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대 세조ㆍ정희왕후의 광릉

조선 최초 조성된 ‘동원이강릉’
세종이 신임한 아들이자 왕자
어린 단종 내쫓고 왕위를 찬탈
동생 죽이고 많은 대신도 살해

이의준 왕릉답사가
이의준 왕릉답사가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경기도 남양주 광릉수목원로에 있는 광릉은 조선 제7대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이다. 최초의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각자 봉분을 둠)’이며 세조의 유명에 따라 민폐를 줄이고자 능침에 석실(관을 돌로 둘러 만든 방)을 없애고 회격(관 사이를 석회로 메워 다짐)을 썼다. 봉분을 화려하게 두른 병풍석도 없앴다. 광릉은 정창손의 선대묘역을 옮기고 그 자리에 조성했다. 세조는 왕자 시절부터 능력과 효도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계유정난을 일으켜 친형제와 많은 사람을 죽이고 단종의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당대는 물론 후세에도 정통성 시비와 잔악함의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살육으로 얻은 권력으로 만민에게 “내가 금자탑을 쌓았노라”라고 외치지만 과연 그 금자탑은 무엇일까. 광릉 가까이 세조의 사후 안녕을 비는 원찰 봉선사가 있다. 과연 세조 부부는 인륜을 저버린 죄를 씻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자신의 극락을 위해 절하고 있을까. 수목이 우거진 광릉을 찾아가 본다.

광릉 전경. 광릉은 조선 최초의 ‘동원이강릉’이다. 좌측이 세조, 우측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처음으로 능침을 석실 대신 석회를 부은 회격으로 했다. 병풍석, 향로와 어로가 없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24.
광릉 전경. 광릉은 조선 최초의 ‘동원이강릉’이다. 좌측이 세조, 우측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처음으로 능침을 석실 대신 석회를 부은 회격으로 했다. 병풍석, 향로와 어로가 없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24.

◆세종이 인정한 아들이자 왕자

세조 이유(1417년 9월 29일~1468년 9월 8일)는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8남 2녀의 넷째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428년에 진평대군, 그 후 함평대군, 진양대군을 거쳐 1445(세종 27)년에 수양대군에 봉해졌다. 그해에 한 살 많은 11살 윤씨(윤번의 딸, 훗날 정희왕후, 1418~1483년)와 결혼했다. 1455년에 세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됐다. 부부 사이도 좋아 세조가 왕이 되도록 곁에서 역할을 했다. 계유정난 당시에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갑옷을 입혀 보냈다고 한다. 세종은 수양대군을 가까이했다. 세종이 경회루를 수리할 때, 동교에서 화포 쏘는 것을 구경하고 나서, 또한 기우제를 행한 후에 진양대군(수양대군)의 사제로 가서 머물렀다. 문종이 마땅한 부인이 없어 수양대군 부인 윤씨가 종실 맏며느리의 역할을 해냈다. 어머니 소헌왕후의 온천행에도 안평대군 등과 같이 호종했다. 소헌왕후는 수양대군의 집에서 숨을 거뒀다. 왕자시절 세종과 문종의 명을 받아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다. 세종 17년 4월 1일 실록은 “세종과 문종이 몸이 편치 않아 진양대군(수양대군)에게 대신 전별연을 행하게 했고 이틀 후 모화관에서 사신을 전송했다”고 기록했다.

‘열성어필’은 1775(영조 51)년 조선시대 왕들의 글씨인 어필을 탁본해 엮은 책이다. 문종부터 왕들의 글씨를 목판과 석판으로 300부 정도 찍어 공신과 종친에게 나눠줬다. 사진은 열성어필의 세조글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24.
‘열성어필’은 1775(영조 51)년 조선시대 왕들의 글씨인 어필을 탁본해 엮은 책이다. 문종부터 왕들의 글씨를 목판과 석판으로 300부 정도 찍어 공신과 종친에게 나눠줬다. 사진은 열성어필의 세조글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24.

세종 말년까지도 종종 이러한 일이 이어졌다. 수양대군은 세종의 명에 의해 ‘강목’ ‘통감’의 훈의를 찬술할 때 큰 글자로 써서 이를 새로 주조했고 정인지가 ‘치평요람’을 편찬할 때 감독을 했다. 문종이 신진법(新陣法)을 지을 때 김종서·정인지 등과 함께 교정에 참여해 완성토록 했다. 세종의 명을 받아 불교서적 번역을 관장하고,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다. 문종 때는 관습도감 도제조에 임명돼 국가의 실무를 맡아봤다. 또한 이듬해 안평대군·김종서·조서강과 함께 헌릉을 살피고 헌릉·건원릉·제릉을 수리했으며 수릉(왕이 죽으면 묻힐 무덤)의 땅을 살피기도 했다.

‘열성어필’은 1775(영조 51)년 조선시대 왕들의 글씨인 어필을 탁본해 엮은 책이다. 문종부터 왕들의 글씨를 목판과 석판으로 300부 정도 찍어 공신과 종친에게 나눠줬다. 사진은 열성어필탑본첩 표지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24
‘열성어필’은 1775(영조 51)년 조선시대 왕들의 글씨인 어필을 탁본해 엮은 책이다. 문종부터 왕들의 글씨를 목판과 석판으로 300부 정도 찍어 공신과 종친에게 나눠줬다. 사진은 열성어필 탑본첩 표지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24

◆수양대군 vs 안평대군

수양대군은 형 문종과 아래로 안평대군, 임영대군, 금성대군, 영응대군이 있다. 두 명의 남동생 광평대군, 평원대군과 누나 정소공주는 스무 살 이전에 사망했다. 1428년 세 아들(진평·안평·임영대군)이 대군에 봉해졌고 함께 1430년 성균관에 입학했다. 실록은 “세조가 어릴 때 민간에서 자랐으므로 모든 어려움과 사실과 거짓을 자세히 일찍부터 겪어 알고 있었으며, 다섯 살에 ‘효경’을 외우기도 했다. 항상 활과 화살을 지녔고 매를 손에서 놓지 아니했다. 세종이 기특히 여기고 사랑해 다른 아들과 달리 대했다”고 했다. 세종은 문종 외에 왕자들도 정무에 참여시켰다. 특히 수양대군(이유), 안평대군(이용)이 함께 경쟁하듯 일을 해냈다.

그러나 이들은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반목하기 시작했다. 당시 김종서와 황보인 등 대신들의 위세가 높았고 수양대군과 안평대군도 힘을 키우던 때였다. 1452년 분경(벼슬을 얻으려 권력자의 집을 드나듦)을 금지하려하자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우리들에게 분경을 금하니, 이는 우리를 의심하는 것이다”라며 반발했다. 임금은 대군에게는 분경을 금하지 말도록 했다.

봉선사는 1469년 정희왕후가 세조의 복을 기원하는 사찰로서 89칸 규모로 중건했다. 1970년 당시 주지였던 운허스님이 중건하며 ‘대웅전’을 ‘큰법당’이라 이름 지어 한글 편액을 달았다. 사진은 봉선사 전경(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24.
봉선사는 1469년 정희왕후가 세조의 복을 기원하는 사찰로서 89칸 규모로 중건했다. 1970년 당시 주지였던 운허스님이 중건하며 ‘대웅전’을 ‘큰법당’이라 이름 지어 한글 편액을 달았다. 사진은 봉선사 전경(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24.

두 대군은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수양대군은 권람·한명회·홍달손·양정 등 무인을 규합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우선 1452년 10월 수양대군은 명나라의 환심과 인정을 받기 위한 방법으로 북경에 고명 사은사로 가고자 청했다. 이에 안평대군은 김종서, 황보인을 추천하며 반대의 뜻을 비쳤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알현했다. 김종서, 계양대군, 부마 등이 논의됐으나 결국 수양대군으로 정해졌다. 이틀 전 수양대군이 김종서의 측근 이현로를 매질했다. 수양대군은 이현로가 안평대군 생일에 관료 30여명을 모아 잔치를 펼쳤다고 임금에게 고했다. 양측의 대립이 심화된 계기였다.

봉선사 대법당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24.
봉선사 대법당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24.

◆궁지기 한명회, 세조를 만들고 왕실 장악

수양대군의 행보는 한명회를 만나면서 바뀌었다. 1452년 7월 23일 궁지기 한명회가 권남을 찾아 이르기를 “임금이 어리니 대신이 권력을 휘두르고 안평대군도 함께 위세를 떨친다. 자네는 수양의 사람으로 어찌 잠자코만 있는가”라고 했다. 이에 권남이 세조에게 “안평대군은 자칫 환난을 일으킬 것이니 대군이 나서야 한다”고 했다. 세조는 “안평대군이 흉악한 미치광이로서 사납고 고약하니 반역할 마음을 품고 꺼리는 바가 없다. 손위인 나를 해치려 하니, 이를 어찌할꼬”라고 하니, 권남이 “고요히 더욱 충성하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면서 관찰할 따름입니다”라고 했다. 1453(단종 1)년 3월 처음에 한명회가 세조에게 배알하니, 세조가 옛 친구와 같이 여겼다. 한명회는 여러 장수를 데리고 오니 세조가 후하게 대우해 환심을 샀다. 수양대군이 “대난을 평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대들은 힘을 다할 수 있겠느냐”고 하니, 모두가 따르겠다며 맹세했다.

‘정이품송’은 충북 보은에 있는 소나무다. 1464(세조 10)년에 세조가 법주사로 행차할 때 가마가 지나게 되자 소나무가 가지를 위로 들어 무사히 지나가도록 하자 세조가 정이품의 벼슬을 하사했다. 사진 왼쪽부터 정이품속과 정이품속후계목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24.
‘정이품송’은 충북 보은에 있는 소나무다. 1464(세조 10)년에 세조가 법주사로 행차할 때 가마가 지나게 되자 소나무가 가지를 위로 들어 무사히 지나가도록 하자 세조가 정이품의 벼슬을 하사했다. 사진 왼쪽부터 정이품속과 정이품속후계목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24.

◆후세에도 지워지지 않는 ‘반인륜’

수양대군은 조카인 왕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이 됐지만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1453년 계유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은 “오늘 요망한 도적을 소탕하겠다. 가장 간교한 자 김종서를 곧장 그 집에 가서 선 자리에서 목을 베고 아뢰면 된다”며 피비린내 나는 서막을 열고 말았다. 단종을 압박해 중신을 소집하고 들어오는 대신들을 궐문에서 살해했다. 김종서 부자를 비롯해 황보인, 이양, 조극관, 민신, 윤처공, 조번, 이명민, 원구, 김연, 이현로 등이 줄줄이 참살됐다. 또한 이후 왕 단종을 유배 후 사사했고, 친동생 안평대군, 금성대군, 서모인 혜빈양씨와 이복형제인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 사육신 등 반대자들을 죽였다. 이에 반발해 1453(단종 1)년에 함경도절제사 이징옥의 반란이 일었고, 1467(세조 13)년에는 함경도에서 조선왕조 최초의 대규모 반란인 ‘이시애의 난’이 발생하기도 했다.

수양대군의 세력들은 김종서 등을 제거하면서 평소 황표정사(黃標政事, 단종이 어려서 인사를 할 때 전조에서 대신과 상의해 황색 표시를 하면 임금이 이를 따름)를 문제 삼았다. 그러나 세조 즉위 이후 공신 책봉(계유년 정난공신 43명, 세조 옹립한 좌명공신 45명, 이시애의 난 진압 적개공신 45명, 남이 역모 대처한 익대공신 39명)이 많았고 국가의 재정과 지방 백성의 삶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세조는 유교 사회에서 집현전을 없애고 불교에 심취했다. 말년에 원각사를 창건했는데 종 제작에 전국에서 구리 5만근을 거뒀다. 세조가 1468(예종 즉위)년 왕세자 예종에게 선위한 다음날 수강궁 정침에서 52세로 승하했다.

조선 왕릉 유일하게 광릉 입구에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주로 궁이나 능에 ‘이곳을 지나는 대·소 관리는 말에서 내리라’고 적혀 있는 표석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24.
조선 왕릉 유일하게 광릉 입구에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주로 궁이나 능에 ‘이곳을 지나는 대·소 관리는 말에서 내리라’고 적혀 있는 표석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24.

정희왕후는 세조의 복을 기원하는 원찰 봉선사를 중건하면서 동종 제작에 2만 5천근의 구리를 들였다. 왕릉은 죽엽산 아래에 있던 동래정씨 정창손의 선대묘역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조성했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고, 병풍석도 세우지 말라”고 했다.

부역 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비용도 절감토록 했다. 1483(성종 14)년 정희왕후 윤씨는 세조 사후 15년간 왕실의 어른으로 지내다 온양 행궁에서 66세로 세상을 떴다. 세조 봉분의 동쪽 언덕에 묻혔다. 조선 왕릉에서 유일하게 하마비(下馬碑, 누구든지 그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비석)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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