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존 덕종·소혜왕후의 경릉

조선 최초로 추존된 왕과 왕비 능
세자와 왕대비, 봉분위치 반대로
아들 성종이 ‘의묘→경릉’으로 격상
세도가 출신의 실력자 인수대왕대비

글 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경기 고양시 서오릉(궁 서쪽의 5개 능)은 평일 낮에도 방문객들이 줄을 잇는다. 이곳에는 가장 먼저 ‘경릉(敬陵)’이 들어섰다. 추존 덕종(조선 제7대 왕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과 소혜왕후의 능이다. 1457(세조 3)년 의경세자가 20세에 죽자 정역(효령대군의 장인)의 묘역을 옮기고 그 자리에 묘를 썼다. 그 후 의경세자의 아들 잘산군(성종)이 왕이 되자 덕종으로 추존하고 세자빈 한씨는 왕비에 이어 왕대비로 봉했다. 능호는 경릉이라 지었다. 1504(연산군 10)년 소혜왕후(당시 인수대비)가 세상을 뜨자 경릉 서쪽에 모셨다. 경릉은 세자가 먼저 묻히고 나중에 대비가 들어섰다. 원래 왕이 서쪽, 왕후가 동쪽인데, 경릉은 위치가 반대로 돼 있다. 사람들에게는 덕종보다 인수대비가 널리 알려져 있다. 세조는 장남 왕세자가 죽자 큰 충격을 받고 누구보다 묫자리의 길흉을 따져 왕릉을 조성했다. 5월 녹음이 우거진 숲길, 스무살에 세상을 뜬 왕세자, 그리고 47년간 권력의 정상에서 부침을 거듭한 인수대비의 발자취를 찾아본다.

조선 최초로 추존왕이 된 덕종과 소혜왕후의 왕릉이다. 정자각 서쪽에 왕후, 동쪽에 왕의 봉분이 있다. 일반 왕릉의 봉분 배치와 정반대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5.09.
조선 최초로 추존왕이 된 덕종과 소혜왕후의 왕릉이다. 정자각 서쪽에 왕후, 동쪽에 왕의 봉분이 있다. 일반 왕릉의 봉분 배치와 정반대이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5.09.

◆세종의 첫 손자, 완벽한 미남 왕세자

세조는 온전히 왕위를 계승지 못하고 많은 형제와 대신들을 죽였다. 게다가 유교사회에서 불교에 치우친 모습을 보여 백성들에게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세조는 맏아들을 정통성과 능력을 갖춘 왕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세종(조선 제4대 왕)은 장자 문종에게 자식이 없어 걱정을 했다. 그러던 차에 1438(세종 20)년 9월 15일 경복궁에서 둘째 아들인 진양대군(훗날 세조)과 부인 윤씨(훗날 정희왕후) 사이에서 이장(초명은 이숭)이 태어났다(장남 문종의 아들은 3년 후 탄생). 세종은 무척 기뻐했다. 덕종 지문(1457)에는 “원래 왕자의 아이 출산은 궐 밖 살림집으로 나가서 했다. 그러나 윤씨는 세종 부부가 총애하여 궁내에서 출산토록 하였다”고 했다. 이어 “아이는 체격이 준수 숙성하고 용모 또한 단아하여, 세종께서 친히 안아주시고 데리고 다니시는 등 다른 왕손과 달리 하였다”고 했다. 덕종은 뛰어난 용모와 행실을 지녀 주변의 칭찬이 자자했다. 세조실록에는 “세자 도원군의 용모와 몸가짐이 아름답고 따뜻하고 어질며 공손히 받들고, 학문을 좋아하며 또 해서(楷書)를 잘 썼다”고 했다.

‘서오릉 재실’, 서오릉에는 다섯 개의 능에도 불구하고 재실은 하나인데 원래 명릉 재실의 일부가 남아있는 것이다. (제공: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5.09
‘서오릉 재실’, 서오릉에는 다섯 개의 능에도 불구하고 재실은 하나인데 원래 명릉 재실의 일부가 남아있는 것이다. (제공: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5.09

덕종은 8살에 도원군이 되고 1450년 한 살 많은 한씨와 결혼했다. 이후 ‘의경세자→의경왕→덕종→회간대왕’의 지위가 주어졌다. 1455년 세자가 됐으나 건강이 악화돼 1457년 세상을 뜨고 말았다. 1468년 세조가 승하하고 왕위에 오른 동생 해양대군(훗날 예종)도 즉위 1년 만에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의경세자의 아들 성종이 왕위를 이었다. 예종의 둘째 제안대군은 3살이었고(장남 인성대군은 1463년에 사망), 덕종의 장남 월산대군은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배제됐다. 성종의 장인이 한명회였고 정희왕후, 소혜왕후와의 사돈 관계가 크게 작용했다. 성종이 왕이 되자 1470년 1월 22일 아버지 의경세자는 의경왕으로 다음해에는 덕종으로 1474년에는 명 황제에 의해 회간대왕으로 봉해졌다.

서오릉 입구의 모습이다. 서오릉은 궁궐 서쪽의 다섯 개 능을 말한다. 원래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묘가 처음 들어섰고 경릉으로 승격됐다. 이후 창릉(예종), 익릉(숙종 비 인경왕후), 명릉(숙종과 인원왕후, 인현왕후), 홍릉(영조 정성왕후)가 들어섰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5.09.
서오릉 입구의 모습이다. 서오릉은 궁궐 서쪽의 다섯 개 능을 말한다. 원래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묘가 처음 들어섰고 경릉으로 승격됐다. 이후 창릉(예종), 익릉(숙종 비 인경왕후), 명릉(숙종과 인원왕후, 인현왕후), 홍릉(영조 정성왕후)가 들어섰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5.09.

◆세자 단명하자 아버지 세조 “무덤은 명당에”

1457년 9월 23일 실록은 “세자가 죽기 얼마 전에 석산이라는 자가 해양대군의 종에게 ‘도원군(의경세자)이라 잘못 봉하였으니 세자가 죽지 않고 어찌하겠느냐, 반드시 해양대군도 해할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적혔다. 그리고 얼마 후 세자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또한 세자가 병을 얻었을 때, 옛 시를 썼다. 사람들은 그 내용이 예사롭지 않다고 했다.

시 내용은 이렇다. ‘비바람 무정하여 모란꽃이 떨어지고/ 섬돌에 펄럭이는 붉은 작약이 붉은 난간에 가득 찼네/ 명황제가 촉 땅에 가서 양귀비를 잃고 나니 후궁이야 있었건만 반겨 보지 않았네.’

덕종은 세 명의 후궁을 뒀다. 1456년 세자 시절 윤기, 신선경, 귄치명의 딸을 동궁소훈으로 삼았다. 그러나 다음해 후궁의 얼굴도 익히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덕종은 2남 1녀를 두었으나 모두 단명에 그쳤다. 첫째 월산대군은 34세에, 첫딸 명숙공주는 26세에, 그리고 둘째 성종은 37세에 죽음을 맞았다. 덕종에 이어 1461년 예종 비 장순왕후와 2년 후 그 장자인 인성대군이 죽었다. 다음해 계양군이 세상을 떴다. 세조는 아랫사람의 잇단 죽음을 애처로워했다. 세종 때 최양선이 세종의 수릉을 논하며 ‘손이 끊기고 맏아들을 잃는다(절사손장자: 絶嗣損長子)’라고 한 말대로 문종, 단종, 덕종, 인성대군 등 왕의 장자가 단명했다.

세조는 명당 찾기에 나섰다. 1467년 지관에게 영릉(세종)의 길흉을 논하게 하고 천장을 추진했다. 그러던 중 세조가 승하했다. 이듬해 예종이 즉위해 영릉을 여흥(여주)으로 옮겼다. 하지만 예종 또한 1년 만에 숨을 거뒀다. 명당을 찾은 끝에 덕종의 경릉은 정역의 묘에, 예종은 그 옆에, 영릉은 이인손의 묘역에, 세조는 정창손 조부의 묫자리에 원래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자리했다.

경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각자 봉분이 있는 ‘동원이강릉’ 이다. 세조 광릉에 이어 동원이강릉으로 조성된 경릉은 봉분 사이가 꽤 멀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5.09.
경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각자 봉분이 있는 ‘동원이강릉’ 이다. 세조 광릉에 이어 동원이강릉으로 조성된 경릉은 봉분 사이가 꽤 멀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5.09.

◆세도가의 딸, 왕비는 ‘따 놓은 당상’

소혜왕후는 결혼해 ‘군부인→세자빈(정빈, 수빈)→회간왕비→인수왕비→인수왕대비’로 신분 상승을 이뤘다. 왕후 한씨는 1437년 청주 서원부원군 한확과 남양부부인 홍씨의 딸로 태어났다. 세도가의 집안이었다. 한확의 누나는 명나라 3대 황제(영락제)의 후궁, 누이는 5대 (선덕제)의 후궁이었다. 둘째 딸은 세종의 아들 계양군과, 6녀는 세조의 장자 도원군과 결혼하니 두 사위가 왕자였다. 실세 한명회의 딸은 둘째 며느리로 맞았다. 어머니 남양 홍씨 집안도 막강했다. 외숙부 홍원용과 세조는 윤번(정희왕후의 아버지)의 사위였다. 홍원용의 동생(홍이용)의 사위가 세종의 7남 평원대군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적장자인 왕자와 결혼했으니 왕비의 자리는 맡아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1456년 아버지 한확이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던 길에 병사하고 말았다. 이어 이듬해 남편 의경세자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한씨는 궁을 나와 사저(현 덕수궁)로 갔다. 정빈으로 봉해지고 1465(세조 11)년 11월에 수빈으로 됐다. 원경 왕후의 세자빈 명칭 정빈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수빈의 앞은 캄캄했다. 그러나 왕실과 멀어지는 듯하던 수빈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세조와 예종이 연이어 승하하고 다음 왕에 자신의 둘째 잘산군(훗날 성종)이 오른 것이다. 13살 성종의 어머니이자 대비인 소혜왕후의 시대가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인수대비, 왕실 실세와 지식인 이미지

소혜왕후는 빈틈이 없고, 시부모 세조와 정희왕후를 극진히 섬겨 주변의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매사에 엄격해 자식을 엄하게 가르쳤고 사소한 과실도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왕후는 왕실 여성으로는 드물게 학문 수준이 높았으며 1475(성종 6)년 중국 서적을 참고로 ‘내훈’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주로 여성의 언행, 효친, 혼례, 부부, 모의(어머니의 역할), 돈목(형제친족의 화목), 염검(절약, 검소)에 관한 것이었다. 왕후는 좋은 집안에서 자라나 최고의 남편을 만났으며 학식과 정치적 감각을 갖춘 지식인 여성이었다. 나랏일에 나서고 아들 왕의 배경이 됐으며 기개와 능력이 출중해 조정의 대신들과 논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시어머니 정희왕후는 이러한 며느리 소혜왕후를 인정했다. 1469년 11월 28일 대신들이 대비(정희왕후)에게 어린 성종의 청정을 권하자 “나는 수양하고자 한다. 또 나는 문자를 모르나 수빈(소혜왕후)은 문자도 알고 사리에도 통달하니, 가히 국사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1470년 4월 20일에는 “인수왕비가 총명하고 사리에 밝아서 일을 잘 아니 큰일을 전하여 맡기고자 하는데 어떠한가”라고 했다. 대신들이 극구 반대했다. 1472(성종 3)년 대비는 인수왕비의 서열을 왕대비(안순왕후)의 앞에 두게 했다. 고부 관계가 매우 두터웠다.

인수대비 ‘내훈(內訓)’. 소혜왕후는 인수대비가 돼 1475년 여성의 역할을 규정한 교양 서적 ‘내훈’을 펴냈다. 내훈은 언행, 대인관계, 처세에 대한 내용으로 영조 때까지 5차례나 간행됐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5.09.
인수대비 ‘내훈(內訓)’. 소혜왕후는 인수대비가 돼 1475년 여성의 역할을 규정한 교양 서적 ‘내훈’을 펴냈다. 내훈은 언행, 대인관계, 처세에 대한 내용으로 영조 때까지 5차례나 간행됐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3.05.09.

◆47년의 파란만장, 결국 ‘세옹지마’

그러나 인수대비에게 고난이 닥쳤다. 1474년 성종의 첫 부인 공혜왕후가 19세에 죽고 후궁 윤씨가 왕비가 됐다. 아들 연산군을 낳은 후 질투와 압승술을 쓰는 등의 행태를 보였고 이는 심해졌다. 1479년 왕비 8개월 만에 폐비됐고 결국 1482(성종 13)년 8월 사사되기에 이르렀다. 세월이 흐르고 1494년 손자 연산군이 즉위했다. 인수대비는 인수대왕대비로 봉해졌다. 정국은 원만했다. 그러나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의 죽음을 알게 된 후 궁궐은 피비린내 나기 시작했다. 연산군은 생모 폐비를 제헌왕후로 추존하려 했다. 대왕대비는 반대했다. 연산군이 화를 참지 못해 할머니에게 횡포를 부렸다. 인수대비는 1504(연산 10)년 4월 27일 저녁 8시경 창경궁 경춘전에서 훙서(薨逝, 왕이나 왕족 등의 죽음을 높이 부르는 말)했다. 연산군은 장례도 소홀히 했다. 기록에는 “태어나면 반드시 죽음이 있다. 대비께서 춘추가 높고, 오랜 병으로 일이 이렇게 되었다. 3일 만에 성복하되, 상제는 덕종에 따르라”고 했다. 또한 “조정에 임하신 지 오래되었지만, 나라에 별로 이렇다 할 일이 없고, 다만 어른으로 섬겼을 뿐이다. 안순왕후(제8대 왕 예종의 계비)보다 좀 낮추면 합당하다”하니, 이를 반대하자 “안순왕후의 상제에 의하여 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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