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장릉, 추존 원종과 인헌 왕후의 능
아들 인조, 효성과 뚝심으로 추존
3대 가족이 서로 아끼고 사랑해
‘흥경원’ 불리다 ‘장릉’으로 명해
모친 인빈 김씨, 주변 처세 뛰어나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경기도 김포에 있는 장릉(章陵)은 왕세자가 아니었으나 추존 왕이 된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쌍릉이다. 원종은 인조의 아버지로서 선조의 5남이자 어머니 후궁 인빈 김씨의 3남으로 태어났다. 1619(광해군 11)년 정원군의 신분으로 세상을 뜨니 이듬해 양주 곡촌리(현 남양주시 금곡동)에 묻혔다. 1623년 아들 인조가 즉위하니 대원군이 됐다. 1626(인조 4)년에 부인 구씨(계운궁)가 세상을 뜨니 김포 육경원에 안장했고, 이때 대원군의 무덤을 흥경원으로 명했다. 이듬해 육경원으로 옮겨 합치고 흥경원으로 통칭했으며 1632(인조 10)년에 정원대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되니 비로소 장릉이라 명했다. 인조는 10여년에 걸친 신하들과의 논쟁 끝에 부모를 왕과 왕비로 추존했다. 같은 처지의 선조도 못한 일이었다. 원종은 부모 선조와 인빈, 부인, 자식까지 모두 우애가 깊은 가족의 덕으로 마침내 추존왕의 반열에 올랐다. 겨울 햇살이 가득한 장릉을 찾아가 본다.    

김포 장릉 전경이다. 조선 두번째 사후에 추존된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이다. 첫 번째 추존왕은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로 덕종이 됐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17.
김포 장릉 전경이다. 조선 두번째 사후에 추존된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이다. 첫 번째 추존왕은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로 덕종이 됐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17.

◆후궁의 자손들, 연이어 왕이 되다   

선조는 후궁의 손자로서 자신의 왕위를 적통이 잇기를 원했다. 그러나 정비 의인왕후는 자식이 없었고 후궁에게 13명의 왕자를 뒀다. 먼저 공빈 김씨는 임해군과 광해군이 있었으나 광해군을 낳고 2년 후(1577년) 24세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1577(선조 10)년 5월 1일 실록에는 “공빈 김씨가 졸하였다. 임해·광해 두 왕자를 낳았다. 본디 상의 총애를 입어 후궁들이 감히 사랑에 끼어들지 못하였다”고 했다. 인빈은 공빈이 죽은 해부터 17년간 9명의 자손을 낳으며 선조의 사랑과 신뢰를 움켜쥐었다. 실록은 “소용(인빈 김씨)이 왕을 곡진히 보호하여 특별한 은총을 입어 방을 독차지하니 공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고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벌어지니 조정은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 인빈의 2남 신성군이 물망에 올랐지만 그해 14살에 죽고 말았다. 결국 17세의 광해군이 세자가 됐다. 1600년 광해군을 보살펴 키운 의인왕후가 승하했다. 2년 후 인목왕후가 책봉됐고 1604년 영창대군을 낳았으니 왕세자의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1608년 선조가 승하하니 33살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김포장릉역사문화관으로, 능주의 생애와 추존 이유, 장릉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17.
김포장릉역사문화관으로, 능주의 생애와 추존 이유, 장릉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17.

◆선조도 광해군도 인정한 정원군 부부   

광해군 즉위 이듬해 친형 임해군이 처형되고 영창대군도 유배 후 죽임을 당했다. 이미 여러 왕자가 일찍 죽었고 나머지는 나이가 어렸다. 광해군과 가장 가까운 종친은 5살 아래 정원군이었다. 정원군은 1604년 호성공신(의주 피난길에 왕을 모신 자) 1등에 봉해졌다. 선조는 정원군과 그 아들들을 아꼈다. 1607(선조 40)년 10월 30일 선조가 전교하기를 “나는 심병이 매우 깊다. 정원군의 장자(훗날 인조)는 13세인데 내 앞에서 유희하며 매번 그림을 그려 바치니 한바탕 웃곤 한다. 우울한 마음이 씻어 내린다. 할아비 마음을 기쁘게 해주니 상을 주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광해군도 정원군의 아들들을 부러워했다. 인빈은 선조의 총애에도 불구하고 교만하지 않고 세자 광해군의 편에서 처신했다. 1613년 5월 16일 실록에는 “선조가 한창 동궁을 노여워했으나 인빈이 나서서 풀어졌다”고 했다. 인빈의 졸기에 논하기를 “공빈이 죽자 선조는 점차 동궁(광해군)에 뜻을 두지 않으니 이에 대비와 후궁들이 동궁을 불경스럽게 대했다. 그러나 유독 인빈은 동궁을 후히 섬기며 동궁이 원하는 바를 선조에게 아뢰어 이루게 해주었다”고 했다. 광해군이 말하기를 “내가 서모(인빈)의 은혜로 오늘이 있으니, 그 의리를 감히 잊지 못한다”고 했다.

장릉 봉분이다. 좌측에 원종(정원군, 정원대원군), 우측에 인헌왕후(연주부부인, 계운궁)가 모셔져 있다.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져 있지 않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17.
장릉 봉분이다. 좌측에 원종(정원군, 정원대원군), 우측에 인헌왕후(연주부부인, 계운궁)가 모셔져 있다.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져 있지 않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17.

정원군은 순화군, 임해군 등과 더불어 말썽을 피운 왕자였다. 조정은 여러 차례 정원군의 파직을 청했으나 선조는 그냥 넘어가곤 했다. 광해군은 정원군을 가장 가까운 종친으로 여겼다. 1610(광해 2)년 4월 세자의 혼례에 정원군을 존속 종친으로 삼았고 7월 경창군(선조 후궁 정빈 홍씨 아들)의 혼례도 주관케 했다. 정원군도 광해군에 겸손했다. 1611(광해 3)년 정원군이 “제 부하들이 추고를 받았는데 우두머리인 제가 죄를 면하였으니 감히 대죄합니다”라고 하니 대죄하지 말라 했다. 정원군은 종실을 대표해 광해군을 챙겼다. 1612(광해 4)년 6월 1일 정원군이 종실을 거느리고 광해군의 존호를 올릴 것을 계청했다.

홍살문이다. 기존의 홍살문(좌측)은 철거됐고 현재는 공사 중(우측)이다. 장릉의 향로, 어로는 경사진 지형에 따라 계단식으로 조성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17.
홍살문이다. 기존의 홍살문(좌측)은 철거됐고 현재는 공사 중(우측)이다. 장릉의 향로, 어로는 경사진 지형에 따라 계단식으로 조성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17.

◆부모와 시부모 모두 칭찬한 계운궁

정원군의 부인 구씨는 시부모인 선조와 인빈이 매우 사랑했다. 선조는 정원군의 짝을 고르고자 사대부 집 딸들을 대궐로 모이게 했다. 두 번이나 못 찾았으나 계운궁(인조의 생모)을 보고는 금방 마음에 들어 하며 매우 기뻐했다. 그해 10월 3일에 예를 갖춰 맞아들였다. 실록은 “선조가 소학(小學) 등을 배우게 하니 읽기 전에 뜻을 통하였다. 인품이 따스하고 인자하며 말이 적었다. 위아래에 맞게 대하고 검소하며 우애와 법식이 있어 정원군도 그를 높이고 소중히 하였다”고 했다. 선조는 물론 인빈도 항상 구씨에게 ‘훌륭한 우리 며느리’라며 칭찬했다. 1626(인조 4)년 3월 21일 계운궁이 세상을 떴다. 대제학 김류가 쓴 묘지문에는 “계운궁은 남달리 총명하였다. 4세에 예로 몸가짐을 하고 5세에 의연하여 어른 같았다. 하루는 부모와 음식을 먹다 몇 수저 뜨더니, 숟가락을 놓았다. 이상히 여긴 부모가 까닭을 물으니 배가 부르다 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 음식에 오물이 섞여 있었다. 또한 일부러 장난감을 다른 아이들에게만 주었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부모가 쓰다듬으며 ‘내 딸은 진짜 딸이다. 반드시 우리 가문을 빛낼 것이다’”라고 했다.

홍살문이다. 기존의 홍살문(좌측)은 철거됐고 현재는 공사 중(우측)이다. 장릉의 향로, 어로는 경사진 지형에 따라 계단식으로 조성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17.
홍살문이다. 기존의 홍살문(좌측)은 철거됐고 현재는 공사 중(우측)이다. 장릉의 향로, 어로는 경사진 지형에 따라 계단식으로 조성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17.

◆막내아들 잃고 힘든 세월, 40세 사망

그러나 정원군에게 뼈아픈 일이 벌어졌다. 1612(광해 4)년 6월 22일 서인 권총이 “정원군의 모자가 모위한 일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일은 광해군이 무마했으나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됐다. 1615(광해 7)년 윤8월 14일 광해군이 신경희·양시우·김정익 등을 잡아 가두니 이는 평소 능창군을 의심해 왔는데, 역모의 상소가 들어가니 놀라서 옥사를 일으킨 것이다. 9월 28일 대사헌 등이 “정원군의 셋째, 둘째, 이인성의 아들이 번갈아 역모의 말이 나오니 속히 의논해 옥사를 끝내소서”라 하니 그대로 하라했다. 결국 11월 정원군의 막내 능창군이 유배 후 죽고 말았다. 1617(광해 9)년 6월 11일 새 궁궐을 새문동에 건립하는 것을 의논했다. 바로 정원군의 옛집이다. 2년 후 1619(광해 11)년 12월 29일 정원군이 졸하했다. 졸기에는 “타고난 우애로 선조의 사랑이 남달랐다. 광해군이 능창군을 죽이고 집을 앗아 궁으로 만들고, 인빈의 장지가 길하다”하여 감시했다. 이에 정원군은 걱정과 답답함으로 술을 많이 마셔 병이 들었다. 그는 평소 “나는 하루하루가 무사하고 다행이다. 오직 집 창문 아래에서 죽어 선왕을 따라가고 싶다”고 했다. 40세에 세상을 뜨니 임시로 장사를 지냈다.

비각과 육경원 비석 받침돌이다. 좌측 사진인 비각에는 ‘원종대왕 장릉, 인헌왕후 부좌’라고 적혀 있다. 우측사진은 1626년 인헌왕후가 승하하자 조성한 육경원의 비석 받침 돌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17.
비각과 육경원 비석 받침돌이다. 좌측 사진인 비각에는 ‘원종대왕 장릉, 인헌왕후 부좌’라고 적혀 있다. 우측사진은 1626년 인헌왕후가 승하하자 조성한 육경원의 비석 받침 돌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17.

◆효자 아들 인조,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

1626(인조 4)년 1월 21일 인조가 명하기를 “1619년 내가 상을 당했으나 시기 질투가 극심하고 감시하니 감히 복산(卜山, 장지를 가림)을 못하고 외가의 산소 근처에 임시 장사했다. 인빈(할머니) 산소는 높고 가팔라 쓸 만한 언덕이 없다. 대원군의 산소도 개장해 신도를 편히 하고 나의 마음을 위로하라”고 했다. 3월에 계운궁이 세상을 떴다. 인조는 부모를 추승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630(인조 8)년 9월 13일 연평 부원군 이귀가 차자를 올렸다. “‘대원군 정원군’을 삭제하고 단지 ‘광해가 폐위되어 장자 0의 아들 0가 장손으로서 들어와 대통을 이어받았다.’ 쓰면 뒷날 추숭의 계제가 되고 아버지에게 벼슬을 주어도 해가 되지 않겠습니다”고 했다. 1631(인조 9)년 9월 18일 이귀가 논했다. 생부 정원군을 추존할 것을 주장했다. 반대파는 “지금은 국가안정이 되지 않아 추봉할 수 없다”고 했고 1632(인조 10)년 2월 18일 양사에서도 반대했다. 그러나 인조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며 3월 9일 정원군의 추숭 신주를 의논하고 중국에 행장을 보냈다. 1633(인조 11)년 5월 6일 황제의 칙서를 보내오니 “추봉을 청하니 효성이 가상하였다. 특별히 그대 부모를 조선 국왕과 국왕비로 추봉하여 고명을 내리고 시호를 주노라”고 했다. 추존 원종과 인헌 왕후, 그리고 장릉으로 추봉된 것이다.

연지는 조선왕릉 대부분에 있었으나 현재 11개만 남아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17.
연지는 조선왕릉 대부분에 있었으나 현재 11개만 남아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17.
연지와 저수지다. 연지는 조선왕릉 대부분에 있었으나 현재 11개만 남아있다. 장릉의 저수지는 주변 산책로와 연결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17.
연지와 저수지다. 연지는 조선왕릉 대부분에 있었으나 현재 11개만 남아있다. 장릉의 저수지는 주변 산책로와 연결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12.17.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