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대 왕 문종과ᆞ 현덕왕후의 현릉ᆞ
28년간 ‘준비된 왕’, 정통성도 지녀
온화한 인품에 신하들 “봄바람 같아”
잇따른 부모 3년상에 건강 악화돼
세 번째 부인, 단종 낳고 세상 떠나

이의준 왕릉답사가
이의준 왕릉답사가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현릉은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동원이강릉(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각자 봉분을 둠)이다. 경기도 구리 동구릉에 태조 건원릉 이후 46년 만에 들어선 두 번째 능이다. 원래 문종 혼자 있었는데 나중에 왕후가 옮겨왔다. 1441년 세자빈 권씨(현덕왕후)가 아들(단종)을 낳고 이튿날 세상을 뜨자 경기 안산에 묻혔다. 그러나 문종은 1452년 승하해 현릉에 자리했다. 1456년 세조가 단종의 복위에 가담한 현덕왕후의 친정을 멸하고, 왕후도 폐한 후 무덤도 파헤쳐 버렸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1512년 중종이 왕후를 복위하고 문종의 현릉에 함께 모셨다.

문종은 조선 최초의 적장자(정실부인의 맏아들)이다. 8살에 왕세자가 되어 28년간 ‘준비된 왕’ ‘최장의 세자’ ‘외모와 성품, 처세가 뛰어난 왕’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개인은 외로웠다. 두 명의 부인과 이혼하고 세 번째 부인과 사별했다. 왕위에 올라 왕비도 없이 2년 3개월 재위하다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래서 511년 세월을 지켜온 현릉을 지나노라면 ‘건강’과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느낀다. 과연 문종 부부는 강건하게 잠들어 있을까.

제5대 왕 문종과 현덕왕후의 ‘동원이강릉’이다. 이는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과 상설을 조성한 능을 뜻한다 (제공: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3.14.
제5대 왕 문종과 현덕왕후의 ‘동원이강릉’이다. 이는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과 상설을 조성한 능을 뜻한다 (제공: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3.14.

◆완벽하게 ‘준비된 왕’

1421년 10월 27일 이향(1414~1452)은 왕세자가 됐다. 조선 최초로 적장자로서 왕이 된 인물이다. 조선의 임금 27명에서 적장자는 문종과 단종, 예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경종, 순종의 8명에 불과하니 아무리 적장자라 해도 왕이 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적장자는 어릴 적부터 왕실의 기대, 엄중한 예의범절, 엄격한 제례 의식, 강도 높은 학습 등을 요구받는다. 문종은 할아버지 태종의 장손이자 아버지 세종의 맏아들로서 28년 4개월의 교육과 훈련을 거쳐 왕이 됐다. 출중한 외모와 뛰어난 공부로 대신들을 감탄시켰고 명나라 사신조차 극찬했다. 실록은 “세자가 책봉 의식에서의 동작이 다 예에 맞게 하니, 여러 신하들이 탄복하였다”고 했다. 세자 나이 10살. 실록은 “왕세자가 비로소 논어를 읽었다”고 전한다. 1438년 3월 19일 세종은 “세자가 ‘사서’ ‘오경’ ‘통감강목’을 읽었으니, 중단치 말고 ‘직해소학’과 ‘충의직언’을 가르치라”고 했다. 또한 무인의 역량도 필요하다며 “세자에게 말타기와 활쏘기를 가르치라”고 했다.

‘현릉’. 정자각 뒤의 왼쪽 언덕에 문종, 오른쪽 언덕에 현덕왕후의 봉분이 좌우로 위치한 동원이강릉이다. 동구릉에서 태조의 건원릉 이후 두 번째로 조성된 왕릉이다. 사진은 현릉의 여름 모습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3.14.
‘현릉’. 정자각 뒤의 왼쪽 언덕에 문종, 오른쪽 언덕에 현덕왕후의 봉분이 좌우로 위치한 동원이강릉이다. 동구릉에서 태조의 건원릉 이후 두 번째로 조성된 왕릉이다. 사진은 현릉의 여름 모습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3.14.

◆왕세자, 사실상 왕의 업무 대행

1437년 1월 3일 세종이 “이조와 병조의 임명과 군국의 중요한 일은 내가 하고 나머지는 왕세자가 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왕의 일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1442년 동궁에 첨사관을 두어 세자가 서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대신들은 일제히 반대했다. 8월 2일 집의 이사철을 시작으로 매일 사헌부, 사간원, 대사헌 등이 한 달 내내 11번이나 상소를 했다. 그러나 세종은 더 나아가 병조에게 “가을부터 강무(군사훈련)를 세자가 대행토록 하라”고 했다. 1444년에는 드디어 세자가 백관의 조참을 받기에 이르렀다. 7년이 넘게 대리청정(왕의 직무를 봄)을 하면서 사실상 왕의 정사를 돌본 최초의 왕세자였다.

다음해에는 아예 왕의 자리를 넘기겠다고 했다. 영의정 황희 등이 반대했으나 세종은 “눈이 어둡고 기운이 쇠하여, 약한 몸으로 억지로 일하면 오래 살지 못하니 한가히 수양하여 한 두 해 목숨을 연장하면 다행 아니겠느냐” 하니 대신들도 “그리하옵소서”라고 했다. 1445년 1월 이후 세자는 연희궁에 머무는 세종께 조회하고 궁으로 돌아와 일을 했으며 이는 해가 바뀌어도 이어졌다.

현릉의 가을 모습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3.14.
현릉의 가을 모습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3.14.

◆순탄치 않은 결혼생활, 두 세자빈 폐출

문종은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아 왕비가 없는 유일한 왕이었다. 14세에 맞은 첫 부인은 4살 많은 휘빈 김씨였다. 1427(세종 9)년 왕세자빈이 됐으나 세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찾지 않았다. 이를 못 견딘 그녀는 압승술(壓勝術: 주술을 쓰거나 주문을 외어 음양설의 화나 복을 누르는 일)을 일삼았고 이 사실은 왕과 왕후에게 알려졌다. 1429년 7월 18일 세종은 “정말 어리석고 못나고 총명하지 못하다. 덕을 잃어 세자의 배필이 될 수 없다”며 세자빈을 폐했다.

두 달 후 두 번째 부인은 동갑내기 순빈 봉씨였다. 이번에는 미모가 있는 여인을 택했다. 그러나 부부는 소원했고 자식이 없었다. 그러던 중 세자의 후궁 승휘 권씨(훗날 현덕왕후)가 임신했다. 세자빈 봉씨는 불안해하며 민감해졌다. 세종은 “정부인 봉씨에게서 아들을 두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봉씨는 임신 후 유산했다는 거짓말했다. 또한 1435년 11월쯤부터 궁녀 소쌍과 동침한 사실이 알려졌고 결국 폐출됐다.

문종의 태를 모신 것을 기념하는 비인 ‘태실비’다. 사도세자 태실비와 함께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원래의 위치로 옮겨졌다. 영조 11(1735)년에 세웠으며 경북 예천 명봉사에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3.14.
문종의 태를 모신 것을 기념하는 비인 ‘태실비’다. 사도세자 태실비와 함께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원래의 위치로 옮겨졌다. 영조 11(1735)년에 세웠으며 경북 예천 명봉사에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3.14.

◆세번째 부인, 단종 출산 후 사망

이번에는 문종이 직접 나섰다. 문종은 후궁 승휘 홍씨를 세자빈으로 올리고 싶어 했다. 그러나 세종은 “권씨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덕과 용모는 같은데, 권씨 나이가 조금 많고 관직이 높다. 후일 아들을 낳는 것도 그렇다. 권씨는 이미 딸을 낳았으니, 의리상 세자빈으로 세워야 될 것이다”며 권씨를 간택했다. 성품이 단아하고 효행이 있어 세종과 왕후의 총애를 받았다. 1437년 세자빈이 됐고 1441년 왕실에서 염원하던 아들(단종)을 낳았다. 그러나 병이 악화돼 2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경기도 안산에 묻혔다. 1450년 문종은 즉위하자 현덕왕후로 추승하고 무덤을 ‘소릉’으로 승격시켰다. 2년 후 1452년 문종이 승하했고 경기도 구리(동구릉)에 현릉에 모셔졌다. 그러나 세조가 즉위 후 현덕왕후 권씨의 친정어머니와 남동생이 단종 복위에 연루돼 처형당했다. 왕후도 폐위됐고 소릉은 묘로 격하되고 파헤쳐졌다. 1512년 중종에 이르러 다시 왕후로 복위됐고 다음 해 문종의 곁으로 천장했다. 이로써 사후 72년 만에 부부는 현릉에서 해후했다.

현종 때 제작된 ‘공주충청감영측우기’이며 보물로 지정됐다. 측우기는 문종이 세자 시절 처음 발명했다. 1441년 4월 29일 세종실록은 “세자가 구리 그릇을 만들고 궁중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괴인 푼수를 실험하였는데”라고 적고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3.14.
현종 때 제작된 ‘공주충청감영측우기’이며 보물로 지정됐다. 측우기는 문종이 세자 시절 처음 발명했다. 1441년 4월 29일 세종실록은 “세자가 구리 그릇을 만들고 궁중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괴인 푼수를 실험하였는데”라고 적고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3.14.

◆측우기 발명, 군사 분야에 해박

문종은 뛰어난 자질과 역량을 지녔다. 체계적인 세자교육도 거쳤다. 어릴 때부터 총명해 학문을 좋아했고 1421년 왕세자가 되어 성균관에 입학했다. 서사를 강론하면서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 백성을 사랑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녔으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정사에 힘썼다. 1452년 9월 1일 묘지문에는 “외직의 관리들에게 백성을 사랑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며 백성의 고통을 밀봉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탐관오리를 물리쳐서 인심이 기뻐하게 되었다. 늘 ‘어찌하면 우리 백성들이 탈 없이 편안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고 했다. 또한 “신하들에게 온화하여 마치 봄바람 속에 있는 듯하여, 말이 적중하지 않더라도 너그럽게 용납하니 사람들이 마음을 터놓고 말하였다”고 했다.

4품 이상의 윤대를 6품 이상으로 넓혀 폭넓게 경청했다. 국민통합에도 힘을 썼다. 고려 왕씨 후손의 작위를 높이고 땅과 노비를 줘 제사를 받들게 했다. 또한 고려의 덕 있는 명신을 사당에 배향하도록 했다. 측우기를 발명했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이 편찬됐으며 군사 분야에 업적을 보여 ‘동국병감’을 짓게 하고, 오위를 설치하고, ‘진법’을 만들어 사졸들을 교련하고, 군정을 정비했다.

문종의 태를 모신 항아리인 ‘조선토자 문종 태항아리’.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3.14.
문종의 태를 모신 항아리인 ‘조선토자 문종 태항아리’.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3.14.

◆잇달아 부모 3년 상 치러

무난히 국정을 이끌었다. 그러나 개인사는 불행했다. 이혼과 사별, 두 자녀의 보살핌 등 가정적 불안정과 부모의 3년 상 등으로 과로와 스트레스로 건강을 지키기 어려웠다. 특히 부모의 3년 상은 문종의 건강을 크게 해쳤다. 1446년 어머니(소헌왕후)가 세상을 떴다. 실록은 “세자는 어머니의 병이 더함으로부터 음식도 들지 아니하고 밤새도록 잠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4년 후 세종이 승하하자 역시 식음도 않고 겨울 여막에서 지내며 빈전을 드나들었다. 종기가 재발하자 신료들이 놀라서 “몸을 추스르소서”라고 하니 “조리는 하되 자리를 물러서지는 못한다”고 했다. 2월 22일 즉위한 더 많은 일을 해야 했다. 신료들은 “소찬(고기가 없는 반찬의 식사)을 없애소서”라고 하니 “3년 상이 안 끝났는데 차마 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했다. 그해 여름 8월 문종에게 종기가 생겨 정사를 정지했다. 몸이 쑤시고 머리 또한 아프다며 제사를 나가지 못했다. 11월 18일에는 신료들에게 “문안하지 말라”고 했다. 종기에 고름이 그치지 않았다. 해를 넘긴 아프고 낫고를 반복했다. 안평대군과 신료들을 종묘, 사직, 명신과 대천에 보내 기도를 올리게 했다. 그러나 며칠 후 5월 14일 경복궁 강녕전에서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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