에 한살 아래인 진성대군(훗날 중종)과 결혼해 부인이 됐다. 1506년 9월 2일 중종이 왕이 되자 왕비가 됐으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과 아버지 신수근 및 그의 형제와 측근이 모두 제거됐다. 임금이 된 중종은 신씨를 왕비로 책봉하려했으나 박원종 등 반정세력은 왕비가 세자를 낳아 힘을 얻으면 보복할까 두려워 기어코  폐출을 주장했다. 중종 1년 9월 9일 유순·김수동·유자광·박원종·유순정·성희안·김감·이손·권균·한사문·송일·박건·신준·정미수 및 육조 참판 등이 같은 말로 아뢰기를 “신수근의 친딸을 중전으로 삼는다면 인심이 불안해지고 종사에 관계됨이 있으니, 은정을 끊어 밖으로 내치소서”하니, 중종이 “아뢰는 바가 심히 마땅하지만, 그러나 조강지처인데 어찌하랴”고 했다. 모두가 재차 아뢰니 “종사가 지극히 중하니 어찌 사사로운 정을 생각하겠는가. 여러 의논을 좇아 밖으로 내치겠다”고 했다. 얼마 뒤에 하성위 정현조(세조의 사위이자 정인지의 아들)의 집을 수리하고 소제해 나가게 했다.

9일 초저녁 단경왕후는 왕비 책봉식조차 못한 채 궁에서 쫓겨났다. 많은 신료들과 백성들은 억울하게 쫓겨난 폐비의 신세를 안타까이 여겼다. 왕후의 자리는 장경왕후에게 이어졌다. 10년이 지나 1515년 2월 장경왕후 윤씨가 인종을 낳은 후 세상을 떴다. 8월 8일 담양부사 박상, 순창군수 김정 등이 “신씨를 복위시켜야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유자광 등이 모두 죽은 후라 신씨의 복위를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엄연히 세자 인종이 있었기에 복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57(명종 12)년 12월 71세에 사망하자 경기도 양주 거창신씨의 묘역에 자리했다. 사후 182년이 지난 1739(영조 15)년에 다시 왕후로 복위되면서 단경왕후의 시호와 온릉의 묘호를 받았다. 신수근도 왕의 장인으로서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창부원군에 추봉됐다. 온릉은 군사보호구역이라 출입을 금했으나 2019년 11월 일반인들에게 개방됐다.

온릉 ‘수복방터’다. 온릉에는 수라간(제례에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는 공간)과 수복방(왕릉 관리자가 머무는 공간)이 없어지고 수복방 터만 남아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8.14.
온릉 ‘수복방터’다. 온릉에는 수라간(제례에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는 공간)과 수복방(왕릉 관리자가 머무는 공간)이 없어지고 수복방 터만 남아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8.14.

◆중종이 애처로이 여긴 장경왕후

장경왕후는 1491(성종 22)년 7월 6일, 한성부 사제에서 아버지 파원부원군 윤여필과 어머니 순천부부인 박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오빠가 대윤의 영수인 윤임이다. 장경왕후의  증조부가 정희왕후의 오빠 윤사윤이고 효령대군이 외증조부이다. 장경왕후와 중종은 정희왕후의 아버지 윤번의 현손이며 서로 8촌지간이다. 더구나 장경왕후의 큰 이모부가 월산대군(성종의 형)이고 외삼촌이 중종을 왕에 앉힌 실세 박원종이었다. 중종의 세 왕후 중 가장 먼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지만 왕후에 대한 평가는 매우 후했다.

‘서삼릉입구’다. 서삼릉에는 3개의 능만 있다. 장경왕후의 희릉과 아들 인종과 며느리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 그리고 철종의 예릉이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8.14.
‘서삼릉입구’다. 서삼릉에는 3개의 능만 있다. 장경왕후의 희릉과 아들 인종과 며느리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 그리고 철종의 예릉이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8.14.

1515(중종 10)년 3월 7일 대행왕비(장경왕후)의 실록에는 “사저에서 났으며,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큰 이모부 월산대군의 집에서 자랐다. 1506(중종 1)년 9월 중종이 왕이 됐으나 왕비가 없었다. 숙의 윤씨를 왕비로 세우자 거듭 청하니, 중종이 사양하다가 받아들이기를  ‘어진 덕이 숙의 윤씨 같은 이가 없으니, 정비로 정하겠다’고 해 이듬해 8월에 왕비로 책봉했다. 천성이 총명하고 인자하며 여러 책을 열람했다. 정현왕후를 지성으로 봉양하며 변함이 없었고 항상 조심했다. 왕비로 9년 동안 한 사람도 임금에게 벼슬이나 죄를 면하게 청하지 않았다. 임금이 크게 감탄해 ‘어질다. 주 문제 부인의 덕이라도 이에 더함이 없을 것이다’하며 왕후를 중히 여겨 예우하고, 사람들도 시종 비판하는 말이 없었다.

1511(중종 6)년 5월 딸을 낳았는데, 나이 어리어 아직 비녀를 꽂지 못했으며, 1515년 2월 25일에 원자를 낳고 갑자기 중병에 걸렸다. 상이 크게 놀라시어 친히 문병하고 또 말하고 싶은 것을 물으니 ‘은혜 입음이 지극히 크니 반드시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며 다만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중종이 백방으로 약을 썼지만 끝내 경복궁 동궁 별전에서 훙하니 25세였다. 임금이 탄식하며 “일국의 경사(인종 탄생)가 있는데 이런 불측한 일이 있는가? 하늘이 어찌 나의 어진 내조를 일찍 빼앗는가. 내가 정신이 혼미하고 마음이 어지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으니, 일을 결단할 수가 없다”고 하니 “궁중에서도 비통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했다.

장경왕후의 비문을 적은 ‘희릉 표석’이다. 희릉(禧: 경사, 행복)은 후의 경사를 넓힌다는 뜻이다. 그러나 1544년 남편 중종, 1545년 아들 인종이 즉위 9개월 만에 죽고 오빠 윤임도 문정왕후 동생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8.14.
장경왕후의 비문을 적은 ‘희릉 표석’이다. 희릉(禧: 경사, 행복)은 후의 경사를 넓힌다는 뜻이다. 그러나 1544년 남편 중종, 1545년 아들 인종이 즉위 9개월 만에 죽고 오빠 윤임도 문정왕후 동생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8.14.

장경왕후는 대모산에 있는 태종의 헌릉 서쪽 언덕에 안장됐다. 그러나 22년이 지난 1537(중종 32)년에 희릉 조성 당시에서 문제점이 있다는 김안로의 주장에 따라, 고양의 현재자리로 천장(무덤을 옮김)했다. 이후 1544(중종 39)년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중종의 능을 희릉 서쪽 언덕에 조성했다. 이때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각자 봉분을 둠) 형식으로 취하면서 능호를 희릉에서 정릉이라 했다. 그리고 1545년 인종이 즉위 1년도 못돼 세상을 뜨니 어머니 장경왕후의 능역에 효릉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왕실에서 최초로 모자의 무덤이 같은 능역에 자리했다. 부모와 자식부부의 능이 한 구역에 조성된 최초의 경우였다. 그러나 1562(명종 17)년에 문정왕후가 중종의 능만 현 서울 강남구로 천장하니 장경왕후의 희릉만 남게 됐다. 이곳에 희릉(장경왕후), 효릉(인종), 예릉(철종)의 3기의 능이 있으니 서삼릉(궁궐서쪽의 3개의 능)이라 한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