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대 왕 단종의 영월 장릉
원손으로 ‘미래의 왕’ 여겨졌으나
혈혈단신으로 권력 정글에 남게돼
‘계유정난’ 이후 폐위, 영월로 유배
​​​​​​​숙종 대에 비로소 왕으로 완전 복위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강원도 영월의 장릉은 조선 제6대 단종 대왕의 무덤이다. 서울 경복궁에서 500리 떨어진 영월에 어찌 왕의 무덤이 있는가. 왕릉은 궁궐에서 반나절 행차의 거리에 조성한다. 그러니 장릉은 애초 왕릉 자리가 아니었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 유배에서 죽음에 이르렀지만, 시신조차 거두지 않았다. 영월의 호장 엄홍도가 몰래 아들들과 단종의 시신을 거둬 땅에 묻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내팽개쳐졌다. 241년이 지난 1698년 숙종 24년에 이르러 ‘장릉’이라는 능호를 정하자 비로소 왕릉이 됐다. 장릉은 조선왕조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의 주인공이 잠든 곳이다.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기대고 의지할 곳이 없으면 정글에 내쳐진 새끼 호랑이와 다를 바 없다. 장릉은 우리에게 세상사의 냉혹한 현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늘고 길게 사는’ 평범한 인생의 소중함을 안겨주고 있다.

‘영월 장릉’ 전경. 영월 장릉은 단종 사후 241년 만에 왕릉의 지위를 얻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3.28.
‘영월 장릉’ 전경. 영월 장릉은 단종 사후 241년 만에 왕릉의 지위를 얻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3.28.

◆최초로 경복궁에서 탄생

단종(이홍위, 제세 1441~1457년, 재위 1452~1455년)은 조선 왕 최초로 경복궁 자선당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왕세자였으므로 최초의 ‘원손’이 됐고 8살 때에 미래의 왕으로 여겨지는 왕세손, 10살 때에는 왕세자에, 12살에 왕이 됐고 15살에 상왕이 됐으니 왕의 경로를 완벽하게 거쳤다. 세종은 손자인 단종을 아꼈다. 세종은 “세자(문종)가 장년이 되었는데도, 후사가 없어 내가 매우 염려하였다. 이제 적손이 생겼으니 나의 마음이 기쁘기가 진실로 이와 같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사면령을 내려 가벼이 죄지은 자를 풀어주었다. 세종은 단종을 왕세손으로 삼으면서 “원손 이홍위는 타고나길 숙성하고 품성이 영특하고 밝은데, 이제 스승에게 나아가도 되겠으니 왕세손을 삼는다. 바른 사람을 가까이하고 학문을 밝고 넓게 하여 그 덕을 새롭게 하여 영세의 아름다움을 믿음직하게 하라”고 했다. 단종도 할아버지를 그리워했다. 1454년 11월 25일 실록은 단종이 세종이 임어했던 자미당 창가의 난간을 보고 “세종께서 살아 계시다면 나에 대한 사랑이 어찌 적겠는가”라며 탄식했고 함께 있던 자들이 슬피 울었다고 전한다.

‘장릉 봉분’은 남쪽이 아닌 동쪽을 향하고 있어 나중에 지은 정자각과 90도 방향이다. 병풍석과 난간석, 무석인이 없다. (제공: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3.28.
‘장릉 봉분’은 남쪽이 아닌 동쪽을 향하고 있어 나중에 지은 정자각과 90도 방향이다. 병풍석과 난간석, 무석인이 없다. (제공: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3.28.

◆왕위계승 하지만 먹구름 몰려와

귀하고 귀한 왕실의 원손 탄생은 나라와 백성의 경사였다. 세자(문종)가 두 번의 이혼을 한 끝에 세 번째로 후궁 권씨를 세자빈으로 맞아 아들을 낳은 것이다. 그러나 단종이 미처 성장하기 전에 상황은 변했다. 권씨가 출산 이튿날 세상을 뜬 것이다. 참으로 비통한 일이었다. 단종은 태어나서 어머니의 품에 제대로 안겨보지도 못했다. 할머니 소헌왕후(세종 비)는 단종을 혜빈양씨(세종의 네 번째 후궁)에게 키우도록 했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각별한 사랑이 뒷받침됐다. 그러나 5살에 할머니 소헌왕후가, 2년 뒤에는 할아버지 세종마저 돌아가셨다. 어머니에 이어 조부모까지 세상을 뜬 상황에서 아버지 문종만이 기댈 수 있는 가족이었다.

먹구름은 더욱 검게 드리워졌다. 아버지 문종이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고 말았다. 그는 혈혈단신으로 권력의 정글에 남게 됐다. 어린 왕을 진정으로 아끼고 후원할 사람은 없었다. 태조는 장성한 자식들과 신덕왕후의 후광이 있었다. 정종과 태종은 형제가 힘을 합쳤고, 세종은 든든한 아버지 태종과 형제, 왕후와 후궁, 자식들이 세력을 형성했다. 문종 역시 적장자로서 할아버지 태종, 아버지 세종과 형제들이 있었다. 하지만 단종은 혈육이라고는 여동생 경혜공주 하나뿐, 조부모, 부모, 부인, 자식 어느 하나 곁에 없었다. 문종은 이를 걱정해 생전에 황보인, 남지, 김종서 등 고명대신(죽음을 앞둔 왕의 유지를 받드는 것)을 불러 단종을 부탁해야 했다.

단종이 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돼 유배 후 죽은 곳인 ‘청령포’다. 주변이 강으로 둘러져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3.28.
단종이 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돼 유배 후 죽은 곳인 ‘청령포’다. 주변이 강으로 둘러져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3.28.

◆권력다툼으로 참극, 결국 왕위 뺏겨

1452년 5월 18일 단종은 즉위교서에서 “소자가 어린 나이에 외로이 상중에 있으면서 임금이 조처할 바를 알지 못하니, 조상의 업을 능히 하지 못할까 마치 연못과 얼음을 건너는 것과 같이 염려하고 두려워한다. 대소 신료는 각각 너의 직책을 삼가하여, 나의 정치를 보좌하라”고 했다. 단종은 대신들과 안평대군(세종의 3남, 수양대군 동생)을 의지했다. 그러나 이를 못마땅해 한 수양대군과 일당은 1453(단종 1)년 10월 10일 불안정한 왕권을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좌의정 김종서의 집을 습격해 그와 두 아들을 죽였다. 이어 살생부(사전에 죽이고자 한 사람의 명단)에 따라 황보 인, 이조판서 조극관, 찬성 이양 등을 궐문에서 죽였고, 좌의정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인 조수량 등을 귀양 후 죽였으며, 안평대군도 강화도로 귀양 후 사사했다.

반대파를 숙청한 후 자신이 의정부영사와 이조 및 병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 등을 겸해 권력을 장악했다. 1455년 윤6월에는 자신의 친동생 금성대군과 혜빈양씨와 그 자식 등 단종의 측근 종친, 궁인, 신하들을 유배시키고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났다. 단종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전지하기를 “내가 나이가 어리고 안팎의 일을 모르는 탓에 간사한 무리들이 은밀히 발동하고 난을 도모하는 싹이 종식하지 않으니, 이제 대임을 영의정(수양대군)에게 전하려 한다”고 했다. 대신들과 수양대군은 “아니 되옵니다” 하다가 단종이 재차 뜻을 밝히자 바로 세조의 즉위식을 거행했다.

상황은 악화됐다. 1455년 12월 세조는 단종을 키운 혜빈양씨를 교수형에 처했다. 1456년에는 ‘병자옥사’가 일어났다. 집현전 학사 출신들이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발각됐다. 사육신과 연루자 70여명이 처형됐다. 1457(세조 3)년 6월 21일 실록은 윤사윤이 “송현수(단종의 장인)와 권완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합니다”라고 전하니, 세조는 송현수와 권완을 의금부에 하옥시켰다. 그리고 “상왕도 모의에 참여하여 종사에 죄를 지었다. 노산군으로 강봉하고 궁에서 내보내 영월에 거주시키니, 의식을 후하게 하고 목숨을 보존하여서 나라의 민심을 안정시키도록 하라”고 명했다. 이어 6월 26일 의정부가 “현덕왕후 권씨는 노산군의 어미이니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어 개장(무덤을 옮김)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10일 신숙주와 정인지 등이 노산군과 금성대군을 사사하길 청했고 이는 10월 18일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등이, 10월 20일 양녕대군이 세 번이나 청했다. 10월 21일 다시 대간 등이 처벌을 청하자 세조는 “송현수는 교형에 처하고 화의군 등을 금방에 처하라”고 했다. 그리고 이날 실록은 “노산군이 자결하니 예로써 장례를 치렀다”고 간단히 기록했다.

‘장판옥’은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268명의 위패를 모신 건물이다. 정조 15(1791)년에 건립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천지일보 2023.03.28.
‘장판옥’은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268명의 위패를 모신 건물이다. 정조 15(1791)년에 건립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천지일보 2023.03.28.

◆백성과 후대 왕들이 이룬 ‘단종의 부활’

단종의 죽음은 실제로는 왕방연이 사약을 가지고 갔으나 단종이 없어서 울고만 있는데, 유시(酉時, 오후 5~7시)경에 향교의 생도가 활줄로 단종의 목을 매어 숨을 거두게 했고 단종의 시체는 금강에 띄워졌다 한다. 밤에 영월 호장 엄흥도가 몰래 시체를 건져 싸뒀다가 관에 넣어 땅에 묻고 돌을 얹어 표를 해놓았다. 중종에 이르러서 단종의 복위가 거론됐고 1516(중종 11)년 노산군의 묘를 찾아 봉분을 만들었다. 1581(선조 14)년 강원감사 정철의 주장으로 노산군 묘를 수개하고 석물을 세웠다. 현종 때는 시신을 거둔 엄홍도의 공적을 치하했다. 1669(현종 10)년 1월 5일 송시열 등이 “노산군이 해를 입었을 때 아무도 거두어 돌보지 않았었는데, 그 고을 아전 엄흥도가 장사를 치렀으니, 그의 절의를 본받도록 그 자손들을 녹용(사람을 골라 씀)하는 은전을 베푸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했다. 숙종은 1681년 노산대군으로 추봉했고, 1691년 사육신과 노산대군의 묘에 제사하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1698년 왕으로 복위해 묘호를 단종, 능호를 장릉이라 하고 신주를 종묘에 부묘했다. 완전히 왕의 지위를 되찾은 것이다.

노산군의 묘를 찾아서 제를 올린 영월군수 박충원의 뜻을 기린 ‘낙촌비각’.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3.28.
노산군의 묘를 찾아서 제를 올린 영월군수 박충원의 뜻을 기린 ‘낙촌비각’.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3.28.

◆태백산의 ‘단종 신(神)’으로 부활

이듬해 1699년 숙종은 충절의 고향 영월을 ‘부사’로 승격했다. 또한 영조는 1743년 엄홍도에게 하대부의 벼슬을 추증하고 봄가을의 제수도 지급해 나라가 돌보게 했다. 정조는 1791년 장릉에 배식단을 세우고 단종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추향토록 했다. 단종은 사후 태백산의 신령이 됐다고 하여 영월·태백지역의 사람들은 ‘단종 신’을 믿으며 그의 원혼을 달래고 있다. 특히 매년 4월 29일부터 3일간 ‘영월 단종문화재’를 개최해 단종의 고혼과 충신들의 넋을 위로하는 주민축제로 운영하고 있다. 영월 장릉은 다른 왕릉과 달리 단종을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을 위한 건조물이 많다. 노산군묘을 찾아 제를 올린 영월군수 박충원의 뜻을 기린 ‘낙촌비각’, 단종의 시신을 거둬 묘를 만든 엄흥도의 ‘정려각’,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 충신, 환관, 궁녀, 노비 등 268명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과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배식단’이 있다. 영월 장릉에 묻힌 단종은 억울한 죽음을 당했지만 이들이 곁에 있기에 결코 외롭지 않으리라.

단종의 시신을 거둬 무덤을 만든 엄홍도의 충절을 기린 비각인 ‘정려각’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3.28.
단종의 시신을 거둬 무덤을 만든 엄홍도의 충절을 기린 비각인 ‘정려각’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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