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대 왕 중종 비 문정왕후

왕비가 됐으나 17년간 자식 없어
막강한 후궁들 사이에서 와신상담
조선의 여제? 가장 비난받는 왕후
윤원형, 보우, 정난정의 국정농단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태릉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의 능이다. 태릉은 여느 왕후의 무덤과 달리 웅장할 뿐만 아니라 왕후의 무덤임에도 중국의 황제처럼 ‘태릉(泰陵)’의 묘호를 가졌다. 문정왕후는 봉은사 주지 보우와 의논해 장경왕후의 곁에 있던 남편 중종의 무덤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자신이 그 곁에 묻히고자 했다. 그러나 아들 명종은 왕후를 태릉에 묻었다. 문정왕후는 중종, 인종, 명종 대를 거치며 27년간의 왕비와 8년의 수렴청정, 21년의 대비의 역할을 하며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왕후는 전임 단경왕후나 장경왕후와 달리 곧바로 ‘왕비’가 됐다. 왕비가 돼서는 17년간 왕자를 낳지 못해 노심초사했다. 그러던 차에 1534년 명종을 낳아 미래의 권력을 넘보게 되었고 10년 후 인종이 즉위 몇 달 후 세상을 뜨니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됐다. 궁궐에는 문정왕후를 견제할 누구도 없었다. 경빈 박씨나 숙의 홍씨와 같은 후궁세력과 인종의 외척세력을 물리친 문정왕후와 측근은 무소불위의 처세로 정국을 끌고 나갔다. 왕후의 동생들은 조정을 장악하고 왕후는 드러내고 불교에 치중하니 엄청난 반발이 있었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1565년 드디어 문정왕후가 죽음을 맞았다. 65세의 삶과 48년간의 왕실 최고지위를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거칠게 없었던 왕후에게 후회는 없을까. 태릉을 찾아가 본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8.27.
태릉은 왕후의 무덤으로써는 가장 웅장하다. 봉분에 병풍석과 난간석이 있는 왕후의 능은 태릉과 제릉(태조비 신의왕후)뿐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8.27.

◆조선 중기 110년, 왕비 윤씨들의 시대

세조 이후 110년간은 ‘윤씨 왕비들’의 시대였다. 1455년 7대 세조의 정희왕후에 이어 9대 왕 성종의 정현왕후, 제헌왕후(폐비 윤씨), 11대 중종의 장경왕후와 문정왕후가 있었다. 조선의 왕비는 김씨가 10명, 그리고 윤씨와 한씨가 각 6명으로 뒤를 잇는다. 문정왕후는 장경왕후가 죽자 바로 왕비로 들어왔으며 인종이 승하하자 자신의 아들이 왕(명종)이 됐다. 아들은 어머니의 도움이 필요했고 문정왕후는 스스로 팔을 걷어 붙이고 나라를 다스렸다.

문정왕후는 1501년 파평부원군 윤지임과 전성부대부인 전의 이씨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지임은 음서로 들어와 과의교위(정5품), 할아버지는 내자시판관(종5품)을 지내고 일찍 사망했으니 내리막길의 집안이었다. 그러나 우의정을 지낸 윤사흔(정희왕후의 오빠)을 비롯해 세조와 한명회의 장인 윤번 등 선대는 막강했다. 왕후는 세 명의 오빠(윤원개, 윤원량, 윤원필)와 두 명의 친동생(윤원로, 윤원형) 그리고 ᆞ사촌동생(윤춘년)이 있었다. 왕후는 11세에 어머니의 상을 당했는데 집안을 두루 살폈고 책도 가까이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 왕비가 되는 행운을 움켜쥐었다. 장경왕후가 죽자 왕대비 정현왕후(중종의 생모)는 새로운 왕비를 물색했다. 기왕이면 윤씨 집안에서 맞아들이고자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과 상의했다. 그리고는 삼간택과 최초로 친영의식(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예식 후 신부를 맞아오는 예식)을 거쳐 1517년 2월 문정왕후를 왕비로 선택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8.27.
태릉 전경. 1565(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뜨고 중종의 정릉 가까이 ‘신정릉’에 조성하려 했으나 명종은 풍수지리와 수해를 이유로 현재 자리로 모셨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8.27.

◆왕실을 차지한 막강한 후궁들

문정왕후가 왕실에 들어오니 경빈 박씨, 희빈 홍씨 등 10년 이상 나이가 많은 후궁들이 4명이나 있었다. 게다가 왕세자 인종(3살)과 경빈 박씨의 아들 복성군(9살), 희빈 홍씨의 금원군(5살), 숙의 홍씨의 해안군(7살) 등 왕자들이 있었으니 누가 왕이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경빈은 연산군 시절 흥청(왕궁에 들인 기녀)으로 입궁했는데 미모와 적극적인 성격으로 중종의 사랑을 얻고 있었다. 더욱이 박원종의 양녀로 중종의 후궁이 됐고 중종이 장경왕후의 후임왕비로 택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후궁 희빈 홍씨는 대사헌을 지낸 권신 홍경주의 딸로써 중종의 총애를 받았고 두 왕자를 낳아 궁내에서 영향력이 있었다. 문정왕후가 왕비가 된 이후에도 창빈 안씨가 영양군을, 숙의 이씨가 덕양군을 낳았다. 문정왕후는 딸만 네 명을 낳았다. 와중에 조정은 경빈 박씨와 아들 복성군, 왕세자(인종)와 윤임·김안로·남곤과 심정, 문정왕후와 동생 윤원로·윤원형 형제 등 여러 세력이 암투를 벌였다. 1527년 2월 26일 동궁의 북쪽 건물에 불에 그슬린 토막 난 쥐가 은행나무에 걸렸고, 나중에는 세자의 침실에 몰래 쥐를 넣은 작서의 변(灼鼠─變, 작서는 불에 탄 쥐의 뜻)이 벌어졌다. 문정왕후는 이를 경빈 박씨가 아들 복성군을 위해 한 짓이라며 처벌을 주장했고 결국 경빈 박씨의 세력을 몰아냈다. 남곤·심정 등이 사사됐다. 추후 범인은 김안로의 아들 김희로 밝혀졌고 경빈 박씨와 아들은 복원됐다. 그런 가운데 희빈 홍씨가 봉성군을, 창빈 안씨가 덕흥대원군(훗날 선조의 아버지)을 낳았으니 아들이 없는 문정왕후는 더욱 불안해졌다.

태릉의 판위. 왕이 능역에 들어서 절하는 위치, 즉 배위를 말한다. 태릉의 판위는 계단이 있으며 가장 짜임새 있고 견고하게 만들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8.27.
태릉의 판위. 왕이 능역에 들어서 절하는 위치, 즉 배위를 말한다. 태릉의 판위는 계단이 있으며 가장 짜임새 있고 견고하게 만들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8.27.

◆18년 만에 왕자를 낳다

1534년 마침내 문정왕후가 아들을 낳았다. 왕후는 세자가 있음에도 자신의 친아들이 왕이 되길 원했다. 경쟁자 경빈 세력은 없앴으나 정권은 김안로에게 돌아갔다. 그는 허항, 채무택 등과 결탁해 전횡을 휘둘렀다. 그러던 중 1537년 김안로는 세자(훗날 인종) 보호 명분과 문정왕후가 아들 경원대군을 왕위에 앉히려한다며 문정왕후를 몰아내려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윤안임의 밀고로 실패하고 김안로는 유배 뒤 사사됐다. 김안로 일파가 죽자 윤임은 힘을 잃었고, 윤원형·윤원로 형제는 세력을 넓혔다. 그럼에도 윤임은 문정왕후를 제거하려 했다. 1543년 동궁에 화재가 났는데 윤임은 문정왕후를 화재의 배후로 지목하고 그녀에게 사약을 내리자고 주장했으나 인종이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해 1544년 중종이 세상을 뜨니 아들 인종이 왕위에 올랐다. 문정왕후는 대비가 됐다. 그런데 인종이 8개월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문정왕후는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수렴청정하며 본격적으로 자신의 친정을 끌어들였다. 동생 윤원형은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윤임이 조카 봉성군을 왕위에 올리려 하고 계림군(성종의 서자)을 옹립하려 유관·유인숙 등과 모의한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무고는 먹혀들었고 인종의 외숙부인 윤임과 측근은 모두 사사됐다. 그런데 이후 동생 윤원형이 사촌 윤춘년을 사주해 형 윤원로의 탄핵을 상소했다. “윤원로는 간사하고 방자하며 사람을 함부로 죽여 백성의 원성을 샀으며, 국모와 종사를 위태롭게 했습니다”라고 했다. 1546년 윤원로는 사사됐다. 문정왕후의 친동생들이었다. 1547년 9월 이른바 양재역벽서사건(丁未士禍, 정미사화)이 벌어졌다. 경기도 과천 양재역에서 ‘여왕과 간신 이기가 권력을 휘둘러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벽서가 발견됐다. 윤원형 등은 윤임 일파의 짓으로 몰았고 문정왕후는 명종을 움직였다. 결국 송인수, 이약수를 사사하고, 이언적, 노수신 등 20여명이 유배됐다. 희빈 홍씨의 아들 봉성군도 사사됐다.

조선왕릉 유일하게 태릉에는 ‘조선왕릉전시관’이 있으며 동구릉을 비롯한 10개의 단위 능역에는 ‘역사문화관’이 설치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8.27.
조선왕릉 유일하게 태릉에는 ‘조선왕릉전시관’이 있으며 동구릉을 비롯한 10개의 단위 능역에는 ‘역사문화관’이 설치돼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8.27.

◆불교에 치우친 문정왕후, 비선 실세들

문정왕후는 불교에 치우쳤다. 1550년 봉은사에 선종을 두고 봉선사(광릉 세조의 원찰)에 교종을 둬 양종을 부활시켰다. 한편 윤원형과 상진을 시켜 300여 사찰을 국가공인 사찰로 하고, 도첩제에 따라 2년 간 4천여명의 승려를 뽑고 승과시험을 부활시켰다. 불교신자인 정난정(기생출신 윤원형의 첩)을 아끼고 그녀가 소개한 승려 보우를 병조판서에 제수하기도 했다. 대신들과 성리학자들 심지어 명종도 불편해했다. 정난정은 아버지가 부총관(종2품)을 지냈고 어머니는 관비출신이었다. 1551(명종 6)년 윤원형의 정실부인에게 독이든 음식을 먹어 죽게 했다. 문정왕후의 허락을 얻어 윤원형의 정실이 됐는데 그 권세를 배경으로 궁궐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전매와 사기로 부를 챙겼다. 1553(명종 8)년에는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이 되었고 윤임이 그의 조카 봉성군(중종의 8남)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한다며 무고하기도 했다. 또한 문정왕후에 소개한 승려 보우를 선종판사에 오르게 했다. 실록에는 유독 문정왕후에 대한 사신의 비난이 강한데 1559(명종 14)년10월 24일자에는 “사신은 논한다. 의성 고을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변해서 울기까지 했다니 이변의 극치다. ‘서경’에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 했는데 모후가 안에서 국정을 잡고 외척이 밖에서 권력을 휘둘러, 임금은 위에서 고립되고, 중들은 아래에서 번창하였다. 아, 통탄할 일이다”라고 돼 있다. 문정왕후에 대한 평가라고 해야 할까. 왕후는 1565년 음력 4월 갑자기 병세가 심해졌고 한 달도 안 돼 세상을 떴다. 65세였다. 명종은 “상사를 일체 대왕의 상례로 행하라”고 명했다. 시호는 문정, 묘호는 신정릉으로 하려다 태릉으로 바뀌었다. 문정왕후가 떠난 이후 스님 보우는 살해됐고, 동생 윤원형과 정난정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2년 뒤 아들 명종도 세상을 뜨고 말았다.

허응당 보우대사 봉은탑.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불교 중흥에 나섰던 봉은사 주지 보우를 기리고자 2013년 봉은사에 건립됐다. 보우는 문정왕후가 죽자 몇 달 후 처형됐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8.27.
허응당 보우대사 봉은탑.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불교 중흥에 나섰던 봉은사 주지 보우를 기리고자 2013년 봉은사에 건립됐다. 보우는 문정왕후가 죽자 몇 달 후 처형됐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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