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대 성종 비의 묘와 능
공혜왕후, 후사도 없이 스무살에 죽어
윤씨, 왕비→폐비→왕후, 끝내 폐비
인내와 관대로써 승자된 정현왕후
조선최초 삼전(3명의 대비)의 시대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성종에게는 3명의 왕후가 있었으니 조선 처음이었다. 첫 부인 공혜왕후는 후사 없이 19세에 죽어 파주삼릉의 순릉에 묻혔다. 이어 1476년 후궁 숙의 윤씨가 왕비가 돼 아들(연산군)까지 낳았으나 왕실의 기대를 저버린 처세로 3년만에 폐비가 됐고 이어 1480년 후궁 윤씨(정현왕후)가 왕비가 됐다. 2년 후 폐비는 사사돼 파주에 묻혔다. 그 후 왕실은 평안했고 1494년 성종이 승하해 선릉에 묻혔고 연산군이 왕위를 이었다. 1504년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를 제헌왕후로, 무덤 회묘는 회릉으로 올렸다. 그러나 2년 후 폭정으로 인해 왕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에 제헌왕후와 회릉은 다시 폐비와 회묘로 격하되고 말았다. 세 번째 왕후 정현왕후는 세조에서 중종까지 5대의 격동의 세월을 거쳤다. 마침내 아들이 왕이 돼 부귀영화를 누리다 1530년 69세에 세상을 뜨니 성종이 잠든 선릉 동쪽에 묻혔다. 성종의 왕후 3명은 각기 다른 배경과 처세, 운명에 더해 사후에 파주, 고양, 서초의 각지에 묻혔다. 무덤은 바로 주인의 삶을 대변하니 세 왕후가 잠든 곳을 찾아가 본다.

순릉은 파주 삼릉(장순왕후 공릉, 공혜왕후 순릉, 추존 진종 영릉)에서 유일하게 왕비의 무덤으로써 왕릉 형식으로 조성됐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6.19.
순릉은 파주 삼릉(장순왕후 공릉, 공혜왕후 순릉, 추존 진종 영릉)에서 유일하게 왕비의 무덤으로써 왕릉 형식으로 조성됐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6.19.

◆조선 최초 3명의 왕비, 두 왕비의 이른 죽음

성종의 첫 부인 공혜왕후는 1456(세조 2)년 청주한씨 한명회와 여흥민씨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11살에 자을(잘)산군(성종))과 결혼, 천안군부인에서 1469년 왕비가 됐다. 성종은 후사가 없자 1473년 후궁으로 윤기견의 딸(함안 윤씨, 19살, 폐비윤씨)과 윤호의 딸(파평 윤씨, 12살, 정현왕후)을 간택했다. 다음해 공혜왕후가 죽자 파주삼릉의 순릉에 묻혔다. 먼저 죽은 언니 장순왕후(예종 비)의 공릉에 이웃했다.

1476(성종 7)년 숙의 윤씨(훗날 폐비)가 왕비가 됐다. 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숙의 윤씨는 주상께서 중히 여긴다. 평소 허름한 옷을 입고 검소하며 일마다 정성과 조심성으로 대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저는 본디 부덕한 과부의 집에서 자라 보고들은 게 없으니 뜻을 저버리고 주상의 덕에 누를 끼칠까 두렵습니다’라는 겸손의 말에 그를 현숙하게 여겼다”고 했다. 그리고 왕비는 4개월 후 아들(연산군)을 낳았으니 왕비의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대비들과 성종의 후궁들에게 함부로 대했고 이는 갈수록 심해졌다. 1477(성종 8)년 3월 29일 대왕대비(세조의 정희왕후) 명으로 폐비를 논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러나 왕비에게서 주술과 독약이 발견되니 성종과 삼전(3명의 대비)이 결단에 이르렀다. 1479(성종 10년) 6월 2일 성종은 정승들에게 “중전의 일을 말하기 부끄러우나 매우 중대하니 경들에게 의논한다. 옛사람이 ‘선경삼일(3일 전에 알림) 후경삼일(3일 후 되새김)’이라 했으니 내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중략) 예전에 폐하려 했으나, 경들이 반대했다. 뉘우치기는커녕 나를 능멸하기에 이르렀다. 만약 뒷날 큰일이 있으면 서제(후회)해도 못 미치니 중전을 폐하여 서인을 만들겠다. 어떻게 여기는가”라고 했다. 대신들은 머뭇거렸고 왕의 뜻은 강경했다. 결국 왕비가 폐비돼 소교(작은 가마)를 타고 사제(개인의 집)로 돌아갔다. 폐비 부모의 봉작이 박탈되고 폐비 집에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됐다. 12일에는 폐비 소생의 왕자(연산군의 동생)가 죽었다.

‘순릉의 참도’ 일반적으로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는 향로와 어로가 구분돼 있으나 순릉은 구분돼 있지 않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6.19.
‘순릉의 참도’ 일반적으로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는 향로와 어로가 구분돼 있으나 순릉은 구분돼 있지 않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6.19.

◆왕실 비극의 시작 “폐비를 사사하라”

성종의 왕실에는 삼전(대왕대비 정희왕후, 왕대비 소혜왕후, 안순왕후)이 살아 있어 영향력을 발휘했다. 특히 어머니 소혜왕후(인수대비)는 1475년 ‘내훈’을 펴내며 매우 유교적인 여성의 행실을 강조했다. 1479년 폐비사건에 이어 1480년 7월 어(을)우동의 사건이 터졌다. 그녀는 왕족과 대신, 노비에 이르기까지 20여명의 남자와 간통해 사회적 문제가 됐다. 결국 10월 어을우동이 교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1월 8일 숙의 윤씨(정현왕후)가 왕비로 책봉됐다. 왕은 “왕비가 명문가 출신으로 숙덕(착하고 아름다운 덕행)을 갖추었다”고 했다. 

2년 후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1482년 8월 12일 권경우, 채수, 한명회, 이극기, 안윤손 등이 왕에게 청하기를 “폐비가 한때 국모였으니 여염의 거처와 물자를 공급해 주소서”라 했다. 성종은 크게 노하며 “경들이 어찌 국모로서 말을 하느냐? 이는 원자에 아첨하여 후일의 지위를 위함이다”라고 했다. 상황은 최악에 달했다. 사가로 나간 폐비는 여전히 근신하지 않는다고 보고됐다. 8월 16일 성종이 삼전을 뵙고 와서 말하기를 “윤씨가 흉험하고 악역 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참으면서 개과천선을 기다렸다. 이제 원자가 장성하는데 사람들이 불안하니 후일의 근심이 매우 크다. 경들이 계책을 진술하라”라고 했다. 이파는 말하기를 “폐비의 독약으로 시기하는 자를 제거하려하고 어린 임금을 세워 전횡하려 한 죄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하니, 임금이 “후환이 어찌 크지 않겠느냐”고 하자 모두가 “옳게 여깁니다”라고 했다. 그 전에 보내온 삼전의 서간에는 "대의로써 결단하니 큰일을 막는 것입니다. 폐비는 스스로‘내가 오래 살면 장차 할일이 있다’며 주상에게 ‘그 눈을 빼고, 발자취까지 없애버리며, 그 팔을 끊어버리고 싶다’라고 했으니 비상 가루를 지니고 다녔습니다. 주상이 독해(독살) 당하지 않아 다행입니다. 사람들이 몰래 폐비 편에 서고 아들이 왕이 될 것이니 무리가 아부하여 옳고 그름을 뒤집어 죄 없는 사람을 해칠 것입니다. 일이 커지기 전에 대의로 단죄해야 원자를 보전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폐비 윤씨를 그 집에서 사사했다.

성종의 두 번째 부인이자 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의 묘인 ‘회묘’. 한때 왕릉이 됐다가 다시 회묘로 격하됐지만 아들 연산군이 효성을 다해 조성한 왕릉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동대문구 회기동에서 이전됐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6.19.
성종의 두 번째 부인이자 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의 묘인 ‘회묘’. 한때 왕릉이 됐다가 다시 회묘로 격하됐지만 아들 연산군이 효성을 다해 조성한 왕릉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동대문구 회기동에서 이전됐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6.19.

◆연산군, 폐비의 회묘를 ‘왕릉 회릉’으로

1482(성종 13)년 8월 17일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윤씨의 어미 신씨와 아들 윤구는 장흥에, 윤우는 거제에, 윤후는 진도에 유배하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윤후는 제주로, 신씨는 장사 끝나고 보내라”고 했다. 또한 “장례는 족친들이 하되 택지와 택일을 해당 관사가 의논하게 하고 윤씨 형제들이 유배되었고 노비들도 도망갔으니 상여 운반과 매장할 군인을 주옵소서”하니 즉시 조치했다. 폐비는 경기도 파주 장단의 일반 묘에 묻혔다. 성종은 향후 폐비 일은 절대로 언급하지 말도록 엄명을 내렸다.

7년이 지나 1489(성종 20)년 5월 16일 임금이 밀봉한 편지를 윤필상 등에게 전해 “사람을 물리치고 열어 보라”고 했다. 편지에는 “옛일을 생각하면 한밤 중까지 두려워 홀로 잠을 못 이루기를 얼마인지 모른다. 지금 세자의 정리를 생각하면 어찌 측은하지 않겠는가”라며 폐비의 제사를 허락했다. 이어 특별히 ‘윤씨 지묘’의 묘비와 2명의 묘지기를 허락했다. 

연산군은 1497(연산 3)년에 묘소를 현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으로 이장하고 묘호를 회묘라 했다. 이후 1504(연산 10)년에 폐비를 제헌왕후, 능호를 회릉(懷陵)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1506년 연산군이 폐위되자 다시 회묘로 격하되고, 1969년에 서삼릉 경내로 옮겨졌다. 폐비의 무덤도 그 주인과 더불어 커다란 부침이 있었다

성종의 두 번째 부인이자 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의 묘인 ‘회묘’. 한때 왕릉이 됐다가 다시 회묘로 격하됐지만 아들 연산군이 효성을 다해 조성한 왕릉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동대문구 회기동에서 이전됐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6.19.
성종의 두 번째 부인이자 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의 묘인 ‘회묘’. 한때 왕릉이 됐다가 다시 회묘로 격하됐지만 아들 연산군이 효성을 다해 조성한 왕릉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동대문구 회기동에서 이전됐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6.19.

◆원만한 처세, 성종의 곁에 남은 정현왕후

성종의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는 파평윤씨로 본명은 윤창년이다. 영원부원군 윤호의 딸로 1462(세조 8)년에 신창 관아에서 태어났다. 1473(성종 4)년에 후궁으로 간택돼 숙의(종2품)에 봉해지고, 1479(성종 10)년에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되자 이듬해인 1480(성종 11)년에 왕비로 책봉됐다. 1488년 3월 5일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중종이다.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최후를 바라본 정현왕후는 성종에게 매우 관대했다. 성종은 “다행히 어진 왕비를 찾아 마음이 평안하다”고 했다. 정조는 성종 제문에 “성군의 덕에 비길 왕비”라고 극찬했다. 정현왕후가 왕비가 되고 2년후 폐비는 사사됐고, 다음해 대왕대비(정희왕후)도 세상을 떴다. 이후 10년간 성종과 비교적 편안한 세월을 보냈으며 1494년 성종이 38세에 훙하니 이듬해 광주학당리(현 서초동)에 선릉을 조성했다. 원래 세종의 5남 광평대군의 묘역이었다. 왕후는 공혜왕후, 폐비, 정희왕후, 성종, 안순왕후, 소혜왕후의 죽음과 연산군의 즉위·폐위·죽음, 중종반정, 3개 사화(무오, 갑자, 기묘) 등 굴곡의 세월을 겪고 1530(중종 25)년 69세에 경복궁 동궁 정침에서 훙하니 선릉에 묻혔다. 결국 장수하고 인내하며 원만히 처세한 정현왕후가 성종의 옆자리에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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