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릉, 제9대 성종ᆞ·정현왕후의 능(1)

준비 없이 왕 됐으나 부단히 학습
경청과 협의의 리더십도 발휘해
최초의 수렴청정, 강훈련도 견뎌
25년간 태평성대, 슬기로이 처신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서울 강남의 한복판에 있는 선정릉(선릉+정릉)은 42기 조선왕릉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선릉은 제9대 왕인 성종(成宗)과 정현왕후, 정릉은 아들 중종이 잠든 곳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임진왜란 때 왜군이 파헤쳐 불을 질렀기에 시신이 없어지고 말았다. 성종은 세종에 버금가는 왕으로 꼽힌다. 세조(조선 제7대 왕)는 성종을 “도량이 태조에 비할 만하다”라고 했고, 정조(조선 제22대 왕)는 “조선왕가의 성대한 시기를 만든 성군”이라 극찬했다. 성종은 3명의 왕비에 후궁이 14명이었다. 31명의 자식을 낳으니 왕실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성종은 서열이 앞선 2명의 왕자를 제치고 왕위에 올랐으나 13세 어린 나이였기에 정희왕후가 7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성종은 부단한 학습과 원만한 처세로 성공한 왕이 됐다. 그러나 왕비를 폐하고 사사하니 훗날 비극의 실마리를 만들었다. 선릉의 파란만장한 스토리를 살펴본다.

선릉은 능침공간 가까이 올라갈 수 있으며 봉분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6.04.
선릉은 능침공간 가까이 올라갈 수 있으며 봉분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6.04.

◆최초·최다의 기록 남긴 성종 가족사

성종은 조선왕조 최초·최다의 타이틀을 지닌 왕이다. 태조 이래 최초로 왕의 아들이 아닌 왕이었다. 즉위 후 7년간 최초로 수렴청정을 받았다. 조선왕 최다 31명의 자식을 뒀는데 후궁 숙의 홍씨는 10명(7남 3녀)의 자녀를 낳아 태종(조선 제1대 왕) 후궁 신빈신씨(3남 7녀)와 같았다. 조선 최초로 3명의 왕비를 맞았으며, 최초로 왕비를 폐해 죽이기도 했다. 성종 왕실에 대비 세명이 있었으니 이 또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성종(이휘)은 1457(세조 3)년 음력 7월 30일 의경세자(추존 덕종)와 소혜왕후의 차남으로 경복궁에서 태어났다. 두 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뜨니 할아버지 세조가 잠시 키웠다. 5세에 자산군이 됐고, 1467(세조 13)년 11살에 첫 부인 한명회의 딸(훗날 공혜왕후)을 맞았다. 이듬해 세조가, 다시 이듬해 왕위를 이은 숙부 예종도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 정희왕후의 명으로 예종의 양자로 입적돼 13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부인 공혜왕후가 결혼 6년 넘게 자식을 갖지 못했다. 왕실은 1473년 윤기견의 19세 딸(훗날 폐비윤씨)과 윤호의 12세 딸(훗날 정현왕후)을 후궁으로 들였다. 이듬해 1474년 공혜왕후가 병사하자 숙의 윤씨(훗날 폐비)가 왕비에 올랐다. 그러나 성종과의 불화로 5년 후 1479년 폐비가 됐고 또 다른 윤씨(정현왕후)가 왕비로 책봉됐다. 3년 후 1482년 폐비는 사사됐으며 다음해 정희왕후도 세상을 떴다. 이후 성종은 정현왕후와 여생을 지내다 1494년 38세의 나이로 훙서했다.

‘선릉 전경’. 선릉은 성종과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의 ‘동원이강릉’이다. 임진왜란 때 왜구가 파헤쳐 불태웠기에 시신은 없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6.04.
‘선릉 전경’. 선릉은 성종과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의 ‘동원이강릉’이다. 임진왜란 때 왜구가 파헤쳐 불태웠기에 시신은 없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6.04.

◆수렴청정 할머니, 공부하며 기다린 손자

성종 집권 초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섭정하고 장인 한명회도 거들었다. 또한 신숙주, 홍윤성, 김질 등 9명의 원로대신이 있었다. 성종은 이들과 원만한 군신관계를 유지했다. 재상의 임명도 세조의 연장선상에서 했다. 재위 25년간 윤자운, 신숙주, 정창손, 윤필상, 이극배 등 5명의 영의정이 있었으며 이들의 평균 임기는 5년이었다. 조선 평균 10.3명 임기 2년보다 길었다. 신숙주와 정창손은 세조 때 영의정을 지냈는데 재 중용했다. 정희왕후, 소혜왕후의 영향으로 작용한 것이다. 따라서 재위 내내 태조나 세조처럼 군신 또는 신하들 간에 큰 불상사가 없었다.

그러나 성종은 훈구대신의 득세를 탐탁해하지 않았다. 시간은 성종의 편이었다. 구치관, 최항, 신숙주, 홍윤성 등 나이 든 훈구파 핵심들이 차례로 죽었다. 성종이 20세가 되자 대왕대비의 수렴청정도 끝났다. 한명회와 대신들이 반대했으나 1476(성종 7)년 1월 13일 대왕대비는 “국가의 모든 정무는 마땅히 왕이 해야 한다. 간혹 모후가 정무에 참여하더라도 임시 편의일 뿐이다. 주상께서 어리시니, 성지(임금의 지혜)가 있음에도 겸손히 과부(대왕대비 자신을 지칭)에게 모든 시책과 조치를 물어 시행하였고, 조정 대신들도 내게 청하니, 마지못해 따랐다. 하지만 지금은 임금이 장성하고 학문도 성취되어 만기(임금의 업무)를 재결함이 합당하니, 내가 다시 간섭할 바는 아니다. 의정부에서는 중앙과 지방에 알아듣도록 타이르라”고 했다. 성종의 친정이 시작됐다. 대왕대비 정희왕후는 이후 정사에 나서지 않았다.

강남 한복판의 선릉은 시민에게 숲과 맑은 공기, 산책로, 역사를 제공하고 있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 지정 당시 선릉이 가장 땅값이 비싼 지역임에도 왕릉이 잘 보존돼 좋은 인상을 줬다고 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출처: 선정릉역사문화관) ⓒ천지일보 2023.06.04.
강남 한복판의 선릉은 시민에게 숲과 맑은 공기, 산책로, 역사를 제공하고 있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 지정 당시 선릉이 가장 땅값이 비싼 지역임에도 왕릉이 잘 보존돼 좋은 인상을 줬다고 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출처: 선정릉역사문화관) ⓒ천지일보 2023.06.04.

◆공부와 경청의 왕, 신하들과 소통

신료들은 성종을 후하게 평가했다. 이는 성종의 타고난 자질과 정희왕후의 가르침에 따랐기 때문이다. 정희왕후는 세자를 거치지 못한 성종을 ‘강훈련’시켰고 결국 공부왕으로 만들었다. 구체적으로 학습 방법까지 주문했다. 1470(성종 1)년 1월 10일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세조께서 예종에게 ‘글을 외우지 말라. 기운이 다 없어진다’고 했다. 한 번 읽으니 이해 못 하는 곳이 있을까 염려된다. 음과 해석을 한 번씩 읽음이 어떻겠는가?”라고 하니 원상 윤자운 등이 “성상의 옥체가 염려되오니, 대문만 해석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응했다. 공부 시간도 대단했다. 경연(왕이 경학과 본분을 배움)을 한 횟수가 9000회를 넘어 세종(1898회)이나 영조(3458회)를 능가했다. 성종실록에는 “경연에 나아갔다”라는 문구가 3703회로, 여기에 조강(아침), 주강(낮), 석강(저녁), 야대(야간)가 더해졌다. 2월 16일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해가 길어지니 주상이 석강에 나아갈 만하다. 환시(왕을 시종하는 관리)는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자주 대신을 접견하면 계옥(임금에게 충언)이 많지 않은가”라고 하니 이에 따랐다.

성종은 대왕대비와 신하들을 수시로 만나 대화하고 협의했다. 경연은 물론 조참(매주, 관원 모두), 상참(매일, 당상관 이상), 조하(주2회, 관원 전원)를 포함해 신료들과 1만여회가 넘는 자리를 했고, 재위 25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이는 성종실록에도 ‘논하였다’ ‘의논하였다’ ‘묻다’ ‘살피게 하다’ ‘하사하다’와 같은 단어가 2767회로 사흘에 한 번씩 나타났다. 학습과 소통의 최고 왕이었다.

종묘 성종태실이다. 성종의 태실은 원래 경기 광주에 있었으나 1928년 전국의 태실을 서삼릉으로 모으면서 가장 온전한 성종태실만 종묘로 옮겼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6.04.
종묘 성종태실이다. 성종의 태실은 원래 경기 광주에 있었으나 1928년 전국의 태실을 서삼릉으로 모으면서 가장 온전한 성종태실만 종묘로 옮겼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6.04.

◆정치적 안정, 유교적 실천 이뤄

성종시대는 ‘태평성대(太平聖代)’라 일컫는다. 세종대보다 국방, 과학 등에서 못 미친다고 하지만 정치적 안정과 유교적 실천이 이뤄졌다. 신하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는 일이 없었고 왕이 자신을 위해 이를 조장하지 않았다. 성종은 복잡한 권력구조에서 슬기로이 처신하며 왕권을 확립했다. 성종은 1476(성종7)년 친정하자 훈구파 한명회를 물러나게 했고, 사림 세력을 등용했다. 삼사의 기능을 되살려 1478년 홍문관을 호위기구로 만들었고 사림의 인물을 발탁해 왕의 정치기반을 강화했다. 사간원(대사간), 사헌부(대사헌)를 ‘양사’라 하며, 여기에 홍문관(대제학)을 더해 ‘언론 3사’, 형조(형조판서)를 더하면 ‘삼성’이라 한다. 성종은 교육문화진흥에 힘을 기울여 세종과 세조에 이어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를 완성했다. 유교 국가 건설을 위해 숭유억불을 해 삼강오륜 보급, 계급과 남녀노소 분별을 강조했다. 도첩제(승려 허가)를 폐지하고 금승법(승려가 되지 못함)을 시행했다. 1474(성종 5)년 ‘경국대전’, 1492년 ‘대전속록’을 간행했다. 1491년 사가독서제(문신에 휴가를 줘 공부토록 함)를 재개했다. 또한 ‘여지승람’ ‘동국통감’ ‘동문선’ ‘오례의’ ‘악학궤범’ 등을 간행했다. 북방을 방비해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을 소탕했다. 

선릉 ‘봉은사’는 통일신라 때 지은 견성사로, 선정릉을 지키는 원찰(願刹,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사찰)이다. 1495년 선릉 조성 당시 정현왕후가 성종의 제를 지냈고 1498년 현재 자리로 옮겨 증축하면서 봉은사라 불렀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6.04.
선릉 ‘봉은사’는 통일신라 때 지은 견성사로, 선정릉을 지키는 원찰(願刹,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사찰)이다. 1495년 선릉 조성 당시 정현왕후가 성종의 제를 지냈고 1498년 현재 자리로 옮겨 증축하면서 봉은사라 불렀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6.04.

이처럼 소통과 업적을 이어가던 성종은 1494(성종 25)년 12월 24일 오시(11~13시) 대조전에서 눈을 감았다. 실록에서 성종을 평하기를 “임금은 총명 영단하시고, 어질고 검소하며, 효도와 우애를 다하시었다. 학문을 좋아하고 활쏘기·서화에 뛰어나셨다. 대신을 존경하고 대간을 예우하셨고, 어진 신하를 중히 여겼으며, 형벌에 명확·신중하셨다. 유교의 도를 숭상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절의를 칭찬 장려하셨고, 대국을 섬기고, 신의로써 대하시었다. 늘 삼가고 문무와 사방을 함께 아우르니 그 덕과 다스림이 중국 삼대(하·은·주나라)의 성왕도 더할 수 없었다”며 애도했다. 묘호는 성종(成宗)이니 ‘이루고 완성한 왕’이라고 할 것이다.

선릉 재실 옆의 500년 넘은 은행나무는 방문객에게 인기가 높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6.04.
선릉 재실 옆의 500년 넘은 은행나무는 방문객에게 인기가 높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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