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대 왕 단종의 비 정순왕후 능

15세에 조선 최초로 왕비에 간택
단종 폐위된 후 궐문 밖에 내쳐져
64년을 외로이 지내다 눈을 감아
중종 대 이르러 단종과 함께 복위

이의준 왕릉답사가
이의준 왕릉답사가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경기 남양주에 있는 ‘사릉(思陵)’은 17세의 젊은 남편 단종(조선 제6대 왕)을 잃고 한 많은 세월을 보낸 정순왕후 송씨의 능이다. 왕후는 15세에 조선 최초의 간택 왕비가 됐다. 부귀영화를 손에 쥐는가 싶더니 불과 몇 년 만에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남편인 왕은 폐위되고 유배되고 죽임을 당했다. 친정은 멸문하고 본인은 폐비가 되어 궐문 밖으로 내쳐졌다. 생이별과 죽음은 부부를 영영 갈라놓았다. 왕후는 자식도 없이 단종 사후 64년을 외롭고 힘들게 지내다 82세에 세상을 떴다. 그나마 양아들 정미수(단종 여동생 경혜공주의 아들)가 있었기에 해주정씨 묘역에 무덤이 마련됐다. 왕과 왕비에서 쫓겨나 242년 통한의 세월이 흘렀다. 세상은 야속하지만은 않았다. 숙종 대(제19대 왕)에 이르러 제6대 왕이었던 이홍위는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복위되고, 장릉의 묘호도 지어졌다. 왕비 송씨는 정순왕후라 불리고 사릉의 호가 지어졌다. 신위는 종묘에 봉안됐다. 왕후가 떠난 지 502년 서울 곳곳에 남겨진 발자취를 돌아봤다.

‘사릉 전경’. 사릉은 군부인의 묘로 조성돼 규모가 작지만 공원 같은 느낌이다. 지난해 정자각 좌우의 수라간과 수복방이 복원됐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11.
‘사릉 전경’. 사릉은 군부인의 묘로 조성돼 규모가 작지만 공원 같은 느낌이다. 지난해 정자각 좌우의 수라간과 수복방이 복원됐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11.

◆단종의 반대에도 왕비 간택

정순왕후는 조선 최초로 간택된 이른바 ‘공개 선발’된 왕비이다. 현직 왕이 왕비를 맞은 최초의 사례였다. 그러나 왕비선발은 순탄치 않았다. 1452년 5월 14일 문종이 세상을 떴고 18일 단종이 즉위했다. 단종은 1년 8개월간 정사를 익히며 문종의 3년 상을 치르고 있었다. 결혼할 처지가 아님에도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이 치고 나갔다. 1454년 1월 1일 세조를 비롯한 삼정승과 양녕대군, 효령대군, 부마, 종친, 문무백관이 단종에게 왕비를 맞을 것을 청했다. 단종은 거부했다. 세조는 두 번을 더 청했다. 단종은 “아무리 그래도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라 했다. 그러함에도 세조는 강행했다. 1월 4일 한확, 김군, 박팽년과 함께 창덕궁에서 처녀간택을 진행했다. 1월 6일에는 효령대군과 정인지 등 8명이 간택을 위한 회의를 했으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수양대군의 부인(훗날 정희왕후), 숙빈과 혜빈, 공주들도 간택에 참여했다. 왕비 책봉을 건의한 지 일주일이 지나서 세조 등 17명의 왕실 어른과 정승 등이 최종 왕비 후보자 3명을 정했다. 풍저창부사 송현수의 딸, 예원조사 김사우의 딸, 전 사정 권완의 딸이었다.

정순왕후가 아침저녁으로 단종의 명복을 빌던 ‘동망봉(東望峰)’이 있던 곳이다. 영조가 친히 ‘동망봉’이라 쓰고 바위에 새겼으나 일제 때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가 없어졌다고 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11.
정순왕후가 아침저녁으로 단종의 명복을 빌던 ‘동망봉(東望峰)’이 있던 곳이다. 영조가 친히 ‘동망봉’이라 쓰고 바위에 새겼으나 일제 때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가 없어졌다고 한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11.

1454년 1월 8일 창덕궁에서는 임금 단종의 배우자를 뽑는 행사가 열렸다. 심사위원은 효령대군(세종의 형), 수양대군을 비롯한 종친이 맡았다. 최종 3명이 삼간택이 됐는데 최종 1명은 왕비가 되고 2명은 후궁이 되는 것이다. 왕비로는 타고난 성품과 검소의 미덕을 인정받은 송현수의 딸이, 후궁은 김시우와 권완의 딸로 정해졌다. 1월 9일 왕비 책봉 후 진상하고 다음날 10일에는 비(왕비)와 잉(후궁)을 아뢰었다. 1월 12일 면복을 갖추고 근정전에 나아가 이보, 조혜를 보내 송현수의 집에 납채(결혼을 허락함)를 했다. 그리고 1월 22일 송씨를 책봉해 왕비로 삼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1월 23일 단종은 “왕비를 맞는 일은 신료의 청에 쫓겨서 그랬다. 맘이 편치 않으니 정지시켜라”고 했다. 대신들이 3번에 걸쳐 왕에게 청하고 세조와 왕실이 모두 나섰다.

‘영도교’는 청계천에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 가면서 정순왕후와 헤어진 다리이다. 지금의 다리는 2005년에 청계천을 복원하며 세웠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11.
‘영도교’는 청계천에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 가면서 정순왕후와 헤어진 다리이다. 지금의 다리는 2005년에 청계천을 복원하며 세웠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11.

◆왕비의 탄생, 가문의 부귀영화?

결국 단종은 1월 24일 효령대군 집에서 왕비 송씨를 맞이했다. 신랑신부가 만나는 장소인 ‘동뢰’를 설치하고 교태전에서 잔치를 열었다. 1월 25일 왕비에게 하례하고 28일 송씨 생일에는 백관이 하례하고 표리(表裏)를 바쳤다.

15세의 왕비는 1440년 풍저창(관청의 비용을 담당)의 종6품직인 송현수와 어머니 여흥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송씨 가문은 고려 때부터 세도가였다. 중간에 풍파를 겪기는 했지만 조선 왕실은 물론 막강한 여흥 민씨와 혼사를 이어갔다. 송현수는 판중추부사(종1품) 송복원의 아들인데 전구서(제사용 가축을 담당) 9품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송현수의 부인은 민소생의 딸이며 한명회의 부인은 형 민대생의 딸이니 송현수와 한명회가 민씨 형제의 사위였다. 또한 송현수의 처남이자 정순왕후의 고모부가 세종의 8남 영응대군(세종 부부가 가장 사랑하고 문종, 세조가 아낀 왕자)이었다. 그 관계는 1445년 4월 25일 실록에 “영흥 대군 부인의 오빠 송현수는 벼슬이 없이 전구 부승으로 뛰어 임명되니 은혜를 줌이 특별히 후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결국 왕실-송현수-한명회의 삼각관계로 친분과 혼인이 얽혀있었다. 왕실은 왕비가 된 송씨 집안에 면포 6백필(1필은 옷감 16m), 쌀 3백석(1석은 144㎏), 황두 1백석이 내려졌다. 후궁에도 면포 150필, 정보 150필, 쌀과 콩을 각각 150석씩 내렸다. 1454년 단종은 외척 송현수를 동지돈녕부사(정2품)로써 여량군의 관직에 임명했다. 그리고 각종 왕실 연회나 행사에 참석하도록 했다. 세조 또한 송현수와 친구였다. 송현수가 정치적으로 어렵게 되자 세조가 감쌌는데 1456년 6월 13일 실록은 “이사철이 송현수의 역모를 의심하여 고하자 왕이 ‘내 굳게 고집하여 듣지 아니한 것은 경이 나의 옛 친구인 까닭이다’하니, 송현수가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였다”고 기록했다. 1457(세조 3)년 8월 21일 실록은 “대사헌이 송현수를 처치하라고 하자 세조는 ‘나의 옛 친구이니 이 정도면 족하다’며 처벌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비각’. 궁중에서 나간 왕비나 공주 등이 출가해 머물던 ‘정업원’의 옛터를 알리는 비각이다. 영조가 건립하도록 하고 직접 현판의 글도 썼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11.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비각’. 궁중에서 나간 왕비나 공주 등이 출가해 머물던 ‘정업원’의 옛터를 알리는 비각이다. 영조가 건립하도록 하고 직접 현판의 글도 썼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11.

◆선택됐만 그것은 ‘승자의 독배’

아버지 송현수와 어머니 민씨의 배경으로 간택된 왕비는 부러울 게 없었다. 그러나 왕후의 운명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수양대군은 단종 주변 인물을 제거하고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다. 그리고 상왕을 삼더니 이내 노산군으로 강등한 후 영월로 유배를 보냈다. 왕후는 청계천 영도교에서 남편과 이별해야 했다.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하자 단종과 친정아버지 송현수 등이 처형을 당했다. 왕후는 궁궐에서 쫓겨나 자식도 없이 외롭고 힘든 삶을 지탱해야만 했다. 정업원(궁중의 여인들이 노후에 기거하던 절)에서 지냈고, 동망봉에 올라 동쪽 영월을 바라보며 어린 나이에 죽은 남편(단종)을 생각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왕후는 자식이 없었다. 다만 양아들이자 조카인 정미수(단종의 친누나 경혜공주와 남편 정종사이의 아들)가 있었다. 정미수는 아버지 정종이 사육신사건과 모반죄로 능지처참에 처했음에도 중종 대까지 벼슬을 해 한성부판윤(현 서울시장)을 거쳐 정1품에 올랐다. 왕후는 양아들 정미수를 아꼈다. 홀로된 정미수의 부인에게 남편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왕후의 재산을 넘겨주었다. 1518(중종 13)년 7월 5일 실록은 “노산군 부인이 자기의 노비와 재산과 집을 정미수의 아내에게 주기를 청하고 정미수의 제사를 위해 후사를 세우게 해 달라고 했다. 임금은 후사는 세우지 말되, 송씨의 말대로 재산과 집은 주라”고 했다.

1521(중종 16)년 6월 6일 정순왕후가 82세에 세상을 뜨자 예조가 아뢰기를 “노산 부인의 상례는 대군부인의 예에 의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했다. 왕후와 함께 궁에 들어온 숙빈 김씨는 86세, 숙빈 권씨는 80까지 살았다고 한다. 왕후는 죽어서 해주정씨의 묘역에 자리했다.

사릉 우측에 위치한 ‘해주정씨 묘역’.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는 해주정씨 정종과 결혼해 아들 정미수를 뒀는데, 정미수는 훗날 자식이 없는 정순왕후의 양자가 된다.(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11.
사릉 우측에 위치한 ‘해주정씨 묘역’.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는 해주정씨 정종과 결혼해 아들 정미수를 뒀는데, 정미수는 훗날 자식이 없는 정순왕후의 양자가 된다.(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11.

◆결국 왕후의 지위 되찾다

노산군 부인의 묘가 왕릉이 된 것은 1699년 숙종 24년에 이뤄졌다. 단종의 복위가 이뤄지자 정순왕후로 복위되고 무덤은 일반 묘에서 왕릉으로 승격됐다. ‘평생 남편을 그리워했다’하여 사릉(思陵)으로 능호가 지어졌다. 영조 대에는 정순왕후에 대한 예를 다했다. 1770(영조 46)년 윤5월 9일 운남군 이진이 사릉에 비각이 없는 일로 상소했고 이듬해 사릉을 즉시 보수하지 않은 예조 판서 임창수를 파직하기도 했다. 1771년 8월 28일에는 “임금이 정업원 옛터에 누각과 비석을 세우고,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다섯 자를 써서 내렸다. 정업원은 단종 대왕의 왕후 송씨가 왕비에서 물러난 후 거주하던 옛터이다”라고 했다.

사릉의 ‘예감’은 축문을 태운 후 그 재를 묻는 곳이다. 정자각 뒤의 좌측과 능침공간 하단 사이에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11.
사릉의 ‘예감’은 축문을 태운 후 그 재를 묻는 곳이다. 정자각 뒤의 좌측과 능침공간 하단 사이에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4.11.

9월 6일에는 “임금이 왕세손을 거느리고 창덕궁에 이어서 정업원에 나아갔다. 임금이 정순왕후의 옛일을 묻자 승지 임희교가 전 참판 정운유가 자세히 알고 있다”하니 그를 불렀다. 임금이 “성후(정순왕후)께서 언제 이곳에 와서 거주하셨는가”하니 “어느 해인지 모르오나 당시 세조께서 시내에 정순왕후의 집을 내려 주려 했으나, 왕후께서 동문 밖의 동쪽 향에 살기를 원하니 그리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곧 정업원 기지입니다. 성후께서 친히 이곳에서 단종의 제사를 행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신의 선조 정미수로 하여금 시양하도록 정한 후 그 집으로 이어하셨는데, 정업원 주지 노산군 부인이라고 일컬었습니다”라 하였다. 임금이 “정미수는 정순왕후와 어떤 친척인가”하니 “문종의 외손이고, 경혜공주의 아들입니다. 이 때문에 시양하게 하셨고, 신의 집에서 숨을 거두셨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정운유의 품계를 올려주도록 명했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정업원 유지에 거둥해 비각을 봉심(奉審: 임금의 명을 받들어 능소나 묘우를 보살핌)하고, 사배례(四拜禮)를 행한 다음 “성후의 영령께서 오늘 반드시 이곳에 임어하셨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친히 ‘동망봉(東望峰)’ 세 글자를 쓰고 정업원과 마주한 봉우리 바위에 새기도록 명했는데, 정순왕후가 영월 쪽을 바라다보던 언덕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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