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구 정릉, 제11대 중종의 묘
왕위 준비 없이 반정으로 자리 올라
​​​​​​​중종, 왕권강화·개혁 사이에서 고민
왕과 세 왕후, 사후 뿔뿔이 흩어져
정릉은 자리 옮겨지고 임란때 불타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조선 왕릉에는 두 개의 정릉, 신덕왕후(貞陵)와 중종(靖陵)의 능이 있다. 중종의 정릉은 강남구 선정릉에 선릉(부모인 성종과 정현왕후)과 함께 하고 있다. 중종이 여기에 묻히기까지는 사연이 많다. 1544(중종 29)년 중종이 세상을 뜨고 이듬해 장경왕후가 묻혀있던 고양의 희릉 서쪽에 능을 조성하며 묘호를 정릉으로 바꿔 정했다. 그런데 1562(명종 17)년 세 번째 왕후 문정왕후가 중종의 무덤을 정릉에서 서초동 현 위치로 천장하고 본래 능은 다시 희릉으로 되돌렸다. 문정왕후는 사후 중종과 함께 묻히려 했으나 결국 이뤄지지 못하였다. 중종은 세 명의 왕후가 있음에도 죽어서 각기 흩어졌다. 조선 1대 왕인 태조(건원릉)와 제 6대 왕 단종(장릉)에 이어 세 번째이자 조선의 마지막 ‘왕의 나 홀로 능(단릉)’이 됐다. 중종의 삶은 크고 작은 변란과 왕권의 위협에 대처했는데 그의 무덤 또한 주인처럼 파란만장하여 옮겨지고 임진왜란 때에는 불태워지기도 했다. 사후에 여기저기 흩어져 묻힌 중종과 세 왕후의 발자취를 찾아가 본다.

정릉 ‘정자각’과 ‘능침’ 전경이다. 강남구 한복판에 자리한 조선 제11대 중종의 무덤이다. 중종은 세 왕후가 있었으나 사후 단릉(홀로 묻힌 무덤)에 묻혔다. 단릉에 묻힌 조선 왕은 태조, 단종, 중종 뿐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7.28.
정릉 ‘정자각’과 ‘능침’ 전경이다. 강남구 한복판에 자리한 조선 제11대 중종의 무덤이다. 중종은 세 왕후가 있었으나 사후 단릉(홀로 묻힌 무덤)에 묻혔다. 단릉에 묻힌 조선 왕은 태조, 단종, 중종 뿐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7.28.

◆자고나니 왕이 되다

중종(이역)은 1488(성종 19)년에 성종(제9대 왕)과 정현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19세에 왕이 돼 당시 조선개국이래 최장기 38년 2개월을 재위했다. 연산군(제10대 왕)의 12살 아래 이복동생으로 7살에 진성대군에 봉해졌다. 실록은 “대군이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고 근면·검약하며 잘 듣고 판단하는 성품을 지녔다”고 했다. 대군은 1506(연산군 12)년 신하들이 연산군을 폐한 ‘중종반정’에 의해 왕이 됐다. 성희안과 박원종, 유순정 등의 세력이 궁을 장악해 대비 정현왕후에게 허락을 받아 곧바로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 즉위식을 거행했다. 연산군에게 세자 이황과 창녕대군, 양평군이 있었으나 반정세력은 이들을 모두 사사했다. 반정세력은 중종 초에 폐조수교의 법을 통해 연산군의 흔적을 지워나갔다.

그럼에도 중종은 재위기간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암행어사를 각도에 파견하고 군적을 다시 작성했으며 진휼청을 설치했다. 해안경비를 강화하고 봉화대를 설치했다. 사찰의 중건이나 재건을 금하고 승려를 군인으로 충당했으며 청백리의 자손을 우대했다. 중종11년에는 주자도감을 설치하고 목화와 메밀의 재배를 장려하기도 했다. 농서나 잠서, 소학 등 각종 서적을 한글로 번역하여 보급했다. ‘소학’ ‘이륜행실’ ‘경국대전’ ‘대전속록’ ‘천하여지도’ ‘삼강행실’ ‘신증동국여지승람’ 외에 다양한 서적이 간행됐다. 그러나 중종은 체계적인 세자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조선에서 두 번째로 경연(왕이 학문을 연마하고 국정논의)에 많이 나아간 왕이기도 하다. 왕권의 유지·강화와 정치개혁을 위해 노력을 했다.   

‘능침’ 공간은 진입공간과 제향공간을 거쳐 가장 높은 위치에 있으며 봉분(봉분을 둘러싼 병풍석과 난간석), 혼유석, 장명등, 망주석, 문석인, 무석인, 석호, 석양, 석마 등이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7.28.
‘능침’ 공간은 진입공간과 제향공간을 거쳐 가장 높은 위치에 있으며 봉분(봉분을 둘러싼 병풍석과 난간석), 혼유석, 장명등, 망주석, 문석인, 무석인, 석호, 석양, 석마 등이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7.28.

◆왕후·후궁세력의 불화

중종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 왕후·후궁·외척들 서로간의 반목과 대립에 힘들어 했다.  중종에게는 12명(왕비 3명, 후궁 9명)의 부인과 20명(아들 9명, 공주 11명)의 자손이 있었으며 세 아들(인종, 명종, 추존 원종)과 손주(선조)가 왕이 됐으니 조선 그 어느 왕보다 번창한 후대를 남겼다. 중종에게는 단경왕후 신씨,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의 세 왕후가 있었다. 단경왕후의 아버지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으로써 삼정승을 지냈다. 단경왕후는 중종의 즉위 몇 일후 역적의 딸이라 해 궁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장경왕후의 아버지는 윤여필(판돈녕부사)이고 남동생 윤임, 이모부 월산대군(성종의 형), 외삼촌 박원종(반정공신)이었으니 중종의 측근실세였다. 그러나 장경왕후는 1515년 인종을 출산하고 몇 일만에 죽고 말았다. 문정왕후의 아버지는 종5품 내자시판관 윤지임이나 증조부 윤번(세조의 장인)과 조부 윤사흔(정희왕후 동생)이 왕실과 연이 깊었다. 중종 때부터 이들 두 윤씨 왕후의 친정 간(대윤과 소윤) 대립이 이어졌다.    

도심 속 정릉이다. 정릉은 선릉과 함께 도시 한복판에 위치해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 조선왕릉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7.28.
도심 속 정릉이다. 정릉은 선릉과 함께 도시 한복판에 위치해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 조선왕릉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7.28.

◆크고 작은 변란과 조광조의 개혁

훈구·공신세력은 초기 정국안정을 꾀했지만 과도한 권세로 부패, 훈공과 관직을 남발했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쟁이 계속됐는데 기묘사화(1519년), 신사무옥(1521년), 작서의 변(1527년) 등 크고 작은 변이 발생했다. 정국불만과 세력싸움은 ‘모반과 고변’으로 표출됐다. 또한 왜구와 여진족의 출몰도 잦았다. 가덕도, 삼포, 추자도 등 영호남에 왜구들이 침입했다. 1510(중종 5)년에는 삼포왜란(부산포, 제포=창원, 염포=울산)이 일어났다. 이곳에 왜인 불법 체류자가 늘고 무질서와 상거래 문란이 심해지자 조선은 강력한 단속과 통제를 했다. 이에 왜인 5천여명이 반발해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인명피해와 민간약탈이 자행되자 좌의정 유순정이 도순찰사로 나서서 6일 만에 반란을 진압했다. 이는 의정부와 병조가 참여하는 의결기관 비변사를 신설하는 계기가 됐다.

정자각 위의 잡상. 왕릉 정자각이나 궁궐의 전각 등의 추녀 마루 위에 귀신을 막기 위해 놓인 ‘잡상’이 있다.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을 비롯해 사자, 해치, 짐승, 용, 봉 등이 배열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7.28.
정자각 위의 잡상. 왕릉 정자각이나 궁궐의 전각 등의 추녀 마루 위에 귀신을 막기 위해 놓인 ‘잡상’이 있다.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을 비롯해 사자, 해치, 짐승, 용, 봉 등이 배열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7.28.

이 즈음 정국을 주도하던 박원종(1510년), 유순정(1512년), 성희안(1513년)이 차례로 세상을 떴다. 중종은 사림과 훈구세력의 틈에서 이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중종은 사림파인 김굉필의 제자 조광조를 등용했다. 조광조는 1510년 진사시 장원, 1515년 조지서사지(종이 만드는 관서의 우두머리로 종6품)를 거쳤다. 1516년 11월 29일 중종은 홍문관에 계심잠(마음을 경계하는 글)을 올리게 하고 이를 평가토록 했다. 조광조가 장원을 했다. 이에 사신이 논하기를 “광조는 마음 다스리는 공부를 했고 평생 학문과 언어 동작은 성현을 따라했다. 세상 드문 현재이며 동방에 필적할 사람이 없었다”며 극찬했다. 1518년에는 조광조는 대사헌이 됐다. 중종은 그의 도학정치와 대간을 후원했다. 그해 현량과(과거시험에서 벗어나 경전과 행실을 기준으로 인재를 추천·선발)를 도입했다. 이는 사림이 삼사(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와 승정원 진출하는데 교두보가 돼 훈구파의 반발을 초래했다. 궁중의 여악(가무하는 여성)과 소격서(국가의 제사를 맡은 관서)도 폐지했다. 마침내 1519(중종 14)년 정국공신(1506년 반정의 공로자) 105명 중 76명의 위훈(거짓 공훈)의 삭제를 주장했고 중종조차 반대했다. 조광조는 모든 대간의 사직을 내세우며 관철시켰다. 왕의 염려를 외면한 것이었다.

조광조의 묘에서 본 주변 아파트 전경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7.28.
조광조의 묘에서 본 주변 아파트 전경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7.28.

◆정국은 다시 원점으로

반발이 극에 달했다. 조광조와 사림파에 대한 탄핵이 시작됐다. 궁궐 뒤뜰에서 ‘주초위왕(走肖爲王: 조씨 走肖=趙가 왕이 된다)’의 글자가 새겨진 나뭇잎이 발견됐고 이를 중종에 고했다. 남곤이 꾸민 것으로 드러났지만 당시 종종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로 인해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는 제거됐다. 38세 조광조와 그의 개혁은 5년 만에 막을 내리고 정국은 혼란스러워졌다. 향약, 현량과, 소격서, 위훈삭제 등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1519년 조광조 사후 김안로가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는 아들 김희가 효혜공주(중종의 딸, 인종의 누나)와 결혼했기에 중종과 사돈이었다. 그는 권력을 마구 휘둘렀다. 영의정 남곤, 대사간 이항, 심정 등은 1524년 그를 탄핵·유배에 처했다. 1530년 남곤이 죽자 귀양 중이던 김안로는 심정 등이 후궁 경빈 박씨를 왕비로 책립하려 한다고 고했다. 중종은 관련자를 모두 처형했다. 김안로는 1534년 우의정, 1535년 좌의정에 올랐다. 그는 세자(훗날 인종)를 감싸며 전횡을 휘둘렀다. 1537년 정유년에는 윤원로·윤원형을 유배토록 했고 문정왕후마저 폐위시키려다 윤안임(문정왕후의 숙부)의 밀고로 종말을 맞았다. 중종은 김안로, 허항, 채무택(정유삼흉’이라 함)을 처형했다. 1543년 대사간 구수담이 대윤(장경왕후 측)과 소윤(문정왕후 측)의 파벌을 진언하니 중종은 크게 힘들어 했다.

중종의 지지로 개혁에 앞장섰지만 결국 중종에게 사약을 받아 죽은 조광조와 그의 부인 이씨의 무덤이다. 경기도 용인 수지에 있으며 묘표에는 ‘문정공 정암 조선생 지묘’라고 적혀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7.28.
중종의 지지로 개혁에 앞장섰지만 결국 중종에게 사약을 받아 죽은 조광조와 그의 부인 이씨의 무덤이다. 경기도 용인 수지에 있으며 묘표에는 ‘문정공 정암 조선생 지묘’라고 적혀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7.28.

이듬해 1544(중종 39)년 11월, 중종이 57세에 승하했다. 장경왕후의 희릉에 묻히며 정릉이라 했다. 그러나 문정왕후에 의해 홀로 선릉 옆으로 옮겨졌고 자주 물이 들고 터가 안 좋다고 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구에 의해 파헤쳐지고 불태워졌다. 1593년 4월 13일 경기좌도 관찰사 성영이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쳐 재궁(관)까지 훼손되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선조는 3일간 애도했고 영의정 등을 보내 봉심(임금의 명으로 조사함)하게 하니 모두 불타고 재만 남았으며 훼손된 시신이 내팽개쳐 있었으나 누구의 시신이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조정은 이를 중국에 고하면서 “고금 천하 어디에 이 같은 흉적이 있겠으며, 원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1593년 4월 28일 대신들은 정릉을 예전(희릉)자리로 옮기자고 했다. 그러나 전쟁 중이라 보수하는데 그쳤다. 헌릉, 강릉, 태릉 또한 변고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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